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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도적인 교회 (행 1: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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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강국 목사 (신시내티교회)

지난 목요일은 예수님의 승천하신 날로 교회는 기억하고 지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음 주일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던 날로 교회는 기억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주일로 교회는 지키고자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은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던 그 중간시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떻게 지냈는가 하는 데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흔히들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이 있기 전에 제자들이 한 일을 기억함에 있어서 오늘 본문의 14절의 말씀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모두,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들과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썼다.” 즉, 기도에 힘쓴 모습만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성령을 받으려면 한마음과 한뜻으로 기도에 힘써야 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맞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럼, 또 무엇이 필요할까요? 이를 생각하기에 앞서 우선 오늘 본문의 앞뒤를 살펴보십시다. 오늘 본문의 앞부분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과 하늘로 승천하신 사건이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뒷부분인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나와 있습니다. 이 사이에 오늘 본문이 들어 있는데, 이런 점에서 성령강림의 사건을 앞둔 제자들의 모습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 또 하나는, 이 앞, 뒤의 사건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권능(힘)”이라는 단어와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8절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에 따른 결과가 바로 행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인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에 의해 제자들과 모인 무리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서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의 앞부분과 뒷부분에는 이렇게 성령의 힘과 권능에 대한 약속과 성취로 채워져 있는 것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중간 시점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감당했던 일이 무엇인고 하면, 바로 한마음과 한뜻으로 기도한 일과 함께, 16절 이하에 나오는 사도직을 보충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앞장서서 그 일을 추진하는 과정을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찍이 택하신 12명의 사도 중에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여 예수님을 팔아넘김으로 이 사도 그룹에서 스스로 탈퇴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과정을 언급하면서 이 가룟 유다 대신에 다른 한 사람을 뽑자고 제안합니다. 이에 모든 제자들이 이 제안에 찬성하여 요셉이라는 사람과 맛디아라는 두 사람을 천거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기도하여 제비를 뽑으니 맛디아가 뽑혔습니다. 그리하여 이 맛디아를 사도단에 가입시키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빠진 한 사람의 사도를 보충하는 일이 승천과 성령강림 사건 중간에 있어서 제자들이 열심히 기도하는 일과 더불어 꼭 했어야만 했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강림의 놀라운 사건이 임하는 데 있어서 기도하는 일과 더불어 이렇게 교회를 조직하는 일이 함께 중요한 포인트를 차지하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나아가서 성령의 권능을 입게 되는 제자들과 초대 교회의 귀한 밑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를 유념해야 할 줄 압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도를 보충하여 사도단을 정비하는 일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길래, 이렇게 성경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교회란 이러한 사도성을 지닌 교회라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교회란 모름지기 이렇게 사도적 전승을 지닌 교회의 모습을 지닐 때에야 비로소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신시내티 한인 장로교회는 어떤 다른 모습보다도 이러한 초대 교회의 사도적 전통과 그 사명을 계승해 나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은 우리 교회가 이러한 사도성을 지닐 수 있는 교회로서 나아가기 위하여 지녀야 할 모습이 무엇인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오늘 본문은 성령의 권능이 임하는 데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과 이에 따른 성령 강림 사건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다리 역할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귀중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볼 수 있는데, 한 부분은 열 한 사도와 예수님의 가족을 소개하고 있고, 다른 한 부분은 베드로의 인도로 가룟 유다 대신에 한 사람의 사도를 뽑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이 부분은 없어도 될 것 같지 않습니까?  꼭 있어야 한다고 볼 수 있는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가룟 유다가 빠진 열 한 사도면 어떻습니까?  꼭 한 사람을 더 채워서 열두 명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사도행전을 자세히 읽어봐도 가룟 유다 대신에 사도가 된 맛디아의 행적은 나오지도 않습니다. 혹, 맛디아가 나중에 어떤 독특한 일을 한 사도라고 한다면, “아, 가룟 유다 대신에 맛디아를 뽑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야!”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도행전 1장 이후로 맛디아의 이름은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맛디아를 뽑아서 열 두 사도의 수에 가입시킨다는 것은 과연 의미 있는 일일까를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기다리라”하신 그 귀중한 기간에 가룟 유다 대신에 사도 한 사람을 더 뽑는 일을 하였을까요?  사도가 열 한 명이면 어떻고, 열 두 명이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초대 교회 열 한 사도들을 비롯한 백 이십 문도들은 한 사람을 더하여서 예수님의 사도의 수에 가입시키는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건이 가져다주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물론 이에 대해서 우리는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건전하고 신앙적인 상상력을 동원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주님 되신 예수님께서 처음에 열두 명을 사도로 선택하셨기 때문에 12의 숫자를 맞추고자 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그 따르고자 하는 자세와 정신이 바로 사도들의 바른 자세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를 사도성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초대 교회 성도들로부터 배워야 할 내용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이러한 사도성을 지니고자 하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 한 것처럼, 사도들 역시 예수님의 그 뜻을 따르고자 하는 자세를 오늘날 우리들은 배워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 새로운 아이디어와 목회 철학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결코 잘못됨이 없다고 인정하면서 이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그대로 따르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오늘날 현대 교회에 더 절실하게 필요한 모습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도성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살펴보십시다. 그러기위해서 이러한 사도성과 배치되는 모습은 무엇인지를 발견해보면 되리라 봅니다. 우리는 이를 사도 베드로가 가룟 유다를 지목하여 한 말 중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25절, “봉사와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여기서 “제 곳으로 갔다”는 표현이 바로 사도성에 배치되는 말인 줄 압니다. 사도(apostles)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가 보내신 분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한다면 그는 사도의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교회가 사도성이 있어야 한다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의미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초대 교회 백 이십 문도는 이러한 사도성을 간직하는 공동체였습니다. 맛디아를 뽑아 열 한 사도의 수에 가입시킴으로써 예수님께서 원래 택하신 12명의 숫자를 채웠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옳다는 것입니다. 배반할 가룟 유다는 왜 선택했느냐고 예수님을 원망한 것이 아니라, 가룟 유다 대신에 맛디아를 채워 넣음으로써 예수님께서 옳으셨다는 것을 확증하고자 한 것입니다.
제가 아주 어려서 국민 학교 시절 읽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유럽 지방에서 나온 이야기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하다가 점심때가 좀 지나서 배도 출출하여 조그마한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날씨가 쌀쌀해서인지, 난로 가에 손님들이 몰려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그 중심에 어떤 마음씨 좋게 생긴 할아버지 한분이 앉아 있었고 그 주위에 여러 사람들이 앉아서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하고 가만히 들어보니, 기가 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날이 마침 장날이라, 사람들이 자기 집에 있는 물건이나 자기가 수확한 것들을 시장에 가지고 나와 팔기도 하고 사기도 하는 날이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자기가 팔고자 갖고 나온 것과 자기가 산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아침에 집에서 나오면서 그동안 길렀던 말 한 마리를 시장에 가서 필요한 것으로 바꾸고자 끌고 나왔습니다. 말을 끌고 나오다가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암소를 끌고 시장에 가는 농부였습니다. 그 암소를 보고, “아, 이 암소를 가져다가 밭의 일을 시키면 우리 마누라가 좋아하겠구만” 하는 생각에 그 농부더러 그 암소를 자기의 말과 바꾸자고 했습니다. 그 농부는 그러자고 하면서 금방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암소를 끌고 가는데, 어떤 사람이 양을 끌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이 양을 보면서 “털은 깎아서 옷을 해 입고, 젖을 짜서 마시기도 하고, 치즈도 만들면 우리 마누라가 좋아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암소와 바꾸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좋다고 선뜻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 양을 끌고 가는데, 어떤 아낙네가 품에 암탉을 안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이 암탉으로 아침마다 계란을 얻으면 우리 마누라가 얼마나 좋아할까 싶어 자기의 양하고 바꾸자고 했습니다. 그 아낙네는 “이상한 할아버지야” 하는 얼굴로 쳐다보더니만 선뜻 바꾸어 주었습니다. 바꾼 암탉을 고이 안고 가는데, 어떤 젊은 사람이 큰 보따리를 매고 가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자기 과수원에서 지금 막 따갖고 오는 사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 한 번 보자고 하면서 자루를 여니까, 탐스런 사과가 자루 하나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썩은 사과도 있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순간 이 사과를 가져다가 먹기도 하고, 파이도 만들고, 쥬스도 만들면 우리 마누라가 참 좋아할 거야 하면서 자기의 암탉하고 바꾸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은 선뜻 바꿔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과가 담긴 자루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제 할아버지 집에 가시면 할머니에게 된통 혼나실 겁니다”라고들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할아버지는 “그런 말 말어. 우리 집사람은 내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언제나 오케이야” 하는 것입니다. 길가다가 이 주막에 들린 이 여행자의 눈에도 이 할아버지의 처신은 참 잘못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끼어들면서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할아버지, 제가 봐도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혼나실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는 웬 낯선 사람이 끼어들어 말하니까 “무슨 말이야? 내가 내 마누라를 잘 알지, 당신이 어떻게 안다고 그런 말을 해?” 하고 응수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나그네가 제안을 했습니다. “할아버지, 그러면 저와 내기하시지요. 할아버지 말씀이 맞는지 안 맞는지 할머니를 모셔서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만일 할아버지 말씀이 맞으면 제가 말 한 마리 값을 드리고, 제 말이 맞으면 할아버지 그 사과 자루를 제게 주셔야 합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좋다고 하시면서 “누가 가서 우리 할망구 데려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발 빠른 사람 하나가 가서 그 할머니를 모셔왔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보자마자, 아까 사람들에게 한 이야기를 쭉 다 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때? 내가 잘 했지?” 했더니, 할머니께서 “그럼요. 당신이 하는 일은 언제나 다 잘하는 일이지요” 하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러면서 아주 기분 좋은 듯이 두 분이 서로 바라보며 웃더랍니다. 이 나그네는 그 모습을 보면서 감탄을 했답니다. 마침 이 나그네는 상당한 부자였기에, 그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많은 돈을 선물로 드리고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에 대해 이러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옳았다고 여기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도성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다른 어떤 원칙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교회가 되도록 늘 노력해야 할 줄 압니다. 이렇게 우리 교회는 언제나 예수님이 옳았다고 하는 사실을 간직하는 사도적인 교회가 되어 사도행전 1장에서 2장으로 넘어가는 데 꼭 있어야 하는 이러한 다리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성령의 능력을 받는 교회가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가룟 유다처럼 제 길로 가고자 하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으로 하고자 하는 모습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제멋대로 행하고자 하는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피밭으로 가는 길입니다. 황폐한 자리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맛디아는 비록 사도행전에 어떻게 사역을 하였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렇다고 가룟 유다처럼 제 길로 갔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 사도의 직분을 잘 감당하였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맛디아를 뽑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도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왜 예수님은 사도를 열두 명을 선택하셨을까요?  많은 학자들의 견해로는 이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염두에 두시고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즉, 열 두 명의 사도를 택하신 것은 전체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기 위한 것이지 단순히 이스라엘 지파 중 어느 특별한 집단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온전함을 기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12 사도를 채운다는 것은 선교적인 의미가 담겨진 모습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도 우리의 맛디아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맛디아는 우리 주변의 길 잃은 양 한 마리일 수도 있고, 집을 나간 양 한 마리일 수도 있으며, 우리들의 잃어버린 첫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불순종하여 하나님과 멀어져간 우리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제멋대로 자기 길을 간 가룟 유다와 같은 모습을 버리고, 맛디아를 선택하여 예수님께서 원래 만드신 그 그릇에 채우는 모습이 바로 사도행전 1장에서 2장으로 넘어가는 다리의 역할을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 바로 사도의 숨결을 간직한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특히 오늘 장로로 안수를 받는 귀한 네 분의 집사님들은 이러한 맛디아의 역할처럼 사도성을 회복하는 교회로서의 모습을 간직하는데 쓰임 받는 귀한 종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이 임하여서 모인 모든 무리들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능력을 받게 된 것처럼 이제 우리 교회도 이러한 성령의 능력을 받을 수 있는 진정한 백 이십 명의 문도들이 될 수 있도록 우리의 가룟 유다를 버리고, 맛디아로 채워 넣을 수 있는 사도성을 회복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는 이러한 사도성을 회복함으로써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주님의 몸 된 교회로서의 모습과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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