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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막 9:4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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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이수영 목사 (새문안교회)

오늘 본문의 각 구절들을 한데 묵는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43절, 45절, 57절이 각각 "영생에 들어가는 것" 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도리가 오늘 본문의 주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선 43절, 45절, 57절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자 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희생을 치르면서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손이나 발이나 눈이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데에 장애가 된다면 차라리 그것들을 잃을지언정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48절에서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하신 말씀은 43절, 45절, 57절의 끝마다 반복된 "지옥에 던져지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나라를 잃는 일의 심각성과 그 고통스런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49절과 50절의 말씀은 그 해석과 앞서는 43-48절까지의 말씀과의 연관성을 찾는 일이 다 쉽지 않습니다. 먼저 49절 말씀을 봅니다: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무슨 뜻입니까? 우선 여기서 "사람마다"의 "사람"은 적대적인 세상에서도 하나님께 진실하려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들은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우선 "소금 치듯 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레2:13의 말씀과 겔43:24의 말씀이 그 의미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레2:13에서는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했고,겔43:24에서는 "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 했습니다. 레2:13에서는 언약의 소금이라 했습니다. 언약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는 반드시 소금을 쳐야 하는 것입니다. 제물에 소금을 치는 것은 언약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는 말은 불로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자임을 확인 받는다는 뜻입니다. 왜 불입니까? 예언자 말라기는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말3:2)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7) 했고 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4:12)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불은 종종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을 시험하고 연단하는 수단으로서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하신 말씀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은 시련을 통해서 그 시련을 이기고 믿음을 지킴으로써 하나님나라 백성임을 확인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49절 말씀 또한 앞선 말씀들의 공동의 주제인 하나님나라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됨의 도리에 속하는 말씀임을 봅니다.

마지막 50절을 봅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이 말씀의 앞부분인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하신 말씀은 설명이 필요 없이 그 뜻 명백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뒷부분의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이며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의 뜻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는 것은 그 앞에서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하신 말씀을 고려할 때 "너희가 모두 소금 맛을 잃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은 제자들 모두가,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이 세상의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면 불화할 일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같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각자가 소금의 맛을 잃지 않으면 그 공동체는 화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조금 앞서는 33-35절의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서 서로 격분하고 크게 쟁론을 벌인 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3년간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제자들 사이에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35절)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서로 크다, 먼저 되겠다, 높은 자리에 오르겠다 하며 싸웠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말씀하심으로써(막9:34-35) 서로 화목하는 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즉 서로 먼저 섬기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먼저 섬기는 것은 바로 소금다움의 하나입니다.

소금의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 자가 있을 때 그 공동체는 불화하게 됩니다. 소금의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 자는 자기 혼자 소금의 역할을 안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열심히 바르게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이들을 헐뜯고 비아냥거리고 모함하는 것이 흔히 있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변명하거나 합리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무튼 이 50절 말씀 또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도리에 관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전체의 주제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일"이며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제자의 도리"라고 했지만 또 달리 말한다면 "믿는 이의 시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3절에서 말하듯 영생에 들어가기 위하여 필요하면 손이라도 찍어버려야 하는 것도 하나의 시련입니다. 45절에서 보듯 영생에 들어가기 위하여 필요하면 발이라도 찍어버려야 하는 것도 하나의 시련입니다. 47절이 말하듯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필요하면 눈이라도 빼버려야 하는 것도 하나의 시련입니다. 49절에서는 사람마다 불로 상징되는 시련을 통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임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50절에서는 소금이 언급되었는데 소금은 다른 것에 던져져 스스로는 녹아버림으로써 다른 존재의 신선함과 건강을 유지하거나 맛을 나게 하는 물질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버려야 하는 것도 어떤 의미의 시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 시련이 하나님의 나라로 받아들여지는 관문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시련이 오게 하는 요인들로서 두 가지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 안의 탐욕이 그 요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 하면서도 이 세상적인 탐욕 때문에 우리의 손이 해야 할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며, 우리의 발이 가야 할 곳은 가지 않고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가며, 우리의 눈이 봐야 할 것은 보지 않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려고 찾아다니게 되며 그래서 하나님나라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안의 이러한 탐욕을 끊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주님을 따르는 것이고 하나님나라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모든 탐욕을 다 끊어버려도 좋을 만큼, 아니 그것과 비교도 할 수 없게 복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시련이 오게 하는 다른 요인은 외부로부터의 핍박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과 그의 교회와 그의 백성에 대하여 적대적입니다. 따라서 이 적대적인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많은 시련을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핍박을 감내하지 못하면 우리의 손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 되고 우리의 발이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가며 우리의 눈이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게 됩니다. 눈과 손과 발은 우리가 보고 행하고 처신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비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나라를 배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이 시련을 통하여 불의 연단을 거친 정금 같이 빛나는 믿음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세상과 타협하고 그 어떤 시련도 다 피해가며 세상의 것과 육의 욕심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는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없음을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의 탐욕으로부터 오는 시련과 외부로부터의 핍박에서 오는 시련을 모두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불과 소금은 옛 이스라엘의 성전제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번제는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불에 완전히 태워져야 합니다. 불에 태워진 제물의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탐욕을 성령의 불로 태워 없애며 믿음의 시련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로 바쳐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특히 마지막 절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새겨 넣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지금 그 소금 맛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지 우리 각자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소금은 소금을 필요로 할 때 필요로 하는 것에 던져져야 할 터인데 던져지기를, 그래서 우리는 녹아 없어지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이미 소금 맛을 다 잃어버려서 던져져 봐야 아무 쓸모가 없어진 것은 아닌지? 소금의 맛은 짠 맛입니다. 소금 그 자체는 짜서 그것만 따로 먹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짠 맛이 있어야 음식이 맛있어집니다. 이 세상의 악을 악이라 하고 불의를 불의라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짠 맛입니다. 그런데 그러다가는 시련이 온다고 하여 입을 닫고 지내거나 본 것을 못 본체 하거나 가야 할 곳에 가지 않거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곧 맛을 잃은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더럽고 부패하기 쉬운 것일수록 소금을 필요로 하듯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세상의 소금인 그리스도인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짠 맛을 잃은 그리스도인들만 있을 뿐이면 이 사회는 그리스도인들로 인하여 깨끗하고 건강하며 살 맛 나는 세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짠 맛을 지녀도 싫다고 배척하려 하지만 우리가 짠 맛을 잃으면 더 더욱 우리를 무시할 것이며 그 때에는 우리를 이 사회에 도움이 안 되는 집단이라고 더 맹렬히 핍박할 것입니다. 세상이 어려워질수록 세상과 짝하여 적당히 지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더 우리 본연의 짠 맛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같은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 되고 화목할 수 있는 길입니다. 세상이 힘들어지고 시련이 닥치면 공동체가 위기에 처할 수 있습니다. 시류에 영합하려는 사람들과 시류에 맞서는 사람들로 갈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비난하게 되며 그래서 대립하게 되고 분열하기에 이르기도 합니다.

오늘날 국내정세와 사회분위기는 결코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직간접으로 교회를 압박하고 기독교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하려는 움직임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제 곧 해방이후 교회가 가장 힘든 시기를 맞게 될지 모릅니다. 이 때에 만일 교회가 그 소금 맛을 잃고 앉아 있으면 끝장입니다. 분연히 맞서 싸워야 합니다. 먼저 우리 안의 온갖 탐욕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리고 밖으로부터의 모든 핍박을 극복할 힘을 길러야 합니다. 참된 믿음은 시련을 통해 더 순수하고 강한 믿음으로 연단되는 법입니다. 참 믿음이 아닌 것은 참 믿음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도 시련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은 잘 견디고 이기면 교회에 유익이 됩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사방으로부터 우겨 쌈을 당하는 이 위기와 시련의 때를 오히려 바른 교회로 거듭나는 기회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이제 진정 깨어 일어나고 이 땅의 그리스도인이 그 짠 맛을 되찾는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우리 모두 뜨겁게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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