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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능력을 따라 힘을 다해 수고하는 성도(골 1: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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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최종천 목사 (분당중앙교회)
 
날씨가 무척 무더워졌습니다. 특별히 올 여름은 무척 덥다고 예고된 바 있었는데 아마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아마 여름철에 교회에서는 하기선교다, 하기 수련회다, 각종 모임을 통해서 집중적인 영성 훈련을 받고 봉사와 헌신의 기회를 삼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 행사 뿐 아니라 우리 개인적인 삶에도 기회가 되면 휴가를 가기도 하고 또는 시간을 내서 우리 근본적인 삶의 문제와 믿음의 문제를 생각해 보며 하나님 앞에 우리의 믿음을 더욱더 진보시키는 기회를 가져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 온전한 믿음의 백성이 되어서 내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백성들에게 기쁨을 주는 온전한 성도의 지경으로 나아감을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특별히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온전한 자로 세우는 일을 감당하기를 소원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능력을 입으며 그 가운데도 힘을 다하여 주의 뜻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특별히 이 말씀을 통해서 이 무더운 여름철에 애써서 지내고 계신 우리 성도님들께 하나님의 은혜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첫 번째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오늘 말씀대로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침의 목적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을 전하여, 그리고 그들을 가르쳐 그들이 예수를 믿고 어느 정도 믿음이 자라는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 하나하나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질 수 있도록 힘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행하고 있는 모든 하나님 앞에 이루어지는 삶의 아름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먼저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로 서야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세울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자란, 복음으로 무장이 되어 이제는 어떠한 이론이나 논리, 삶의 상황에서도 그가 받은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지 않는 성도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상황 때문에 나는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혹시라도 의심해 본 적은 없으십니까? 내게 주어지는 많은 어려움 때문에 과연 하나님이 계신가라고 마음에 회의해 본 적은 없습니까? 마음에 의심까진 않더라도 내 행동은 실망하고 복음을 의심하는 자의 모습으로 비쳐지지는 않으셨습니까?

완전한 자라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그가 구원받은 자로서, 그의 삶의 생활 모습까지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세계 속에서도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달라지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매우 불안합니다. 믿음도 상황 따라, 그리고 나타나는 현상에 따라 달라지면 우리는 아직은 믿음의 성숙의 길에서 먼 거리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신앙의 품위를 지키고, 우리의 수준을 훼손시키는 이와 같은 마음과 행동은 정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신앙의 품위를 지킵시다.’ ‘품위 있는 신앙을 가집시다.’

특별히 우리는 이런 품위 있는 신앙을 위하여서 영적위기관리시스템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 삶은 수많은 예기치 못했던 어려움이 삶의 변수로 등장합니다. 이 때 우리는 놀라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리고 그 동안 우리가 훈련했던 분명한 능력으로, 예상치 못했던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완전한 성도라는 것은 평상시보다는, 예기치 못했던 순간이나 처음 대해보는 일을 능숙히 처리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도는 이러한 일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뚝 크고 우리 삶의 영역을 넓혀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이 주님의 복음 안에 완전히 섰다면, 이제는 나아가서 다른 한사람 한사람을 믿음 안에, 복음 안에 온전히 세우는 일 즉, 재생산을 통하여 복음을 권면하고 가르치고, 그들을 세워가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사회적으로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실제적인 면에서 생각하면 이것은 단순한 삶의 구성요소로써 종교성을 띠고 있는 수준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 생명과 삶을 투여하여 믿음의 길에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사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이제까지 역사 속에 있었던 수많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자들, 그리고 주님 앞에 헌신한 사람들, 이제까지 살아왔던 우리 삶 속의 믿음을 우리가 어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 시간도 그들의 삶을 던져 세상 곳곳에서 주의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고 주의 복음을 위해서 그의 삶을 드린 수많은 헌신자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야 가지면 좋고 그렇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것이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전부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의 성품인 의와 진리와 거룩을 따라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귀한 은혜의 성품이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섬김으로 영적인 정서적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은 논리를 넘어선 체험을 통해 그 믿음의 논리를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믿고 있는 이 그리스도의 근본적인 구원의 역사와 생명이 분명할진대, 그리스도의 근본적인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나를 넘어서서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완전한 자로 세우는 일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객관적인 겉모습인 종교성이라는 형식 논리를 넘어서서 삶의 진실 속에 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나 잘 믿으면 됐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온전히 서지 못한 초보의 상태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나를 위하여 피 흘리셨고, 나는 그것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고 살아간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무덤덤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서 죽으셨고, 내 옆의 형제자매를 위해 죽으셨는데, 내 옆에 있는 그가 아직 그리스도를 몰라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에게 의미가 없다면 과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더욱이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여 권하고, 그리고 가르쳐 지키게 하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운다고 말씀합니다. 점층적인 복음의 진보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이 은혜를 받으면 우리는 복음을 전파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이 끼치는 감동은 그것을 혼자 소유하지 못하고 전파하게 만드는 절대 진리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 번 강조하지만 말이 좀 쉽지 않으니까 다시 한 번 따라서 합시다. ‘ 절대 진리의 전파 사명성’절대 진리는 그것을 전파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성을 우리에게 부여한다 이 말이에요. 절대 진리라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내가 반드시 그것을 전하고야 마음이 편해지는 전파의 사명성을 부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마음에 절대 진리로 임하면 그것을 전파하고 싶은 마음의 사명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만약 내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 복음의 역사에 감동되어 있는가를 확인해 보시려거든, 내 마음에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감동과 긴박감이 있나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마음에 뜨거운 감동이 있기를 위해서 소원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그 전파한 진리를 구체적으로 생활 속에 가르치고 그것이 우리 삶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적용하여 우리 삶에 진정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은혜의 역사는 마음에 감동을 끼치는 감정적인 설득과 느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그의 생활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이제 전파하는 수준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교육의 수준, 즉 가르쳐 지키게 하는 수준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백성 하나를 세우는데도, 복음을 전하고 검증 없는 가르치는 수준을 넘어서서 온전한 수준까지 나아가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우리 성도들은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으로 우리의 수준을 마감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수준에서, 이제는 그야말로 헌신하여 나는 없어지고 내 안에 오직 주님만이 드러나는 은혜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내가 완전해지고 다른 사람을 전파하고 가르쳐 그들을 온전한 사람으로 세워가야 합니다.


두 번째, 오늘 성경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각 사람을 온전히, 완전히 세우기 위해서는 주님의 능력을 소유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칫하면 내 힘과 능력만을 의지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근원적으로 나도 모르게, 내 능력과 주변을 돌아보게 됩니다. 반사적으로 바라보고, 거기서 어떤 일을 결정하고 실행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한 번 스스로를 점검해 봅시다. 어떤 어려운 일이 생겼어요. 그 어려움을 해결하실 때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첫째, 지갑을 열어본다. 둘째, 전화번호부를 들춰 본다. 세 번째, 이 전에 이 일을 어떻게 처리했나를 회상해 본다. 어떤 종류입니까? 물론 다 필요할 것입니다. 내 지갑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그것을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아니면 누구 아는 사람에게 전화 걸어 내 어려운 사정을 호소하고 그에게 문제 해결을 부탁할까? 아니면 이전에 내가 그 일을 해결했던 것을 돌아보아 또 다른 해결의 방법을 찾을까? 라고 우리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이라면 보다 근본적인 것은 우리에게 어려움이 당해졌을 때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주님의 지혜와 힘을 구하는 것이 우선적이며, 그 주님의 은혜와 도움을 구하는 과정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대로 그 다음에 행동을 이루는 것이 믿음의 사람의 순차적인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경우를 보면 그는 처음에는 어떤 일이든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을 재가 받아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자신이 붙었습니다. 이 전에 했던 그의 승리의 체험들이 있습니다. 그 일을 본 사람은 하나님이 없이도 그 일을 진행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에게 올무가 되어 그를 침몰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내 힘과 내 능력을 의지하게 되면, 자꾸 내 생각이 주장되고, 또 다른 이들의 일들이 판단되고, 불만이 생기며, 주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내 주장과 욕심의 포로가 되어버리고 말아 버립니다. 이 때 생기는 것은 기쁨이 사라지는 일입니다. 마음이 괴롭습니다. 우리 마음에 평안이 없고 고통스러운 것은 일단 내 주변이나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 내 마음에 균형이 깨졌기 때문이에요. 내 마음에 균형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자꾸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따지고 들고 자신이 마치 정의의 사도나 위대한 재판관이 되려는 것처럼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혹독하게 가야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결국 자신이 가장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사단은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우리를 미혹합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영안이 어두워지면 바로 오는 것이 뭐냐면 우리에게 판단력이, 분별력이 흐려진다는 사실입니다. 내 주장, 내 욕심의 포로가 되면 그 다음엔 보이는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저 아래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번에 해외 선교단과 더불어 짧은 시간이지만 선교를 다녀오면서 출발하기 전에 네 가지를 부탁드렸습니다. 그리고 매일 저녁 그곳에 있는 동안도 강조하여 부탁드리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첫째는 절대 복종입니다. 불평하거나 자기 이야기 하려면 헌신한다는 말도 하지 말라고 우리는 여러 번 말씀드리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복음에 절대적인 복종입니다. 손들고 말하고, 내 생각엔 내 말하고, 그 다음엔 내 느낌말하고, 그리고 순간적으로 드는 내 생각을 여과 없이 말해 버린다면 모든 것은 아무 것도 될 일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해 보지 못하고 적전 분열로 말미암아 결국 마음만 상하고 모든 일을 그릇 치게 되는 경우를 봅니다.

두 번째는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피곤해? 나는 모든 일을 다 두고 왔는데. 나는 정말 얼마나 안됐어. 이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사람이 이 정도까지 갈 수 있을까?’ 자기 연민에 빠지는 사람은 진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 연민에 빠지는 사람은 자기 수준 이상의 일은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이 자기 연민에 빠져요. 우리 자신을 너무 불쌍히 여긴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불쌍히 여길 뿐이지 인간에게나 나 자신에게 불쌍함을 받을 존재는 아니라 이 말입니다.

세 번째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나는 없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데, 내가 나를 주장하는 한 이미 그리스도께서는 내게 자리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헌신했으면 잊어 버려야 합니다. 헌신하고 그 사실을 끝끝내 기억하여 내 자신의 공로와 내 자신의 업적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아무런 마음의 기쁨과 평안이 사라집니다. 스스로의 자기만족에 빠질 수는 있으나 자기만족에 빠지게 되면 결과적으로 그들에게는 영적 기쁨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자기만족에 빠지게 되면 자기 의를 내세우게 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결국엔 영적인 평안을 잃어버리고 결국 사람을 판단하고 스스로에게 침륜하게 되는 이와 같은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이런 네 가지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약해지면 사단이 여지없이 우리를 덮쳐 불평과 불만, 그리고 마침내 공동체를 깨치고 하나님의 백성을 초토화시켜 끝내버립니다. 선교를 하다가, 혹은 주님의 일을 하다가, 어떤 경우는 싸움만 하고 끝나는 경우도 많아요. 어떤 경우는 그저 마음의 상처만 가지고 돌아오고 교회 주의 일 하다가도 차라리 내가 봉사하지 않는 것이 더 은혜가 되겠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이 말입니다.
이번에는 그야말로 누구하나 한 마디 불평 없이 처음부터 성령 충만하게, 시간이 가면 육신의 피로는 누적되죠. 새벽 4시 5시부터 일어나서 밤 12시 넘어까지 진행되다 보니 몸의 피로야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성령 충만하게 우리가 기쁨으로 역사할 수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저도 매일 과하다 싶을 정도로 피곤하여 사역에 지쳤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밤늦게까지 강력하게 기도회를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더 성령 충만함으로 감사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목사라도 피곤해 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볼 때 제 마음이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제가 먼저 제 자신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내가 여기서 인간적인 연민에 빠져 버리면 그야말로 사단에게 끌려 다니다 말겠다고 생각하고 결국은 몰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까지 생각해도 물론 쉴 때도 당연히 있었겠지만 늘 편안하게 지낸 모임은 늘 다툼과 마음 상하는 일만 많아요. 자기 생각, 자기 이야기할 기력이 있어서 그러겠죠. 그런데 그야말로 우리가 바닥까지 헌신한 모임이야말로 늘 성령이 충만하고 그와 같은 모임을 통해서 한 수준을 높이는 것을 보곤 했습니다.
저는 늘 생각합니다. 주의 일을 하는데 그렇게 하이테크한 능력이 필요 없어요. 순수한 마음, 헌신된 심정, 감사하는 마음, 나를 주장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 슬며시 수고하고 나를 감추는 마음이 있으면 이것은 천국의 사역입니다. 머리 굴리고, 내 욕심 있고, 내 이름 남기고 싶고, 내가 남보다 박수 많이 받고 싶고, 내 업적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으면 이미 하나님의 상급은 끝난 일입니다. 내 생각이 채택되지 않고, 내 생각이 관철되지 않아서 섭섭하다면, 그는 과연 내가 구원받은 백성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나를 내려놓고 저 신앙의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힘, 내 능력을 주장하고 생각하다 보면, 결국 주님의 영광을 내가 가로막게 됩니다. 나는 내 주장, 내 영광을 추구하다 저 계곡 아래 떨어지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맙니다.
이 세상에서도 어떤 사람을 좋아하냐면 능력이 있으면서 겸손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능력이 있으면서 겸손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나라에서야 어떻겠습니까? 우리 지나온 생활을 한 번 머리 속에서 회상하며 녹음기를 한 번 틀어 보세요. 다시 틀어 보니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유독 내 목소리가 톡톡 튀어 나온다고 생각하시면, 내게 위기가 다가오고 있구나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목소리를 빌려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손과 발, 그리고 실제적인 힘을 빌려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누가 그 힘을 쓰고, 누가 애를 썼는지도 모르게 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더욱이 주님의 능력을 입기 위해서 우리에게 우선 될 일은 나 자신을 내려놓는 겸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주님의 능력을 입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힘입으려면 나를 부인하고 겸손해야 되는데 이것이 정말 왜 안 될까요? 우리의 죄악 된 성품 때문입니다. 결국 이것은 끊임없는 말씀의 은혜와 회개함 속에서 날마다 나를 쳐서 복종케 하지 못하면 우리 자아는 또 살아나 나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잡초는 키우지 않아도 밭을 뒤덮습니다. 좋은 풀은 잡초를 제거해 주고 비료를 주고 물을 공급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악된 성품을 인정하고 그것을 쳐서 복종케 하는 반복적인 애씀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지속되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나 자신을 온전히 부인하고 겸손의 지경까지 내려오기 위해서는 어느 순간 대결의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내적인 영적인 세계는 언제나 영적인 전쟁이 존재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만 우리는 마음이 편안할 수 있습니다. 늘 보니 이런 것 같아요. 육신이 좀 불편하면 마음이 편한 것 같아요. 육신이 좀 편해지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 같아요. 우리는 마음의 평안을 위해 때로는 우리가 육신이 좀 불편하다 할지라도 수고하고 애쓰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믿음의 백성이 영적인 평강을 이루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우리가 영적인 전쟁에서 쟁투하고 괴로워하며 승리까지 이르는 길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하여 나를 온전히 굴복시키고, 지속적으로 관리하여 그 상태를 유지하면 처음에는 어색하고 불편하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평안이 오기 시작합니다. 결국 우리 삶의 기쁨과 평안은 하나님이 주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나 자신을 부인하고, 나 자신을 내려놓고 겸손해지면, 갑자기 이 세상이 더 넓어 보이고 아름다워 보이며 내가 할 일이 비로소 보입니다. 세상이 악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악한 겁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닮으면 비록 세상이 죄악으로 물들어 있다 할지라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거룩과 선이 보이며 섭리와 역사가 보이고 내가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일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죄악된 인간의 심성 중에서도 그 가운데 있는 고운 하나님의 성품이 보이고 그 가운데 거주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니 상대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아끼고 내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입기 위해 중요한 것은, 그 일의 결과를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온전히 주님의 것으로 여겨,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내게 주신 은혜를 잊지 말고 외면하지 말고 늘 생각해야만 합니다.
언제나 우리 육신의 생각에는 자꾸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은 작아 보이고 잘 생각이 나지 않으며, 내가 주님께 드린 것만 커 보이고 그리고 잊어버려지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받은 은혜가 큽니까?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한 것이 큽니까? 그런데 우리는 자꾸 내 생각이 나요. 내가 하나님께 드리고 헌신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 이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나오지 않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제까지 살아온 것만 해도 그러니 우리는 감사한 것 아닙니까? 내가 수고하고 내가 능력껏 애를 쓰고 내가 정말 고통 가운데 그 일을 수행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지혜 주시고 건강 주시고 은혜 주시고 능력주시고 의지력을 주시고 우리들에게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주시지 않았다면 가능했겠습니까? 지금 우리 중에 누구 하나 건강하나 우리에게 거둬간다 한들 우리가 그 모든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저는 우리의 삶 속에 정말 우리 하나 살기 위해서 버적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우리의 삶이 초라해지지 않아요? 내가 좀 더 넓은 집에 살고, 좀 더 내가 편안한 삶을 살고 좀 더 쌓아져 모든 것이 보장되는 기간을 내가 얻기를 원한다면, 정말 우리의 삶은 너무나 초라해 지는 것 같아요. 내가 나 하나 살기 위해서 버적거린다면 너무 우리 삶은 처참하고 초라해지는 것 같아요.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 주셨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내가 받았다면 그것 가지고 정말 주님께서 원하는 일에, 원하는 사역에 원하는 곳에 내 삶을 잠시라도 드릴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삶에 하나님의 큰 은혜와 행복이 임하는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전 우리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나 하나의 한계를 넘어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 마음에 주님께 대한 감사가 넘치고, 사람들에 대한 감사가 넘치면 우리는 내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의 능력을 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고통 없이 산 사람을 선택하진 않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만들어서까지 시련의 풀무를 거치게 한 후에 그 사람을 선택하여 세우시고 들어 사용하십니다. 고난의 긴 터널을 건넌 사람만이 감사를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감사가 넘치면 내 자신의 수고와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않게 됩니다.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람에게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도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능력은 언제나 나 자신을 부인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반듯하게 살아가는 백성임을 봅니다. 왜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지 않나 생각하기 전에 내가 주님 앞에 반듯하게 서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선행되어야 합니다.

수고하고 헌신하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헌신하고 나서 가슴이 뛰지 않아야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구제하는 선행의 원리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한 번 선을 오른 손이 행하면 왼 손이 절대 모를 리가 없어요. 선을 행하면 그 날 우리가 얼마나 기뻐요. 가슴이 설레고 밤에도 잠이 안 와요. 내가 그렇게 선한 일을 행한 것 때문에 감격이 되고 눈물이 흘러요. 그리고 내가 자꾸만 이 일을 또 해야지 하고 마음에 감격이 돼요.

그런데 날마다 선한 일을 하면 밤에 감격도 없어요. 눈물도 안 흘려지고 날마다 이 일 해야지 생각도 안 해요. 그것이 삶이 되는 거예요. 당연한 일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오른 손이 하고도 내가 선을 행했는가 안 했는가? 구별이 안 돼요. 그의 기준이 벌써 선을 행하는 수준으로 높아졌기 때문이에요. 저는 여러분이 정말 냉랭했던 가슴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주의 뜻을 이루고 헌신함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영적인 북받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머물지 말고 이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것이 우리 삶에 일상이 되시기를 소원해요.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 되시기를 소원해서 이제는 의연한 기쁨과 하나님께 대한 감격과 감사가 가슴 깊이 속에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 속에 흘러 내리는 이와 같은 영적인 수준의 진보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더 쉽게 표현 드릴까요? 제가 더 좋은 예를 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생각이 나지 않아 몇 가지 적어 보았습니다. 헌금하는 일도 우리가 늘 이렇게 보면 내 마음에 어떤 정한 액수들이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요정도 수준에서 하나님 앞에 헌신한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가 은혜를 받아요.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들잖아요? 야, 내가 이렇게 하지 말아야 되겠다. 내가 생각했던 것 지금부터 열 배로 내가 모든 일을 진행해야 되겠다. 어느 순간 그런 마음 들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 열 배로 하나님께 드렸어요. 그러면 그 날은 그렇게 가슴이 벅차고 정말 은혜가 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제가 보니까 하나님께 헌신은 내가 헌신함으로 내가 은혜를 받는 거더라고요. 그렇게 가슴이 벅차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정말 그저 밥 먹을 때도 감사하고 잠 잘 때도 감사하고 그래요. 그런데 그게 날마다 진행되면 그렇게 가슴이 뛰고 감격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요. 그러면서 내 삶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수준으로 나아간다 이 말이에요.

저는 여러분들이 감격조차 안 된다면 감격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감격의 삶을 넘어서서 그것이 우리 삶의 일상적인 수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 어떻게 사실래요? 아이가 와서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 엄마, 나 오늘 숙제 했어.’ 칭찬해 주죠? ‘ 엄마 나 오늘 숙제했어.’ 칭찬해 주죠. 그런데 맨 날 숙제했다고 칭찬받지 말고 숙제는 당연한 것으로 하고 그 외에 우리가 뭔가 더 할 것 있으면 더 할 수 있는 이런 수준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영적으로 신앙의 수준이 훨씬 높아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를 정도로 우리 삶의 헌신과 선행과 주를 위한 삶이 당연한 수준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날마다 아이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온전히 자란 믿음이 되길 바랍니다.
다른 헌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에요. 수고하고 헌신하고 잊어 버려야 돼요. 이 전에 내가 수고하고 애쓴 것 다 기억나는 사람이 아니라 앞으로 해야 될 일이 생각나서 이전의 일은 미처 생각할 수도 없어요.

사도 바울이 뭐라고 이야기 했죠? 뒤에 있는 것은 다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앞으로 달려간다고 이야기 하고 있어요. 우리는 과거지향적인 사람이 아니라 앞으로 있어야 될 미래지향적인 사람이라 이 말입니다.
여러분, 세상 떠날 때 무슨 생각하고 세상 떠나겠어요? 내가 재물을 쌓아 두고 가지 못해서 안타깝다. 내가 더 큰 집에서 살지 못해서 안타깝다. 이것이 한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더 놓은 자리에 오르지 못해서 한이 되겠다. 여러분, 세상 떠나면서 여러분의 자녀에게 뭐라고 유언하시겠습니까? 너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집보다 세 배는 더 큰 집에서 살아야 한다. 너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그 자리에 못 올랐는데 그 자리에 꼭 올라다오. 여러분, 그렇게 유언하실 것 같아요? 아닌 것 같아요. 여러분, 믿음의 성도인데 뭐라고 유언하고 가시겠어요? 너는 보다 더 깊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라. 라고 소원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정말 이 세상을 떠나면서 내가 정말 누리지 못했던 세상의 권세와 세상의 기쁨과 능력을 내가 마음껏 누리지 못해서 마음의 한탄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좀 더 바른 삶을 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쁜 삶을 살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삶을 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 하나님 앞에 정말 내 후손이라도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소원하며 가시겠습니까?

저는 우리 성도님께 간절히 권면합니다. 건강해지기 위해서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제일 봉사 많이 하는 사람이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수입이 많아지기 위해서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많이 헌신할 수 있는 분들이 되기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은혜를 많이 받기 위해서 기도하시기 전에, 내가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사용하고 주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먼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께 감격하고 내가 하나님께 드리고 헌신한 것을 잊어버릴 수 있는, 앞을 바라보며 더욱더 진보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위하여 주님 앞에 기도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세 번째는 주님의 능력을 받은 우리라면 이제는 온 힘을 다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어 한 사람, 한 사람을 온전히 세우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온전한 사람들로 다른 사람을 세워 주려면 주님의 능력을 받아야 되는데 주님의 능력을 받고서도 우리의 온 힘을 다하여야 한다 이 말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세워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힘을 다하여’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쉽게 생각하고 좀 하다 지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부지게 마음먹고 달려들어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에게 실망을 드리는 것 같아서. 저는 20년 이상 교회사역을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제 마음 속에 한 가지 드는 생각은 너무나 슬퍼요. 사람은 잘 안 바뀌는 것 같아요. 목사가 이런 말씀 드려서 너무 죄송합니다. 사람 잘 안 바뀌는 것 같아요. 정말 조금 바뀌려다 또 뒤를 돌아보고 또 조금 바뀌려다 뒤로 오고, 정말 사람 안 바뀌는 것 같아요.
정말 속된 표현을 써서 이렇게 말씀 드려야 될 것 같아요. ‘ 정말 네가 죽던지 내가 죽던지 한 번 해보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정말 사람 안 바뀌는 것 같더라고요. 늘 그 때마다 이런 생각 합니다. 사단이 그렇게 쉽게 놓아 주겠나? 사단이 그를 그렇게 쉽게 놓아 주겠나?

그러나 이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만큼 그 일은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쉽게 바뀌어 지지 않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속에 우리가 힘을 다할 때 그 사람이 바뀌어져 하나님 앞에 원대한 역사를 이루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단의 시험과 방해가 있다는 것은 벌써 하나님께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그것을 넘어 하나님이 계획하신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어야 되겠다는 각오와 결의를 다져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혼자 그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성령의 도우심과 역사 속에서 그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는데 외롭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역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옆에 계신 주님의 위로를 받으며 성령의 인도와 능력을 체험하고 활용하셔야 합니다. 정말 성령께서 이 일을 꼭 인도하셔야 합니다. 내 마음 속에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확인시켜 주십시오. 간절함이 있을 때 성령께서 응답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낙심치 않게 하심을 봅니다. 우리는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만큼 보람 있고 감사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세워지고 변화되면 얼마나 큰 역사가 이루어지는가를 우리는 가슴 속에 벅차고 설레게 기대합니다.
저는 교회에서 두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후배 교역자들을 훈련하고 세우는 일이고 또한 우리 성도님들 마찬가지고 세워주고 교육하는 일입니다. 저는 우리 후배교역자들을 교육하면서 이 한 분, 한 분을 바로 세우고 훈련시키고 모든 필요한 능력을 갖추어 드리면 하나님 역사의 큰 부분을 이루어 드리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 분 세워드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큰 기여와 역사를 이루어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때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 쏟을 필요가 있는가? 때로는 편하게 가는 것이 피차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제 마음을 다시금 다지곤 합니다. 여기서 능숙해지고 시야를 넓히지 않으면 평생 쫓기는 사역을 하고 말 것이다. 과연 누가 책임을 질 수 있겠는가? 정말 이 곳에서 한 사람 세우면 하나님께서 큰 역사를 이루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놀라운 역사와 하나님에 대한 효과를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예수 믿고 천국가면 되는 것 아니냐?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면 저는 목사로서 제 직책을 유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자로 세워져야 합니다. 잠시 사람의 마음을 편케 하고 갈등 없이, 그저 편안하게 부담 없이 갈려고 생각하면 정작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닥치는 어려움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에게나 어려움은 필연적으로 때에 따라 닥치게 되는데 믿음의 성도가 그것을 능숙히 처리하지 못하면 그는 고통 속에서 그의 삶을 지낼 수밖에 없는데, 누가 그 책임을 져 주겠냐 이 말이에요.

그런 마음으로 우리는 한 분 한 분을 우뚝 세우려는 마음을 가지고 그 분이 세워질 때 하나님 앞에 얼마나 원대한 역사가 이루어지는가를 생각하며 우리는 가슴에 감격을 가지고 힘들지만 그 일을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 사람의 헌신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동체가 한 사람의 헌신으로 인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 사회가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가 얼마나 큰 은혜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가를 우리는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한 사람, 한 사람의 변화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나 자신과 우리 주변의 사람을 키우는 사역에 진력해야 합니다. 여러분, 교육의 효과는 최소 20년 후에 열매 맺는다고 하죠. 20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정말 지루한 가운데 일관성 있게, 지속적으로 인내하며 그 일을 이루지 않으면 정말 그 일의 결실을 쉽게 볼 수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 가운데 우리는 소망이 있고 기대가 있기 때문에 기도하며 지루한 사역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에 사용되는 것이, 사람을 세우는 일에 사용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런 힘들고 어려운 일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된 사역에 어떤 형태로라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감격스럽고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는 내가 서로 다른 사람을 세우는 사람을 세우는 일에 최우선적인 전략에 중점을 두고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가끔가다 이럴 때 있죠? 그 사람 학문은 높은데 인격이 안 되어 있어. 그 사람, 기능은 뛰어난데 매너가 좋지 못해. 수고한 것은 분명한데 자기 자랑으로 사람 마음을 불편케 해. 업적은 상당한데 늘 자기가 그것을 쥐고 휘둘러 자랑함으로 사람 마음을 늘 상하게 해. 이런 이야기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런 말은 틀린 말이에요. 학문이 높은데 인격이 문제가 있을 수 없어요. 그건 학문 자체가 안 된 겁니다. 기능은 특출한데 매너가 좋지 않은 것, 이것도 아니에요. 기능이 특출하면 매너까지 훌륭해져야 열매를 맺기 때문에 두 개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업적이 훌륭한데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랑해서 끝난다는 것은 업적도 의미가 없는 거예요. 업적이 훌륭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든 면이 합력적으로 온전한 사람을 세우는데 우리의 힘을 기울여야 돼요. 우리가 갈고 닦아져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드려질 수 있어야 됩니다.

이 모든 것을 위해서 우리는 어떤 구조와 조직이 사람을 세우는가 합당한가 생각하여 그 일에 최우선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이루는데 우선 사람을 키우고 그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조직과 기구와 장비를 마련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키우심으로 말미암아 오순절 성령 충만이 임하였을 때 그들이 나아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마침내 초대교회를 일구어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이루신 것을 봅니다.
그리고 우리의 수준을 한 단계, 한 단계 높여야 합니다. 작년의 믿음과 올 해의 믿음이 달라야 돼요. 지난달의 믿음과 이번 달의 믿음이 달라야 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 헌신의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우리의 감격의 수준을 높여야 돼요. 이 정도 수준에 감격했다면 우리의 감격의 수준이 높아져야 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진보하는 것을 보고 도전을 받아야 돼요. 서로에게 선한 도전을 줘야 한다 이 말입니다. 진보의 모습이 비웃음거리가 되면 안돼요. 신선한 자극으로 받아들이고 서로가 도전받는 풍토가 되어야 합니다.
자, 우리 옆에 있는 사람한테 한 번 인사 한 번 합시다. ‘저 때문에 도전받는 일이 많죠?’ 자, 우리 한 번 다시 인사합시다. ‘ 저 때문에 은혜 받는 일이 많죠?’ 다시 한 번 ‘저를 보니까 뭔가 새로운 일을 하고 싶죠?’ ‘저 분 정말 바뀌었어.’ 라는 말은 부러운 말이 되어야 돼요.

우리는 값싼 감상주의에 빠지면 안돼요. 그리고 매년, 언제고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제가 보니까 정말 진보라는 것은 허허, 기분 좋게 웃고 사람 좋은 거, 진보 안 되더라고요. 그리고 안됐다 하고 눈물을 찔끔거리는 것도 진보가 안 돼요. 불쌍히 여기는 것, 감상주의 가지고 진보가 안 되더라고요. 정말 그 수준을 넘어서기 위해서 정말 어려운 표현으로, 이를 악물고 좀 더 앞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지속적으로 나가고, 슬퍼도 그 시련에 의연하며 마음 다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와 같은 큰 발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이루지 않고는 우리는 절대 진보가 안 되더라고요. 저는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큰 믿음의 거목이 되고 거인이 되고 큰 믿음의 산맥을 이루는 봉우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정말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온전히 세우기 위한 전략적 사고를 가지고 접근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작정 그냥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진보와 성숙,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략적 사고를 가지고 계획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내 마음을 열어 맡김으로 주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늘 고민하고 생각하기 싫어하면 우리는 결코 진보할 수 없어요. 생각조차 싫어하는데 어떻게 내 행동을 바꾸겠습니까? 생각을 정리해 행동이 바뀌고 이 훈련을 통해서 이 훈련이 습관이 되어야 삶이 바뀌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천상 지난주에 선교를 다녀왔으니까 그 이야기를 해 드려야겠죠? 두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첫 째는 한 주간 동안 짧은 기간이지만 진행되면서 하루하루, 한 번 한 번, 모든 모임이 진행될 때 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점차적으로 완성도가 높아져간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첫 번째 시작한 것 보다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이렇게 진행되면서 모든 모습이 정말 점차적으로 달라지는 것 같아요. 수준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제가 느낀 것은 반복적으로 그 일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결국 우리는 완성을 향하여 나아간다는 생각이에요. 오늘 성경에는 완성품이 되라는 거예요. 미완성품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완성품이 되라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반복적으로 주의 능력을 힘입어 힘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온전한 모습으로 나아가져야 한다 이 말입니다.

두 번째는 그 곳에 계신 우리 여러 주민들을 보면서 느낀 것입니다. 정말 가난한 것 같아요. 우리의 시점에서. 1년 소득이 만 천 불이래요. 그런데 일로일로지역 파나이 섬이 있는 곳은 낙후된 지역이기 때문에 훨씬 더 못한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또 떨어져 있는 그 섬은 더 낙후된 지역이에요. 정말 보아도 너무너무 못 살아요. 자동차가 다니고 또 이러저러한 모든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하루 1불 가지고 먹고 사는 사람도 있대요. 한 돈 천원 가지고 하루 종일 사는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예요. 너무나 많다고 그래요.

정말 배우지 못한 것 같아요. 문명의 혜택을 거의 아직도 받지 못한 것 같아요. 저는 그것이 불행인가 생각했는데 불행이라고 생각은 안 되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불쌍하고 불행하다고 생각이 안 돼요. 전 불쌍하다고 생각이 안 들었어요.
정말 어떤 것이 우리 삶의 행복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많이 있어도 있던 것 조금 없어지면 우리는 얼마나 불행해 하며 하나님 앞에 눈물로 울고불고 매달립니까? 과연 어떤 것이 행복인가 생각해 봅니다. 정말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고,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수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어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상한 진리,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받아들이고 나서 이 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고상한 것들, 이전에 가지고 있던 가문, 문벌, 모든 귀한 것들이 다 내게 배설물과 같이 여겨졌다는 거예요. 정말 그리스도 도의 복음의 고상한 것을 생각할 때 이전의 모든 것이 배설물과 같다는 거예요.

즉, 그분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낮에 우리 의료 선교단이 열심히 치료해 주고 또 우리 청년들이 각 종의 사역을 통해서 또 그들을 섬기고, 뿐만 아니라 곳곳마다 다 모아서 집회를 가지고 낮에는 학교로 저녁엔 또 그 지역에서 하는데 정말 그 지역사회의 사람들이 거의 다 오는 것 같아요.

참 놀라운 것이 뭐냐면 저녁의 집회 때 학생들이 준비했던 공연을 정말 최선을 다해서 하고 말씀을 전하고 ‘예수 믿을 사람 손 드세요.’ 그러면 많이 들지 않았어요. 전부 다 들더라고요. 앞으로 나오세요. 그러면 많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부 다 나와요. 수백 명씩 전부 다 나와요. 참 신기해요. 어떻게 전부 다 나오냐? 그렇죠? 어떻게 전부 다 나와요?
왜 나오는가 제가 생각해 봤어요. 혹시, 뭐래도 하나 받을까 생각해서 나오는가? 뭐, 구경거리가 없는 사회니까 구경거리가 있으니까 다 이렇게 구경하고 신기해서 나오라니까 나오는 건가? 분위기상 다 나오니까 나도 나오는가? 왠지 모르게 나오는가? 생각을 해 봤어요. 도무지 왜 다 나오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기도 따라 하라면 다 따라 해요. ‘아멘’ 하라 하면 다 ‘아멘’해요. 앉으라면 앉고 일어서라면 일어서요. 참 너무너무 신기해요.

도대체 이게 무슨 역사일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저 사람의 심리적인 역사인가? 반대로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가 이 곳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시다. 수많은 사람이 오지 않을뿐더러 왔다고 해서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 손 드십시오.’‘나오십시오. 따라서 하십시오.’ 한다고 그 사람 다하겠습니까? 그 사람은 뭐 받을 것도 없으니까 나는 그러지 않을 거야. 난 나 혼자 살아도 충분해. 나는 예수 안 믿어도 충분히 살 수 있어. 그들과 상반된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저는 그 가운데서 그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뭘 받을지 몰라서 기대한다거나 구경거리가 있거나 아니면 분위기상 그런거나 뭔가 잘 모르고 남이 하니까 따라서 하거나, 우리 뭔가 몰라서 남들이 하면 따라서 하나요? 안 따라서 하잖아요?

우리도 다 생각이 있고 내 판단기준이 있고 내 마음 속의 유무를 따질 수 있는데 모두가 따라서 하나요? 결국 그들의 배우지 못함, 그들의 가난함, 그들의 문명혜택을 받지 못함이 결국 하나님이 말씀에 순수해져 따르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에 정말 어떤 것이 축복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봤습니다. 어떤 경로를 거쳐서든지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영혼들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께 오늘 이 말씀을 드리고 마치고자 합니다. 우리는 순수하게 살아야 돼요. 우리 마음에 있는 모든 죄와 오욕의 찌끼들, 내 마음의 욕심과 우리가 살아오면서 느끼는 세상의 모든 찌끼들을 다 씻어내고 하나님 앞에 순수한 영혼을 가져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순수한 영혼을 가져야 돼요.
믿어라 하면 믿고 따라하면 따라하고 순종하라면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지시한 바를 순수하게 따를 수 있는 이런 순수한 믿음, 깨끗한 심령, 정말 오욕으로 물들지 않는 정직한 심령을 가지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마음일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바라기는 여기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수 있는 순수하고 깨끗한 심령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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