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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냄 받은 사람의 확신 (요 7: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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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기 목사 (진주제일교회)

인도에 아주 겸손한 왕이 있었습니다. 이 왕은 누구에게나 먼저 머리를 숙여 인사했습니다. 신하들은 속으로 비웃으며 왕을 위해서라는 구실로 왕에게 말했습니다.
“사람의 몸 가운데서 가장 귀한 것은 머리입니다. 더구나 왕께서는 나라에서 으뜸가는 귀하신 몸의 머리인데 함부로 숙이시니 이는 인사가 아니라 도리어 실례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며칠이 지났다. 왕은 신하에게 머리만 있는 말 해골과 고양이 해골 그리고 사람의 해골을 주면서 명령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팔아 오너라.”
왕의 명령을 받은 신하는 세 개의 해골을 들고 나섰습니다. 여러 곳을 발이 닳도록 다녀도 팔지 못했는데, 해 저물 무렵에 어떤 집에서 고양이 해골을 사두면 쥐가 없어진다고 사갔습니다. 또 얼마를 가니 어떤 집에서 말 해골을 문에 달아두면 한 해 동안 그 집에 병마가 들지 않는다면서 사갔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해골은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심히 불쾌하다는 표정들이었습니다. 신하는 하는 수 없이 사람의 해골을 들고 왕 앞에 나와 아뢰었습니다.
“사람의 해골은 팔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해골을 팔려는 저를 오히려 사람들은 비웃기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습니다.
“사람들의 머리가 귀하다 함은, 선한 일을 하거나 예의가 바르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다면 고양이나 말대가리 보다 못하다는 뜻이니라. 죽어지면 보잘 것 없이 썩어질 것을…….”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가장 민감한 율법을 가지고 말씀 하셨습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 가운데 그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좋아할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 거기에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유대인 모두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에게는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가 오시면 그들은 세계 으뜸 백성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죽이려 했고, 결국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 준 장본인들이 되었습니다.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자가 아니냐?”(25절)고 하신 “저희가”는 26절 보면 “당국자들이 이 사람을 그리스도인줄 아는가?” (표준새번역) “지도자들은 정말로 이 사람을 그리스도로 알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기에 “저희”는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백성을 바른길로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백성들을 선동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무리들의 길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리들을 자기의 목적에 이용했습니다.
유대의 지도자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정작 메시야 오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외침도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그런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아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지 않는다면, 그들 말처럼 예수님을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떻게 하든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위치, 자기들의 기득권을 내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교인간의 불화 중 가장 큰 이유는 기득권 싸움입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 부흥시킬 거냐? 가 아닙니다. 목회자는 “내가 이 교회 담임자인데.” “내가 하나님께서 보낸 종인데” 교인들은 “내가 이 교회의 주인인데” “내가 뭔가 해야 하는데” “그래서 목회자는 내 말에 따라야 하는데” 그래서 부딪치는 겁니다.
진정한 교회는 누가 기득권을 가졌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같은 생각,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똑같이 희생하고 헌신합니다.
결국 기득권 싸움은 상대를 죽여야 끝이 납니다. 그리고 상대를 죽이기 위해 세력을 모으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 사두개인, 바리새인, 헤롯당 등은 평상시에는 적대 관계였는데 예수 죽이는 일에는 똘똘 뭉쳐진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일부 무리들을 선동합니다.

2) 예수님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32절).

이들은 분명한 자기의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이렇다”하면 이런가 보다 하고, 누가 “저렇다”하면 저런가 보다 하는 사람들입니다. 소위 군중들, 이들은 자기의식 없이 이리저리 몰려다닙니다.
연예인을 좋아하는 팬들, 대부분은 왜 좋아하는지가 없습니다. 맹목적입니다. 정말 좋아하면 왜 좋아하는지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어야 하고, 내가 누구를 정말 좋아 한다면, 다른 연예인도 존중하는 것이 정말 팬인 것입니다. 그런데 군중심리는 무작정 좋아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 누구도 원수 같이 대합니다. 혼자 있을 때는 말도 못하면서 여럿이 할께 있으면 소리가 높아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동지를 규합합니다. 소위 패거리를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할 때, 겉옷을 길에 깔아 그 위에 나귀를 탄 예수님 지나가시게 하면서, 그 사람들은 종려나무를 꺾어들고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고 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빌라도의 재판을 받으실 때는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외쳤던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 두 바구니 남겼을 때, 먼 길 마다 않고 예수님을 따라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하다가, 예수님 자신이 곧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하시자 무슨 소리인지 어렵다며 떠나간 사람들입니다.
무리들은 뭐가 진리인가 무엇이 진짜인가에는 관심이 없다. 이 사람들은 수군거림에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이다 ”하셨을 때도 이들은 수군거렸고(요 6:41),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로 수군거렸다고 요한복음 6장 60-61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들은 다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아침이나 저녁에 방송하는 많은 부분의 토크쇼들은 죄다 수군거림입니다. “탤런트 누가 뭐 어쨌더라” “누가 누구를 좋아 한다더라” “가수 누가 뭐 어쨌더라” 등 입니다. 월간지 대부분도 이런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은 항상 수군거리고, 수군거림에서 나온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안다.”
그런데 그들이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아는 것은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6:42) 하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 났고, 나사렛에서 자랐고, 목수의 아들이고……. 이 모든 것들도 다 수군거림에서 얻은 것들입니다.
본문(25-31절)에서 무리들이 하는 물음을 보십시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바로 이 사람이 아닙니까?”(25절) “지도자들은 정말로 이 사람을 그리스도로 알고 있는 것입니까?”(26절) “그리스도가 오실지라도 이 분이 하신 것보다 더 많은 표적을 행하시겠는가?”(31절)
이 모든 질문을 보면 자기 말이 아닙니다. 남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바로 이 사람이 아닙니까?” 여기에는 질문하는 본인이 없습니다. “그들”과 “예수” 둘 뿐입니다.
“지도자들은 정말로 이 사람이 그리스도로 알고 있는 것입니까?” 여기에도 본인은 없습니다. “지도자”와 예수 둘 뿐입니다.
“그리스도께 오실지라도 이분이 하신 것보다 더 많은 표적을 행하시겠는가?” 여기에도 본인은 없습니다. 이분 곧 “예수”와 “표적”만 있습니다.
그래서 32절은 “무리가 예수를 두고 이런 말로 수군거리는 것을 바리새파 사람들이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무리들이 무엇을 했다? 수군거렸다는 겁니다.
자기의식 없이 남의 이야기 하는 것 그것이 수군거림입니다. “아 그런데 글쎄 김 아무게 집사가 이랬다는 거야” 이게 수군거림입니다.
제대로 된 물음은 “나는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도 예수님을 그리스도인줄 아는가?” “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가?” “예수님의 표적은 무엇인가? 그 표적을 통해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누구냐?” “예수님은 정말 나의 구세주다.” 이런 물음과 이런 확신이 있는 사람은 수군거리지 않습니다. 묵묵하게 주님 위해 일하며 살 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 결국 예수님을 떠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 그저 “누가 그러더라” “어느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 이런 정도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을 떠납니다. 대부분 이단에 빠지는 사람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확신 없이 수군거리는 사람들 이들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유대의 지도자들, 그리고 지도자들의 선동에 우우 몰려다니며 수군거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대적했고, 예수님을 죽이려 했고, 결국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자기를 대적하며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면서도 예수님은 그들 앞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대적 자들을 피해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를 두루 다니셨다. 유대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대지방에서는 다니려 하지 않으셨다.”(7:1)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 땅에 오셨습니다. 유대인들 중에 유대인임을 자부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숨어서가 아니라 드러나게 말씀하셨습니다.

1) 예수님의 말씀은 구원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막 1:38) 그리고선 예수님은 갈릴리와 여러 회당을 두루 찾아가셔서 말씀을 전하고 귀신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냥 들려지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신 분입니다. 그 말씀은 태초부터 있었고, 모든 것들을 있게 하신 말씀입니다. “빛이 있어라” 말씀하셨고 그렇게 빛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둠에 빛이 있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병자를 고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앉은뱅이 일어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맹인의 눈이 떠지게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중풍병자를 일으키게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죽은 자를 살리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입 다물고 계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드러내 놓고 말씀하심으로 여러분과 저도 구원 받은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예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뒤에서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지만, 무리들은 뒤에서 이렇쿵 저렇쿵 수군거리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이 구원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아마도 예수님께서 잡혀 돌아가셨을 때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고 와서도 수군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임재 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이심을 확신하게 되자 사람들 앞에 드러내 놓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온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선포했습니다.
그들 역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면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생명을 살리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때문에 드러내 놓고 담대하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으나 아무도 그에게 손을 대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30절)
“그의” 즉 “예수님의 때”란?
예수님은 “나는 잠시 동안 너희와 함께 있다가 나를 보내신 분께로 간다.”(33절)고 하셨습니다. 그 때가 언제냐 하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진 때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때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때입니다.
그 때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의 관원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그런 때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잡으려 하느냐? 조금만 기다려라. 지금은 아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물질은 잘 바칩니다.(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데 시간을 드리는 것은 인색합니다.

물질은 하나님의 것으로 고백되기 때문입니다. 물질은 내가 노력한다고 가져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됩니다. 그래서 물질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신앙고백이 생기게 되고, 물질을 하나님께 드림은 당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은 아닙니다. 시간은 가만히 있어도 주어집니다. 오히려 나이 먹고 보니 주어지는 시간이 별로입니다. 째깍거릴 때마다 늙어가니까. 또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 같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루가 25, 26, 30시간 되는 것 아닙니다. 예수 믿으나 안 믿으나 일년은 365일입니다.
그런데 그렇습니까? 다 똑 같아요?

어떤 아이가 똑 같은 시간을 시험공부 했습니다.  그렇다고 결과가 똑같습니까? 어떤 사업가가 똑같이 수고했습니다. 그런다고 결과도 똑같습니까? 똑같이 60년, 70년 살았다고 그 결과가 똑같습니까? 어떤 사람은 보람 있는 삶이기에 기뻐하고 감사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별 볼일 없는 삶이기에 후회하는 것 아닙니까?
똑같이 한 평생 살았다고 결과도 똑 같습니까? 예수 믿다 죽은 사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예수 안 믿다 죽은 사람 영원한 멸망에 이르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물질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시간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으십시오. 그래서 물질을 주님 위해 쓰듯이 시간도 주님위해 쓰십시오. 여러분의 때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보세요. 참새 한 마리가 천원에 팔린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왜 물질 때문에 걱정합니까? 왜 시간이 주어지고 또 시간 가는 것이 불안합니까? 왜 사람들 앞에서고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이 두렵습니까?
예수님께서 갖고 계신 의식이 없어서입니다.
“나는 그 분을 안다. 나는 그 분에게서 왔고. 그 분은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9절) 이 예수님의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보냄을 받으신 분입니다. 누구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에 대한 모든 결정권은 누구에게 있어요? 당연히 하나님께 있습니다. 겟세마네기도 예수님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십시오.” 결정권은 하나님께 있으니까요. 예수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신 것도 그 결정은 하나님께 하시니까, 죽음의 때도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죽은 뒤에는 보냄 받은 곳, 즉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뭐가 두렵습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이 의식이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다는 사람도 이 의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주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8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기도 내용이 “아버지께서 내게 하셨듯이 그들에게도 지켜주시고, 영광주시고, 기쁨주시고”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결정권은 누구에게 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 분에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두려워하는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가 올 수도 없을 것이다”(34절)
그런데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힘으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내께서 내 목숨을 빼앗아가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원해서 목숨을 버린다.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명령이다.”(요 10:18)고 하셨습니다.
그런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약속 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들이 주님 계시는 곳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결국 예수께서 보냄을 받으신 곳, 예수께서 말씀하신 “나 있는 곳“으로 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여기서 “나도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확신과 의식 속에 살아갈 때 가능합니다.
오늘 잎사귀가 다 말라 비틀어져 있으면서 내일의 열매를 기다린다는 것은 마치 감나무 아래서 입 벌리고 서 있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입니다. 성공하면 잘 섬기겠다는 것 역시 어리석은 것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 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자리가 주님을 만날 자리입니다. 지금 이 자리가 은혜 받는 자리입니다. 지금 이 자리를 잃어버리면 “나 있는 곳에 오지 못하리라”(34절)는 말씀처럼 주님께 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때를 주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악의 권세가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뜻이 이루어지자 보냄 받은 곳으로 예수님을 돌아가셨습니다.
그 예수께서 또한 여러분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책임지심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을 통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이 땅에서 보호하시고 능력 주심을 믿으십시오. 세상 그 누구도 여러분을 대적할 수 없음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날 여러분 역시 예수님계신 곳으로 가게 됩니다.
이 주님으로부터 보냄 받았다는 확신이 여러분의 삶과 신앙에 능력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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