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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을 들어 산을 보라 (시 1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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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임대식 목사 (평강교회)

본격적인 여름입니다. 무더위가 우리 심신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많은 이들이 바다로 산으로 피서를 떠납니다. 금년은 경제 불황의 영향으로 예년보다 위축된 여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만 더위를 피하려는 휴가는 때론 삶의 지혜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 학교에서도 여름 방학을 이용해 부서마다 여름 성경학교와 수련회를 갖습니다. 중등부 고등부는 여름 행사를 마쳤고, 청년부와 초등학생들은 이제 좋은 일정을 진행하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이 모든 일정을 통해 모든 학생들이 영적 충만과 새로운 깨달음과 마음의 신선함을 새로 채우는 귀한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수고하시는 교사 선생님들, 뒤에서 말없이 기도하시고 지도해 주신 성도님들, 봉사해 주시는 여전도회 회원들 등등 여러 교우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 시편 시인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이 시편 시인은 지금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이 서 있는 시온산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그는 성전을 향해 가면서도 마음은 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하고, 눈도 더 높은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를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로 표현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분 계신 곳을 바라보고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눈을 들어 앞에 펼쳐진 산을 보아도 그것이 예사로이 보이지 않습니다. 단순히 자연으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솜씨로 보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보이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손길로 보여 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주만물의 창조자요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찾으며 사는 사람은 자연과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법입니다. 인생이 행복할 수 있는 조건 중의 하나가 미적 감각이요, 미적 감정입니다. 사물을 아름답게 볼 수 있고, 아름답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 믿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성 프란시스는 이런 행복 속에서 산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체험한 후로, 그의 눈에 보이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솜씨도, 아름다움의 극치요,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지저귀는 새소리, 흐르는 물소리는 신비한 음악이요, 속삭이는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럴수록 그의 마음과 눈길은 주님을 향했고, 주님 계신 곳을 바라  보았습니다.

시편 시인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한 것도, 산을 보면서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을 생각하고자 함입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과, 그 믿음을 통한 아름다운 미적 감각을 가지고 눈을 들어 산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 그러면 어떤 일이 있을 것인가?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옴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은 도움이 거기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도우심은 어떤 도우심입니까?

첫째로 이 도움은 우리를 실족지 않게 지키시는 도움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시리로다”하였습니다.

실족지 않게 하신다는 말씀은 발을 헛딛는 일이 없도록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자의 길은 험하였습니다. 한 번 헛디디면 발목이 부러질 수도 있고, 벼랑이나 빈 우물에 헛디뎌 떨어지거나 빠지면 생명이 위험했습니다.

실제로 이런 실족 사고가 많기 때문에 예수님도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둘 다 헛디뎌 구덩이에 빠지는 이야기를 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우리는 가끔 헛딛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또 우리의 마음속에도 함정 천지입니다. 발 디딜 장소가 없을 만큼 함정이 많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발걸음이라도 헛디딜 가능성은 많습니다. 이런 실족 사고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실 능력은 나의 수양이나 교양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밖에 없음을 시편 시인은 고백합니다.

둘째로 이 도움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지키시는 일입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와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특히 사막은 낮과 밤의 일교차가 너무 심하여 낮에는 태양열로 인한 어려움이 있고, 밤에는 또 너무 추워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 길을 40년 간 헤맬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사람은 육신이 있으므로 휴식 없이 어떤 일을 계속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그 백성을 지키심에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우리를 실족지 않게 지켜 주십니다.

일찍이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체험한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24시간을 근무하셔서 당신의 백성에게 광막한 광야에서도 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셋째로 이 도움은 출입을 영원히 지키시는 일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란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하십니다. 예수님도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시리라하셨으니 우리를 영원히 지켜주심입니다.

여기 출입이라는 말은 우리 인간 생활의 전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생활은 아침에 집을 나서서 여러 가지 일을 보고, 저녁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이 아닙니까?

학생은 학교로, 농부는 밭으로, 장사하는 분은 일터로, 사무원은 사무실로, 기사는 공장으로 나가서 일하는 모든 것, 우리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돌아오는 것도 지켜주십니다. 저녁이 되면 우리는 다 집으로 돌아옵니다.  가정에 와서 생활하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지켜주십니다. 밤에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셔서 평안히 쉴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전부를 지켜주심을 이 시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출입이란 시작과 완성을 가리킵니다. 그 모든 우리의 삶의 과정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출입을 영원히 지켜 주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되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사실 우리 인생은 남의 도움이 없이는 살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늘까지 부모님의 도움을 입고 살아왔습니다. 이웃의 도움도 꼭 필요합니다. 사회의 도움, 국가의 도움을 받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생은 실상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오늘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근본을 많은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 부모님께는 감사하고 이웃과 사회에는 감사하면서 하나님께는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그 이유는 위를 보지 않기 때문이요, 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만을 바라보니까 생각이 거기에만 멈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보고, 마음을 열어 위를 향하고, 귀를 열어 위의 소리를 들을 때, 우리 인생의 참된 도움이 어디서 오는지 알게 됩니다. 진정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자 하면 눈을 들어 그 분 계신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 바라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심도 알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나를 이 세상에서 지켜주겠습니까? 누가 내 곁에 늘 있어서 나를 지켜주겠습니까? 모든 환란에서 나를 지켜주고, 내 영혼도 지켜주며, 내 출입도 지켜줄 이가 누구이겠습니까?

우리 하나님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주님을 버려도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내가 주님을 버리고 멀리 가도 주님은 내 곁에 계시면서 나의 보호자가 되십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볼 때 이와 같은 주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눈을 들어보지 않고 아래만 보면서 도움이 없다고 합니다. 지켜주는 분이 안 계시다고 합니다.

물을 옆에 두고도 목이 말라 헤매는 것은 자신의 어리석음이요 ,내 자신의 잘못입니다. 음식이 옆에 있는데도 배고파 허기에 허덕이는 것도 내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나를 덮어주고 감싸 주려고 해도 뛰쳐나가면서, 도움이 없다고 하는 것은 바로 내 어리석음이요 잘못입니다.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의 지켜주심을 깨닫게 되는데, 그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죽을 일, 안될 일, 두려운 일만 쌓여있는 세상만 바라보고 아우성치는 것은 나의 어리석음이요, 불신앙입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볼 때, 나를 도우시고 나를 지키시는 주님이 나에게 향해 다가오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날개 안으로 우리는 들어가야 합니다. 그 넓은 사랑의 품에 안겨야 합니다. 거기보다 안전한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거기보다 평안하고 즐거운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시편에는 121편에는 지키신다는 말씀이 6번이나 되풀이 되어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지켜 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밤낮으로 고통을 당하는가? 왜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 우리에게 여러 문제와 고민과 갈등이 있는가?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우리 하나님은 우선 우리의 영혼을 보시는데, 사람은 우선 육신을 본다는 차이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심지어 잘 믿는 사람까지도 잘 믿는 표준을 육신적인데 두기 쉽습니다. 세상에서 돈 많고, 잘 되면 그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부유해서 하나님을 더 잘 믿을 수 있게 되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부유해서 신앙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가난해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면 가난도 축복입니다. 가난해서 하나님을 떠나면 그것은 심판입니다.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붙들고 더 귀한 믿음에 이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증거요, 하나님의 지켜 주시는 은혜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분이라 일컬음을 받는, 앞서 말씀드린 성 프랜시스의 경우를 보면, 그가 육신의 중병으로 사경을 헤매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파스칼이란 분은 말을 타고 가다가 다리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은 것이 계기가 되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밀턴이란 분은 나이 40에 실명하여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육신의 시력을 거두어 가시고 영혼의 눈을 밝게 뜨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면서 오히려 정신을 집중해 실락원이란 불후의 명작을 남겼습니다.

존 번연은 그가 감옥에 들어가 오랜 세월 자유를 잃고 지내는 가운데 천로역정이라는 유명한 책을 감옥 안에서 썼습니다. 꼭 고난이 문제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키시는 자는 고난과 문제도 선용해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는 계기로 삼아 나갑니다.

과수원을 경영하시는 어느 분이 이런 얘기를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과수원을 처음 할 때는 경험이 없어서, 사과나무에 꽃이 피고 많은 열매가 달리는데, 너무 소담하고 보기도 좋고 해서 그대로 두었더니, 나무는 나무대로 상하고 열매는 상품가치가 없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해에는 아무리 아까워도, 손해가 나는 것 같아도 실한 과실을 얻기 위해서 많은 작은 열매를 미리 따 버려 탐스런 사과를 거두어 수익성 좋은 농사를 짓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과일나무를 손질하는 것이 나무의 아픔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과일을 잘 생산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신다는 것은 늘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결과가 선한 결과를 이루도록 역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지켜주시는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주님을 닮아갑니다. 어느 구두 닦기 소년은 구두를 닦을 신발을 찾기 위해 하루 종일 지나가는 신발만 쳐다보았습니다. 이 소년은 그렇게 함으로 생계는 유지할 수 있었으나 그 이상의 것을 쳐다볼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그 소년은 구두닦이로 그 일생을 마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한 소년은 길을 가다가 1만 원 짜리 지폐를 한 장 주운 것이 계기가 되어서, 평생 땅만 쳐다보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얻은 것은 동전 몇 개와 단추, 바늘 같은 고물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바라보고 사느냐에 따라 그 일생이 결정됩니다. 땅을 쳐다보고 사는 사람은 땅의 것으로 살다가 땅으로 돌아가서 끝나고 맙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자는 하늘의 것으로 살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입니다.

땅을, 이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저속해 지고 천해 집니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의 것을 찾는 자는 새 힘이 넘치고 독수리처럼 힘차게 날아오를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면 예수를 닮게 됩니다. 예수의 생명이 내 생명이 됩니다. 예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됩니다. 예수의 능력이 내 능력이 됩니다.

바라기는 우리 성도님들, 눈을 들어 우리를 도우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삶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찾음으로 예수님을 닮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은혜와 영광이 바로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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