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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호 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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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주환 목사 (구로중앙교회)

결혼하고 집사람이 아이를 임신하였다. 어떻게 생긴 아기가 나올까 무척이나 궁금하였다. 둘이 거울을 마주 바라보면서 예상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눈은 아빠를 닮으면 좋겠고, 코는 엄마를 닮으면 좋겠고, 입은 엄마든 아빠든 누구를 닮아도 좋겠다. 이렇게 그림을 그려 놓고서 첫 아이가 태어나기를 기다렸다. 미국에서 유학 도중에 낳았기에 분만실에 같이 들어갈 수가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대충 씻긴 후에 나에게 안겨 주는데 얼굴을 보니까 예상도하고 반대로 태어났다. 그래도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코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그 코가 바로 나를 닮았기 때문이다. 원래 예상도에 의하면 코는 엄마 닮고 눈은 아빠 닮았으면 했는데 눈은 엄마 닮은 것 같고, 분명하게 코는 아빠를 닮았기 때문이다. 어쩧든 예상도하고 빗나가기는 했지만 딸의 코가 나를 닮아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딸이 사춘기를 지나면서 “아이고 내 코야”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엄마를 닮으면 더 예쁜데 엄마를 닮은 코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럴 때마다 두 가지 생각이 든다. 하나는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나를 닮은 코가 나와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는 생각이 더 크다.

자식을 낳으면 닮은 모습을 볼 때에 부모의 큰 기쁨이 된다. 우리 교회에 부목사님들의 자녀들을 보면 수 백명 사이에서 아빠 찾으라고 퀴즈를 내 주면 분명히 찾을 것이다. 어느 목사님 딸은 아버지를 너무 닮아서 아버지 목사님에게 가발을 씌워 놓은 모습과 같다고 이야기를 한다.

내가 요즈음에 다른 교회에 가서 설교하고 나면 두 가지를 묻는다. 하나는 어쩌면 감독님하고 점점 비슷해져 가느냐? 하고 묻고 두 번째 질문은 아버님 요즈음에 어떻게 지내시는가? 하고 묻는다.
나는 이러한 질문을 들을 때에 닮은꼴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된다. 닮은 자식을 바라보면서 아버지를 생각한다. 닮은 자식을 보면서 아버지를 기억한다. 왜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아담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 데로 창조하셨을까? 왜 아담과 하와 속에 하나님의 닮은꼴을 남겨 두셨을까? 그것은 바로 아담과 하와를 바라봄으로 인해서 온 세상이 하나님 살아 계신 것을 생각나게 하기 위함이다. 왜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칭하셨는가? 하나님의 닮은꼴이 된 하나님의 자녀를 통해서 온 세상에 주님을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온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습을 이 세상에 나타내 보이려면 하나님의 방식 데로 길이 들여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는 모습으로 길이 들여져야 한다. 하나님의 닮은꼴이 담겨져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선악과에 독이 있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 닮은 사람으로 길들여지기 위함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길들여지지 않았다. 노아 시대에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닮은꼴이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여 저항한다. 결국에는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셨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생각나게 하려고 하셨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길들이기 시작하셨다.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날 때에 40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을 지나게 하셨다. 이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살아 계신 것을 온 세상에 전하게 하기 위해서 길을 들이신 것이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를 먹이시고, 반석에서 샘이 솟게 하시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하셨다. 안식일을 지키게 하시고, 절기를 지키게 하셔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온 세상에 전하게 하려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을 볼 때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나타내려고 하셨다.

이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셔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생각나게 하셨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길들이셨지만 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에게 사랑을 쏟으시고 그들을 길들이셔서 온 세상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드러내려고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온 세상에 나타내기는커녕 오히려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 분향하였다.

결국에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온 세상에 알리고 싶으셨다. 빌립이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온 세상에 확실하게 드러내 보이셨다.

그 후에 예수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왜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자녀를 두셨는가?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자녀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고 계심을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를 택하셨다. 자녀를 볼 때에 그 부모가 생각나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녀들을 택하셔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이 세상을 구원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 세상에 전하려 하신다.
여기에 바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이유가 담겨져 있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지금도 일하고 계심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세우셨으니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이같은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어찌 내가 너희를 놓아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를 어찌 버리겠는가?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향한 마음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자녀를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드러내야 하니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가? 부모가 자식을 버릴 찌라도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신다. 친구가 나를 버릴 찌라도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신다. 직장에서 나를 버릴 찌라도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신다. 이웃이 나를 버릴 찌라도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신다.

우리가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몸이 아프면 그 질병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어찌하여 너를 버리겠느냐?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실패하고 넘어지는 상황에서도 주님은 우리를 일어서게 하신다. 다시 시작하게 하신다. 다시 세워주신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서 일하고 계심을 온 세상에 알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건물을 짓다가 보면 남은 조각이 생긴다. 건축자는 남은 조각을 쓸모없어서 버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남은 조각, 버림 받은 조각을 건물의 머릿돌로 삼으신다고 말씀하셨다. 건축자의 눈에 버림 받았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꼭 필요한 것으로 택하셔서 귀중하게 사용하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 같지만 예수님은 나같은 사람을 택하셔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살아서 일하고 계심을 세상에 알리기를 원하신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신다.
내가 지금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 말라. 때로는 그 고통이 나를 붙잡아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일 수도 있다. 한 목자가 있었다. 양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선한 목자이었기에 동네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 한 마리의 사랑하는 양이 있었는데 그 양은 너무 말을 안들었다. 울타리 밖으로 나가면 바로 늑대의 밥이 되고 마는데... 그 양은 천방지축으로 돌아다녔다. 하루는 목자가 그 양의 다리를 꺾고는 양을 안고 풀을 먹이고 있었다. 이것을 본 동네사람이 말했죠.....왜 당신은 양을 그토록 사랑하면서 양의 다리를 꺾은 것이오? 목자가 말하기를, “이 양은 내가 너무 사랑하는 양입니다. 하지만.......이양이 울타리 밖으로 나가 늑대에게 죽게 될까봐..... 이렇게 해서라도 보호하고 싶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고통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버리지 않고 보호하신다.

태극기 휘날리며 영화를 보면 처음부터 마지막 까지 전쟁 중에 일어나는 총싸움이다. 총으로 인하여, 포탄으로 인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그런데 거기에 나온 주인공 두 형제는 마지막 까지 살아남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 이유는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 살아 일하고 계심을 온 세상에 전하는 주인공으로 삼으셨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책임이 있다. 하나님 닮은 모습으로 우리가 길들여져야 한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 이 말씀은 하나님 닮은 모습으로 길들이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광야 40년을 지나게 하심도 역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 닮은 모습으로 길들이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왜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고, 주일을 지키며 예배하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 닮은 모습으로 길들이기 위함이다. 그렇게 길들여져야만 나로 하여금 하나님이 살아 일하고 계심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고 우리는 아무렇게나 편안하게 살 수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떠나지 않으신다고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 수 없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주님 닮은 모습으로 우리가 길들여져야 한다. 그래야 나로 하여금 하나님이 이 세상에 지금도 살아계시고 일하고 계심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소녀가 불의의 사고로 눈을 다쳐 맹인이 되었다. 한없이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던 소녀가 어느 날 점자 성경을 읽는 중에 나사로에 관한 말씀을 읽는다. 예수님이 무덤 문을 열고 “나사로야 나오너라.” 죽은 자도 불러내셨다. 그때부터 마음에 소망이 끌어 오르기 시작한다. 죽은 자도 불러내어 살려 주시는데. 나같은 사람도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이 사람은 많은 찬송시를 써서 하나님이 살아서 일하고 계심을 드러낸 크로스비 여사이다.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주님은 버리지 아니하신다. 주님 닮은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 일하고 계심을 나타내기를 원하시는데 왜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겠는가?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버림 받지 않는다는 믿음의 확신을 갖기 바란다. 그리고 나의 모습이 주님 닮은 모습으로 계속해서 길들여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이 살아 일하고 계심을 세상에 드러내는 축복된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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