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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선한 목자이다 (시 139:1~4, 요 10: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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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성희 목사 (연동교회)
 
  목자는 성경에서 가장 친숙한 직업입니다. 특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주 직종이 목축이므로 직업이 목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족장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모세와 다윗도 목자이었습니다. 목축은 구약과 신약, 성경시대를 통틀어 흔한 직종이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하나님이 모세를 선택하셔서 애굽의 백성들을 해방하게 하신 것은 모세가 장인의 양떼를 잘 보살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장인의 양떼를 잘 보살피는 모세를 보시고 하나님은 “이 사람 같으면 내 양인 이스라엘 백성을 잘 살피겠다”고 하셨답니다. 그리고 모세를 이스라엘의 목자로 세우셨다고 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목자를 그리스도의 전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이 목자이시라고 합니다. 목자로 오신 예수님을 처음 목격한 사람도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양을 치는 목자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나는...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네 번째 말씀은 “나는 선한 목자이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목자이십니다. 성경은 야곱 이래로 하나님을 목자라고 합니다. 구약의 신정시대에는 왕을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후기에는 메시야에게 목자라는 칭호를 적용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5:4-7에는 그리스도를 길 잃은 양을 찾는 목자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목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나는 ‘착한’ 목자이다”라고 하십니다.
  “선한 목자”는 헬라어로 “호 포이멘, 호 칼로스”입니다. 이 말은 “그 목자, 그 선한 자”라는 뜻입니다. 요즘 어느 자동차의 이름이 ‘칼로스’이던데 아마 좋다는 뜻으로 이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겠습니다. 헬라어의 좋다는 말은 ‘칼로스’(kalos)와 ‘아가토스’(agathos)라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이 두 단어가 똑같이 좋다는 말이지만 그 의미는 다릅니다. ‘칼로스’는 외형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아름다운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아가토스’란 말은 내적미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선한 목자인 것은 외형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착한’ 목자라는 뜻입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오실 그리스도가 외형적 아름다움은 없다고 합니다. 이사야 53:2에는 오실 메시야를 “고운 모양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은 외형적으로도 아름다운 목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왜 목자이며, 왜 선한 목자입니까? 선한 목자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선한 목자는 삯꾼과 다르다는 뜻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을 지킵니다. 참 목자의 직분을 시편 23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을 잘 먹이고, 좋은 곳으로 인도하며, 온 몸으로 보호합니다. 선한 목자는 먹이려고 애쓰고, 바르게 인도하며, 해를 받지 않게 보호하려고 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십니다. 양을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여 목마르지 않게 합니다. 양을 의의 길로 인도하여 위험을 당치 않게 합니다. 양을 지팡이와 막대기가 안위하여 철저하게 보호합니다.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의 모습을 보세요. 양을 친밀한 개인적 관계로 아는 목자입니다. 양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냅니다. 꼴을 먹여 살지게 하는 목자입니다. 양에게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게 합니다. 양을 보호하는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알고 이리가 얼마나 영악한가를 압니다. 그리고 선한 목자는 다른 양에게도 관심을 가집니다. 16절에는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라고 합니다. 선한 목자는 내 양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양이 아닌 양도 똑같은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친밀해지고 싶으면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친밀해지는 방법은 멍에를 매고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함께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함께 하는 삶이 꼴을 찾아 먹입니다. 온 몸으로 양을 보호합니다. 목자의 살이 찢기고 목자의 피가 다 흐르도록 양을 보호합니다.
  요즘에도 호주나 뉴질랜드 그리고 영국 웨일즈 등에 가면 양을 먹이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양을 먹이는 모습을 보면 한가롭고 양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 목가적입니다. 그러나 목자에게는 한가롭고 낭만적인 놀이가 아닙니다. 목자들은 양이 길을 잃지 않게 몰고 다녀야 합니다. 양의 시력은 퇴화하여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길을 잃기 쉽기 때문에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양은 아무런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공격용 무기도 방어용 무기도 없는 동물이 양입니다. 그러므로 온 몸으로 양을 지켜야 합니다. 밤이면 골짜기에서 비와 바람을 막아줄 굴을 찾아 양과 함께 지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도 나와 있듯이 목자가 한번 집을 떠나면 여러 날, 여러 달 동안 빵과 무화과와 꿀과 치즈 등을 준비하여 양과 함께 생활합니다. 뜨거운 햇볕을 가리기 위하여 낙타털로 만든 가리개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모든 일이 양을 위한 선한 목자의 자세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한 자기 희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삯군은 목자가 아닙니다. 삯군은 위험한 일을 만나면 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양의 안위나 평안, 배부름 등은 애초에 관심이 없습니다. 양이 먹든 말든, 양이 자든 말든, 양이 목마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평안만 생각하는 것이 삯군입니다.
  선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세요? 가장 큰 차이는 관심의 차이입니다. 목자는 양의 평안이 가장 큰 관심입니다. 그러나 삯꾼은 자기가 받을 삯이 가장 큰 관심입니다. 잃은 양의 비유를 보면 목자는 99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으려 갑니다. 이런 목자의 사고는 실용주의적인 사고는 아닙니다. 99마리가 더 많고 중요합니다. 삯군은 물량으로 따집니다. 이름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숫자를 헤아리며 수만 헤아립니다. 선한 목자는 한 마리에 관심을 가집니다. 양의 존재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삯군은 숫자에 관심을 가집니다. 양의 존재보다 양을 물질로 생각하고 물질에 관심을 가집니다. 삯군은 문자 그대로 삯만 바라보고 삯만 따라가는 “꾼”입니다.
  삯이란 수고의 대가입니다. 수고하지 않은 대가가 있다면 이것은 은총이 아니라 벌입니다. 대가란 수고의 결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가를 보고 일을 시작하는 것은 시장의 논리이지 목장의 논리는 아닙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바로 그런 점이 드러납니다. 먼저 온 자들의 관심은 품삯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온 자의 관심은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였습니다. 품삯에만 관심을 가지다 보면 항상 자신의 것이 작아 보이고 불평은 늘어납니다. 내가 한 일에 대한 대가는 적어보이고, 남에게 지불하는 대가는 커 보입니다.
  이런 목장의 논리는 교회의 목회에도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사회 생업에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떤 일이든 숫자에만 관심이 있고, 물질에만 관심이 있고, 대가에만 관심이 있다면 우리는 이미 선한 목자의 자세는 아닙니다. 사람에게 관심이 있고, 대상에 관심이 있고, 일 그 자체에 즐거움이 있다면 어떤 일을 하든 우리는 선한 목자의 자세입니다. 이런 사람은 선한 일꾼입니다.

둘째,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합니다. 반면에 삯군은 양의 목숨을 빼앗습니다. ‘버리다’라는 말의 헬라어 ‘티데미’는 고전어에서는 세금을 내다시피 지불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생명을 버려 인류의 죄의 값을 지불하신 속죄의 죽음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목자는 흔한 직업이었지만 고대에 가장 천한 직업이었습니다. 곡식을 재배하는 농부가 고상한 직업이었습니다. 아담의 아들들인 가인과 아벨을 보면 이 사실이 나타납니다. 아벨은 목자였습니다. 그는 양을 치는 자였고 양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곡식을 재배하는 농부였습니다. 그는 추수한 곡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이 사실에 화가 난 가인은 자신의 동생인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제사 때문에 동생에게 화풀이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묻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 때 가인은 하나님께 아주 반항적인 대답을 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 말을 어느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목자란 말입니까?” 이 말의 뜻은 “내가 내 아우처럼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보입니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천한 직업인 목자라고 하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에 지체 높은 왕족으로 오시지 않으셨을까요? 왜 고명한 학자로 오시지 않으셨을까요? 하다못해 왜 곡식을 재배하는 농부가 아닐까요?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귀한게 버리기 쉽습니까? 천한게 버리기 쉽습니까? 귀하면 버리지 못하지만 천하면 버립니다. 예수님은 쉽게 버리기 위하여 천하게 오셨습니다. 모든 버릴 것은 천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런 것들을 배설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 모든 것을 그는 버릴 수 있었고 천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만이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대중음악 차트 순위에 오른 보기 드문 찬송이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고 부르는 “어메이징 그레이스”입니다. 이 찬송에는 목숨을 버린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노래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압니다. 목숨을 버리신 목자 때문에 그 사랑을 알고, 우리도 목숨 버린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얼마 전 책에서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27년간의 감옥 생활을 마친 남아프리카의 넬슨 만델라는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대통령 취임식에 자신을 감옥에서 지키던 간수를 연단에 초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취임하자 데스몬드 투투 주교를 ‘진리와 화해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이 위원회는 복수의 악순환을 방지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진리와 화해 위원회는 2년 반 동안 청문회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리고 국민들은 그 동안 백인정부가 저지른 온갖 잔혹 행위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위원회의 청문회는 한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백인 경찰이나 군인이 자발적으로 고소자들 앞에서 이전의 범행을 털어놓고 완전히 범죄를 인정하면 재판을 받지 않고 처벌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때 만델라대통령은 남아프리카엔 정의 못지않게 치유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때 청문회에 반 드 브렉이란 백인 전직 경찰관이 나와서 청문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18살의 소년을 총으로 쏘고 증거를 없애기 위하여 시체를 불태웠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솔직하게 자세히 털어 놓았습니다. 8년 후에 반 드 브렉은 그 소년의 아버지를 체포하였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장작더미 위에 묶어 놓고 그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어 불을 붙이는 광경을 강제로 지켜봐야 했습니다.
  아들과 남편을 차례로 잃은 노부인에게 대꾸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반 드 브렉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경찰관은 고개를 떨군 채 노부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 드 브렉씨는 제 가족을 모두 데려 갔습니다. 그러나 제겐 아직도 그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많습니다. 한 달에 두 번 나는 그가 우리 집에 와서 하루 동안 시간을 보냈으면 합니다. 제가 엄마 노릇을 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과 나도 그를 용서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나는 내가 정말 용서했다는 걸 반 드 브렉씨가 알 수 있도록 그를 안아 주고 싶습니다.” 이 마을 마친 노부인이 증인석으로 걸어가는 동안 법정 안의 누군가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반 드 브렉 씨는 그 찬양 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그 상황을 감당치 못하여 졸도해 버렸던 것입니다. 목숨을 버린 사람이 있으면 이런 마음, 이런 행동, 이런 삶은 절로 따라오는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입니다. 목숨을 버리셨기에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는 믿기지 않는 사랑과 용서가 우러나고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이 사랑을 받고 부를 때마다 새로운 감격으로 다가옵니다.

셋째, 선한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이 목자를 압니다.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불러낸다고 합니다. 목자는 양들을 이름으로 압니다. 이름으로 안다는 것은 속속들이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양인 우리를 이름으로 아십니다. 이렇게 많은 하나님의 자녀도 다 이름으로 알고 계십니다. 출애굽기 33:12에는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이라고 합니다. 33:17에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고 합니다. 모세와 하나님의 관계와 대화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친밀하고 알뜰하게 알고 계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성부와 성자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성자와 성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자가 양을 아는 것은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통한 지식을 말합니다. 적당히 대강 아는 것이 아니라 깊이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양의 관습이 다 다릅니다. 양의 체질도 다릅니다. 양은 각자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자는 각 양의 특성을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잘 알고 계시는지 아십니까? 시편 139:1-4에는 이렇게 자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오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우리의 형편과 모습과 생각이 다 다릅니다. 심지어 쌍둥이라도 다릅니다. 우리 교회에도 쌍둥이들이 있지만 저는 쌍둥이들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아마 가족들과 가까운 분들을 제외한 나머지 분들은 구별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요즘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당에서 하나님께서 천당의 명부를 다시 작성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성형수술을 많이 해서 하나님도 혼돈이 되서 누가누군지 구분이 안돼서 그렇대요. 그러나 이 이야기는 성형이 많다는 것을 빗대어 하는 이야기지 하나님이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양들을 이름으로 아시는 친밀한 관계의 하나님이십니다.
  진젠돌프는 “더 만족스럽고 오래 가는 것은 지식적 앎이 아니라 관계적 앎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관계적 삶으로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양이 목자를 모르고, 엉뚱한 목자를 따라가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당치도 않은 일들이 우리 주변 이야기입니다.
  프랜시스 톰슨이란 분은 하나님에 대해 하늘의 사냥개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아마 한국 사람 같으면 아무리 적절해도 하나님을 개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서양사람들은 개가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을 개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들이 아무리 이리저리 피해 다녀도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 붙잡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잘 아시기에 피할 곳이 없습니다. 도망갈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결론

  신학자 우르스 폰 발타자르는 우리 자신을 신극을 공연하는 배우로 생각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은 하나님의 극장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공연하는 배우입니다. 정말 좋은 배우는 극본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양이 되기 위해서는 양의 연기를 잘 해야 합니다. 정말 양처럼 해야 합니다. 양이 어떻게 사는가를 연구해야 합니다. 어떤 배우는 원숭이 역을 하려고 동물원에 가서 원숭이를 열심히 관찰하여 흉내를 냅니다. 우리에게도 양을 열심히 관찰하여 양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목자인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역할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사랑합니다. 양을 인도합니다. 양을 보호합니다. 그리고 양에게 꼴을 풍성히 줍니다.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께서 목자라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양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양됨의 축복 누리며 선한 목자에게 선한 양 노릇을 잘 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참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먹고 살기도 힘들지요? 왠지 삶이 평안치 않지요? 아이들을 마음 놓고 내보내기엔 위태한 일 많지요? 먹고 살기 힘든 시대에 꼴을 먹이시는 목자에게 의존하십시오. 평안치 못한 시대에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를 찾으십시오. 위태한 일 많은 시대에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시는 목자를 따라가십시오. 양을 위하여 우리의 목자는 목숨도 버리며 육탄으로 막아주십니다. 이 목자는 선합니다. 착합니다.

  이 착한 목자의 착한 양으로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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