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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서로를 비판해서는 안 되는 이유 (마 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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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무 목사 (영신교회)

  오늘 말씀은 한 가지 퀴즈문제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다음 내용을 잘 들어보시고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지 답을 맞추어 보십시오.
“이것은 형제의 약점이나 허물을 들추어서 험담하거나 공격하는 언어의 폭력입니다. 자기 안경을 쓰고 다른 사람을 보면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로 다른 사람을 재면서 ‘길다, 짧다’ 늘어놓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행복을 훔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행복을 소중하게 여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에게 늘 문을 열어준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아침 식탁의 자리에도 우리와 함께 앉습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 속에도 존재합니다. 이것은 종종 선량한 사람들을 상처받게 만들고 낙심하게 만들고 좌절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것에 대해 경계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정답은 ‘파괴적인 비판’입니다.

  물론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 건전한 비판의식은 필요할 것입니다. 국가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때 건설적인 비판은 필요합니다. 한국교회가 썩어가고 병들어 가고 있다면 누군가가 그것을 비판하고 바로잡아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판이 없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닙니다. 북한은 비판의 자유가 없습니다. 오직 찬양할 자유밖에는....  물론 당원끼리 자아비판은 합니다. 자식이 부모의 당성을 비판도 합니다. 그러나 체제에 대한 비판은 불가능 한 집단입니다. 건전한 비판, 대안 있는 비판을 통해 민주주의는 발전합니다.

  그러나 이런 류를 제외한 인간관계속에서나, 가정과 교회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비판은 대부분 자기 아집이나 교만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성경에서 주님의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바로 교회 안에서 형제끼리 서로의 약점과 허물을 용납 못해서 말을 가지고 형제에게 상처주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비판하는 사람들의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 사람의 장점보다는 약점을 먼저 본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대부분 건설적인 비판보다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비판이 되기 쉽습니다.
 
  예)'악마의 편지'로 잘 알려진 ‘씨 에스 루이스’는 이런 풍자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날 ‘푸쉬’라는 고양이 한 마리가 런던을 방문하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루이스는 이 고양이를 만나 물었습니다. “푸쉬야, 너 어디 갔다오니?” “예, 나는 여왕을 만나러 런던에 갔다오는 길입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푸쉬야, 너는 거기서 무엇을 보았니?” “나는 여왕의 의자 밑에 있는 생쥐를 보았습니다.”

  대단히 의미심장한 이야기입니다. 고양이는 런던의 그 아름다운 왕궁에 가서 엘리자벳 여왕이나 찬란한 궁궐의 그 아름다운 역사적인 사적을 본 것이 아니라, 겨우 여왕의 의자 밑에 기어 다니는 생쥐를 본 것입니다.

부정적인 사람들은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대개 사람들 속에 있는 생쥐 같은 어두운 구석만 찾아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비판의 노예가 되어버리기 쉽습니다. 여러분은 상대방의 장점을 찾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상대방의 단점을 더 찾으려고 하는 사람입니까?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왜 서로를 비판해서는 안 될까요?
1.비판은 비판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1절“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여러분, 세상의 원리는 악순환의 원리입니다. 피는 피를 부르고, 복수는 복수를 부르고, 비판은 비판을 부릅니다. 내가 누구를 비판한다면 언제든 나도 비판받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산을 향하여 소리칠 때 다시 돌아오는 메아리의 원리와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자기가 비판받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남을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남의 말 잘하는 사람치고 남이 자기 말하는 것 잘 견디는 것을 못 봅니다. 아주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상대방은 잘못한 것이 너무나 많아서 당연히 비판받아야 하지만, 자신은 비판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자신을 완벽주의자로, 의인으로 생각하고 자기처럼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묘한 우월감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수시로 나와 타인을 비교하면서 남의 약점을 지적함으로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냅니다.

  성경에 소개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남을 비판하는데 도가 튼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십일조를 잘 내는 것을 드러내어 자랑하기 위해서 십일조 안 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공격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바리새인처럼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바리새인들의 의는 다른 사람은 죽이고 자기는 사는 의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들 다 비판받는 것 싫어하지? 남이 너희소리 하는 것 듣고 싶어하지 않지? 그러면 너희도 남을 비판하지 말아라”

예) 저희아내가 저를 격려하기도 하지만 종종 무서운 비판자가 되기도 합니다. 설교를 잘 못했을 때, 그리고 이런 저런 것에 대해 저를 비판합니다. 그러면 저는 때로 귀 기울여 듣기도 하지만 듣기 싫습니다. 하루 종일 피곤하게 주일을 지냈는데 설교가 어떻고 내용이 어떻고 하면 싫습니다. 아내가 저를 위해서 하는 이야기인줄은 알지만 어쨌든 듣기는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 이상한 것은 제가 아내의 단점을 이야기 하거나 부엌살림에 대해 지적을 하면 제 아내는 그것을 너무 싫어합니다. 죽기보다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이게 아이러니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과 통하는 것이 마태7:12절입니다. 황금률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2.우리가 왜 서로를 비판해서는 안 됩니까? 비판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2절“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
(공동):“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 하는 대로 너희로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2절)

비판은 원어로 보면 판단 또는 심판의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재판정의 용어입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라는 말은 “우리가 형제를 심판한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예)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우리는 “주님, 제게 긍휼을 베풀어 주세요”라고 자비를 구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세상에 살 때에 타인에게 어느 만큼의 긍휼과 사랑을 베풀었느냐?”
마태5:7절에서 주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긍휼을 형제에게 베푸는 자는 주님의 긍휼을 입지만, 형제에게 긍휼을 베풀지 못하는 자는 긍휼없는 심판에 던져질 것입니다.

롬14:10-11“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3.우리에게는 남을 비판할 만한 의로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3절“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남을 비판할 만큼 의롭고 완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구를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히려 남을 비판하는 사람을 향하여 주님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깨달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티와 들보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더 큰 악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도 형제의 작은 허물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또한 내 눈에 들보가 가로막고 있다면 상대의 티도 빼 줄 수 없습니다. 먼저 내 눈에 들보를 제거해야합니다. 그래야 밝은 눈으로 상대를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세상이 어둡다고만 한탄하지 말고 안경의 먼지를 닦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편견과 선입관으로 가득차있습니다. 특별히 모든 사람이 범하는 잘못 중에 하나는 ‘내가 하면 괜찮고 남이하면 문제’라는 관점입니다. 내가 해외여행을 하면 그것은 견문을 넓히는 것이지만, 남이 해외여행을 하면 그것은 외화낭비요 사치입니다. 내 딸이 음악공부를 하면 소질을 살리기 위해 하는 것이요, 남의 집 딸이 음악공부를  허영에 들떠서 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비판 한다면 바로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판단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밖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약4:11-12“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다.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성경에서 비판했던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섰고 그들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구스여인과 결혼했을 때 그것을 비판했던 누이 미리암은 문둥병자가 되는 벌을 받았습니다. 모세의 지도력을 부정하고 그를 거스려 비판했던 고라와 다단, 아비람의 무리 250명은 땅이 갈라져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교우들 서로간에도 비판대신 권면하고 기도하고 사랑으로 격려합시다.

예)몇 년 전 서울의 큰 교회목사님이 고소를 당하고 법정에 섰으며 텔레비전에도 나왔습니다. 목회자들 사이에서는 이제 그 목사님의 목회생명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의 어떤 목사님이 “그 교회 교인을 만나서 요즘 근황이 어떠냐?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질문하면서  아직도 그 교회 계속 출석하고 있느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그 목사님 설교가 귀에 들어오느냐고 물었더니 들어온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절대적으로 목사님을 신뢰할 뿐 아니라 목사님도 사람인데 설령사실일지라도 목사님을 신뢰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후에 그 문제는 잘 수습되고 교회는 더 크게 부흥되었고 열심히 전도하여 1년에 천 명씩 세례를 주는 교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만약 그 교회의 교인들이 목사님을 비판하기 시작했다면 교회는 분열되고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부흥하는 교회를 보십시오. 그들은 목회자와 성도 간에, 성도와 성도 간에 서로 허물을 덮어주고 사랑으로 권면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퇴보하거나 침체된 교회를 보십시오. 마치 먹이를 찾아다니는 야수처럼 눈을 부릅뜨고 살피다가 건수가 생기면 문제를 삼고 소문을 퍼트리며 비판하고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성도 간에도 서로의 약점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평화와 위로의 공동체입니다. 누구든지 교회에 나오면 안식과 쉼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 간에, 하나님의 자녀 간에 서로 헐뜯고 비판하면 어찌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 교회는 큰일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큰일을 하다보면 왜 비판할일이 없겠습니까? 늘 내 뜻에 맞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권면하고, 기도로 후원하고, 격려로 세워줌으로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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