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왜 교육인가? (창 1:1-5 )

  • 잡초 잡초
  • 178
  • 0

첨부 1


- 이용호 목사 (영천교회)

  본문 2절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그 천지가 창조되기 전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빛이 지어지고 천지가 지어지기 전의 그 모습이 땅이 혼돈하고 공허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주석가들은 이 문제를 한 마디로 ‘카오스의 세계’ 즉, 무질서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코스모스’라는 말은 우주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카오스, 즉 무질서에서 우주가 지어졌는데 이 무질서를 수습하는 첫 번째는 빛이라는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나님이 빛을 지었습니다. 이 빛이 드러나자 무질서가 물러갔습니다. 그래서 첫째 날의 이 빛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보아야 됩니다. 첫째, 생명입니다. 빛이 있음으로 생명의 존재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밝음입니다. 우주에 흑암이 물러가고 밝음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잘 연상해 보면 마치 연극의 막이 열리는 한 장면과도 같은데 여기에 교육의 의미가 나타나 있습니다.

  혼돈과 흑암을 거두고

  교육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거두는 중요한 일입니다. 교육이 없으면 혼돈이 물러가지 않습니다. 교육이 없으면 무질서가 물러가지 않습니다. 교육이라는 말은 오늘만 강조하는 게 아니고 우리들에게 교육이라는 개념은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 앞에 세 가지 당부를 했습니다. 첫 번째는 “모든 족속으로 가서 제자를 삼으라.” 선교입니다. 두 번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예배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성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교육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존재목적은 세 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교육입니다.
  우리 교단의 한 교회가 선교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선교를 한참 하다가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왜 이런가?’ 우리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선교를 위해서 투자도 많이 하고 온 교회가 전력투구를 했는데 조금 가다가 그만 교회가 휘청하고 있습니다. 그 때 중요한 진단이 나왔습니다. “선교는 교육과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육이 없는 선교, 선교가 없는 교육 모두 딜레마가 옵니다. 반드시 이 두 가지가 교회 안에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육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중요한 요건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면 교육을 실제적으로 보겠습니다. 지금 가장 악랄한 북한의 공산정권이 왜 체제가 무너지지 않고 있느냐? 그 중에 하나가 강력한 교육입니다. 소위 말하는 당원교육입니다, 아주 철저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5호담당 비서관을 둡니다. 다섯 가구씩 묶어서 가르치는 비서가 있습니다. 이 다섯 가구를 한 주간에 세 번씩 모아서 공산당원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어떤 수상한 행동을 하는지를 다 점검합니다. 이런 점조직 교육과 철저한 수직적 당원교육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공산체제가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이 안 무너지고 있는 게 교육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교육을 받습니다. 그들은 교육에 근거해서 숨은운동, 충성운동 등 네 가지 영웅운동을 펼치고 있는데 주민들이 당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을 다 계급화해서 상을 주는 것입니다. 영웅운동 가운데 제일 큰 운동은 충성운동입니다. 이 훈장을 받으려면 김일성 장군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김일성 교리가 그대로 살아 있고 김일성이 죽은 지가 10년이지만 그대로 유흥통치를 하고 있습니다. 김일성 어록이나 주체사상이 그대로 학습되고 있습니다. 김정일이 그대로 국민들 앞에 신으로 등장합니다. 그를 위해 죽는 것이 최고의 영웅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강력한 교육이 북한 땅에서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공산체제가 무섭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전제해놓고 이제 우리 한국현실과 우리들의 현실에서 잘못되어 있는 교육의 결과를 보아야 합니다.

  경직화 현상

  지금 우리 한국의 교육열은 대단합니다.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도 대단해서 지금 외국에서 우리나라에 배우러 오는 나라가 아주 많습니다. 그만큼 교육강국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교육에서 나타나는 부작용이 많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잘못된 교육이 이미 저질러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고민을 많이 합니다.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하면, 오늘 우리들은 교육을 많이 시켰는데 자기 도그마에 도취되는 사람들을 많이 키웠다는 것입니다. ‘도그마’라는 말을 정확하게 말하기는 쉽지 않은데 이번 정부가 들어서고 많이 듣는 말이 ‘코드’라는 말입니다. 코드가 도그마와 같은 개념입니다. 공산체제도 하나의 도그마입니다. 그러니까 공부도 많이 했는데 사람을 키워놓고 보니까 도저히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코드가 안 맞으면 안 됩니다. 코드는 영어로 보면 전기코드가 아닙니다. 이념, 체제, 체계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많이 배운 사람들이 아주 쓸모없는 사람으로 형성되어버린 모습이 우리 사회에 많습니다.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자기 도그마에 취해 버린 사람, 제 잘났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잘하는 게 있고 못하는 게 있습니다. 자기 잘하는 그것에만 도취되어서 자기 잘하는 것을 자랑하면서 어두운 데로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도그마에 취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너무 많이 길러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이단자도 많이 일어나는 게 바로 그런 현상입니다. 교육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경계할 요소들

  성경에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사울왕이 전쟁에서 승리했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되는데 그것으로 자기 이름을 내는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은혜로 이겼으면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지, 왜 기념비를 세워서 자기 이름을 냅니까? 이것이 사울왕의 도그마입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왕자 중에 제일 똑똑하고 인물이 잘난, 모든 여건을 갖춘 왕자입니다. 그런데 이 압살롬이 자기 도그마에 취해 있는 것입니다. 자기 밖에는 없습니다. 요즘 이런 사람들이 많이 길러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에 제거해야 될 위기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피를 끓게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피가 끓는다는 이 말은 상당히 다른 개념입니다. 사람은 가슴이 끓어야지, 피가 끓으면 안 됩니다. 피가 끓는 사람은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에 심장은 식어있고 피가 끓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렇게 교육을 많이 받아도 피가 끓는 것입니다. 회의할 때 보면 피가 끓는 사람이 많습니다. 피가 끓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기 바랍니다. 가슴이 뜨거워지기 바랍니다.
  다음에 새로운 사명을 꺼리는 사람입니다. 늘 익숙한 길, 자기 손해를 안 보는 길, 자기 편한 길, 내 자신을 허물고 새로운 도전의 길을 꺼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사업을 새로 하는 사람들의 개업예배를 드릴 때 보면 마음이 기쁩니다. 그 사업이 잘 되고 안 되고 간에 무언가 새로 시작해 본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전건축에 대한 표어를 정했습니다. “성전건축으로 변화하고 부흥하자.” 여러분이 건축만 하고 안 변하면 불행합니다. 성전건축은 새 집입니다. 보이는 물체는 변한 것입니다. 안 보이는 우리의 신앙사고와 인격이 변해야 됩니다. 그래야 새 집에 들어가는 사람으로서 어울리는 것입니다. 새 집에 입주하고도 사고방식은 옛 사람으로 시궁창에서 뒹구는 그런 의식을 가지고 살 수 없습니다. 변화하고 부흥해야 됩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이런 면에 아주 두려워합니다.
  다음에 비판의 소리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일수록 이게 안 된다는 것입니다. 높이 된 사람일수록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회의 르메르 신부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진리는 반대자들의 비방으로 무너지는게 아니라 옹호자들의 열광에 의해서 썩어 버린다.” 측근자들이 잘 한다, 잘 한다 해 주는 거기서 썩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바깥에서 반대자들의 소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썩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정치풍토에 잘 안 되는 요소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높이 될수록, 알면 알수록 겸허함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신앙의식을 가진 교인들이 자꾸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리스도의 겸손함이 나타나야 하는데 안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잘 되는 건 저주도 아니고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잘됨을 통해서 더 낮아지고, 더 섬기고, 더 베푸는 자리로 가야 합니다. 높아진 자리에서 더 겸손해야 되는데 높아진 자리에서 목에 힘만 주고 있으면 안됩니다. 이런 유형이 오늘 한국사회에 너무 많이 길러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했는데 해 놓고 보니까 인간들이 비정상이라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없다.” 이런 말을 왜 합니까? 지도자로 세워나 보니까 비정상이라는 것입니다.

  결말을 쉽게 보려는 유혹

  또 한 가지 분석이 있습니다. 속히 결말을 보려는 유혹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 임기 때 뭐 하나’ ‘내가 이 자리에 있을 때 뭐 하나’ 결말을 속히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육은 그런 게 아닙니다. 입시위주의 교육이 그것을 몰고 왔습니다. 우리는 성급한 결과를 자꾸 기대합니다. 유학 간 사람들의 이야기 중에 한국학생들이 초기에는 다 우등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최정상의 자리로 갈수록 다 탈락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학입시에 고득점을 받으면 그 사람의 일생이 보장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평생 이 사람을 소개할 때 ‘수능시험에서 전국 일등한 사람이다’라고 이제 시작인데 무슨 결말이 난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오늘 교회교육이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이 쓸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으로 키워져야 되는데 키워놓고 보니까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으로 안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기대에도 도저히 부응하지 못 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교육의 부정적인 과오를 미리 거두자는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했으면 빛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도 흑암과 혼돈이 있다면 천지창조가 잘못된 것입니다. 교육은 카오스를 거두는 작업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라이벌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 애는 공교롭게도 한 동네에 살았는데 집이 너무 가난해서 초등학교 졸업 후 공부를 못했습니다. 저도 초등학교 졸업 후 당장 중학교를 못 갔습니다. 형님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머리 잘 돌아가는 그 때에 아까운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래도 저는 기다려서 공부했으니까 행운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를 훗날 우연히 고향에서 만났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보니까 제일 불행한 사람은 교육을 못 받은 사람이다.”
  오늘 우리가 교육을 받고 있으면서도 죽는 소리 하면 안 됩니다. 교육을 받았다고 하는 이 자체가 위대한 우선권입니다. 요즘 아이들을 해외유학 보내면서도 죽는 소리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잘 길러보고 싶지 않은 욕심이 어디 있습니까? 남들처럼 해외유학 보내서 국제 맨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가 없습니까?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일부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일부 그렇게 하는 사람이 더 불만이 많고 더 죽는 소리를 합니다. 어마어마한 은혜를 받고 사는 우리 모습을 지금 다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육을 받았다는 이 자체는 교육을 못 받은 사람에 비하면 엄청난 복입니다. 좌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가 지금 망가지고 잘못되어 가고 있습니까?
  교회교육은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드는데 있습니다. 이 세상 풍조에 어울리고, 이 세상 인간들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길러내는 게 아닙니다. 카오스를 물리쳐야 됩니다. 혼돈이 물러가야 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 갈등이 물러가야 됩니다. 고난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물러가는 고난이 되어야 합니다. 물러가기 위해서 빛이 와야 되는데 이 빛을 오게 하는 역할이 교육입니다.

  교육의 강조점

  그러면 이제 교육론에 근거해서 빛이 있는 교육이란 어떤 것인가? 이것을 네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우리 교육은 바른 시력을 길러주어야 합니다. 바로 보게 만드는 교육을 해야 됩니다. 빛은 보게 하는 것입니다. 빛은 밝음입니다. 빛이 있으면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배우든 교회교육을 할 때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눈을 열게 해 주어야 합니다. 미래를 보고, 앞을 보는 이런 영적 시력을 회복해주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멀리 보고 바로 보아야 합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 위로부터 빛을 받았을 때 시력을 잃었습니다. 눈이 멀었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에게 가서 안수를 받고 난 후 “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져 보게 되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는 시선을 가지고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러 가던 사울이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러 가는 것이 율법의 의로 알았던 그에게 하나님이 그 눈에 비늘을 벗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비전을 보게 했습니다. 교육은 시력을 회복해 줍니다. 자기를 볼 줄 알고, 교회를 볼 줄 알고, 미래를 볼 줄 알고 이웃을 볼 줄 아는 시력을 회복합니다. 성경공부 열심히 했는데 이웃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무관심하게 섬긴다면 영의 눈이 열린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바른 실력을 길러야 됩니다. 실력이라는 말은 매우 포괄적입니다. 실력이라고 할 때 지식, 교양, 인격, 지위, 경제력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실력이라 하면 균형된 실력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른 실력을 길러야 됩니다. 이것은 교육이 갖고 있는 최고의 역할입니다. 교육 자체는 실력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교육받은 그 사람이 실력자가 되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이 후에 실력자로 자라갈 수 있는 동기와 근거를 주는 게 교육입니다. 왜 우리 가운데 실력자가 없느냐? 이 말은 ‘교육이 부실했다’는 말도 되는 것입니다. 가르침이 부실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교단 안의 일뿐 아니라 교단 밖의 일도 관계하는데 거듭거듭 부딪히는게 뭐냐 하면 실력입니다. 내가 너무 실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교회만 붙잡고 있으면 그런 도전이 없는데 여기 저기 일을 해보려 하니까 최종적인 갈등은 실력입니다. 실력이 없으면 경쟁이 안 됩니다. 흉내내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주도하는 것은 실력입니다. 이 세상은 오늘 우리에게 실력을 요구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아이들 세대에 어느 분야에서든 견줄 수 있는 실력자로 키워놓아야 됩니다. 교회교육과 사회교육, 여기에 언제나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아이를 아낀다는 것과 실력을 키운다는 것은 너무 다릅니다. 아이들의 그 잠재력이 뻗어가도록, 실력이 뻗어가도록 채찍질도 하면서 키워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구심력 사회구조’라고 의식분석을 한 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의식이 교육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모님들이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서도 부모 품에 언제나 품는 아이, 그 이상을 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네 부모 품을 떠나서 세계를 호흡해라’ ‘이 지구촌을 펄펄 날아라’ 이와 같은 의식이 우리한테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사랑할 때 언제나 부모품안에서 보기 좋은 아이로 키운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말이 전부 구심점이라는 것입니다. 책상서랍을 빼기도 하고 닫기도 한다 해서 ‘삐닫이’라는 우리말이 합쳐진 말인데 영어로 보면 ‘draw’, 빼는 것 밖에 없습니다. 엘리베이터는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내려온다는 뜻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승강기’라고 합니다. 올라갔다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나들목’ 나갔다가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Exit’는 나간다는 뜻입니다. 나가는 길에는 절대 안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나갔다가 들어옵니다. 자식을 떠나보내고도 결국은 내 품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맞는 자식이 되라, 그것을 기준으로 삼을 때 우리 아이들이 지구촌을 호령하는 인재가 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정당한 용기입니다. 실력보다 더 중요한 요건입니다. 실력이 없어서 일 못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교육받은 사람은 실력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용기가 없어서 못한다는 것입니다. 정당한 용기를 기르는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 앞에 용감한 크리스찬으로 길러내는 교회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네 번째, 하나님께 받은 것은 소중히 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의 물매처럼 하나님께 소중히 쓰여야 합니다. 다윗이 가지고 있는 물매는 천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가지고 있는 물매기술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가진 물매기술을 유용한 때에 쓴 것입니다. 물매기술을 가지고 골리앗을 쳐 물리치는데 썼습니다. 곰과 사자를 물리치는데 쳤습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우리가 소중한 것을 가졌느냐가 아니고 얼마나 소중하게 쓰느냐의 문제입니다. 물매돌이라도 필요할 때 바로 쓰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소중하게 쓰기를 바라십니다.

  삶 속에서 증거되는 교육

  바둑기사 이창호 국수는 처음부터 바둑을 잘 두고 처음부터 기발한 국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창호 국수의 최고장점은 말판에 가서 초읽기에 비상한 천재적인 기술이 있다는 것입니다. 초읽기에 들어가면 아무리 유능한 기사라도 당황하게 되고 불리한 상황에서는 더 당황하는데 이창호 국수는 초읽기에 들어가면 초인적인 침착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게 초읽기에 맞추어서 수를 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초읽기의 강점이 어디서 왔느냐?  이창호는 조부 때부터 3대째 시계방을 경영했다, 그래서 이창호는 어릴 때부터 초침소리를 들으면서 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침소리가 들릴 때 이창호는 오히려 안정감을 느끼는 정서가 발달됐고 침착해진다고 해석을 해 놓았습니다. 요즘은 근사한 시계방을 차려놓으면 우리 사회에서 대우받습니다. 그러나 이창호 할아버지 때 시골에서 시계방 아들이라 하면 혼담도 안 들어오는 집입니다. 그것을 3대째 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아버지 일을 도우며 자란 이창호가 무슨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는 바둑으로 세계를 주름잡는 기사가 되었습니다.
  가진 것을 어떻게 소중하게 쓰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경험을 어떻게 소중하게 하나님 앞에 바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비관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소중하게 즐기고, 소중하게 쓸 줄 알 때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교육은 그걸 할 줄 알게 만드는 것입니다.
  얼마 전 언더우드 선교사의 후대들이 TV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120년 전에 한국에 와서 하나님께 내걸었던 선교전략이 네 가지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복음선교입니다. 복음을 전해서 이 땅에 교회가 부흥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교육을 위해서 학교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형편없는 의료시설을 보고 이 땅에 의료혜택이 있도록 병원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20년 전에 우리 조상은 너무도 빈곤했습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그 빈곤을 보고 이 땅에 빈곤이 물러가도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빈곤을 퇴치시키기 위해 수익사업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교회를 설립하고,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학교를 세우고, 의료혜택을 위해서 병원을 세우고, 빈곤을 퇴치시키기 위해서 돈 버는 기술을 도입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들 후손 4대, 120년 만에 대한민국에서 어느 정도 자기들의 선교전략이 성취가 되었다, 이제는 우리가 미국으로 물러가도 한국인의 손에 의해서 이 네 가지는 저절로 되게 되었다, 우리 할 일은 다 했다는 평가를 하였습니다. 거기서 제일 많은 이야기는 교육이었습니다. 그들 언더우스 4대가 전부 교육가들로 구성되어 우리나라에 와서 교육을 했습니다. 그들 후대들이 이 한국에서 뿌리고 간 교육의 파종이라는 것은 상당합니다. 오늘의 이 땅에 이런 인재들이 양성된 대는 이들의 4대에 걸친 헌신적인 교육의 파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미국의 유능한 전문가들을 수시로 초청해서 이 땅위에 교육을 심었다는 것입니다.

  맺는 말

  이렇게 기독교가 교육을 강조함으로서 이 땅의 사람들이 눈을 뜨게 되었고, 잠을 깨게 되었고, 빈곤을 퇴치하는 전문가들이 양성되고, 이제는 세계굴지의 병원을 세워가는 의료인력들이 양성되고, 한국교회가 현재 지구촌에 주목을 받는 교회가 되어 있고, 한국의 기독교 학교들이 얼마나 많은 사회적인 공헌을 하고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한반도에 흑암이 물러가는 일에, 혼돈이 물러가는 일에 언더우드 일가의 교육이 큰 몫을 했다고 자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육의 본질은 교육에 걸러 가야 될 것은 걸러 가고, 세워가야 될 것은 세워가는 교육, 이것을 바로 할 때 우리 교육은 그래도 본질적인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