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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의 본질 (애통하는 마음) (마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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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삼철 목사 (천호교회)

시작하는 말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연방준비은행 연구원들이 최근에 “지옥 믿을수록 부자나라 된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지옥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가 잘 살고 덜 부패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국민의 소득수준 결정요인에 대한 전통적인 경제학적 설명도 중요하다고 이들은 인정합니다. 인구, 노동의 질, 인플레, 저축, 투자, 법과 제도같은 것들을 그 요인으로 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산성은 이것만으로는 절대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있으며, 갈수록 많은 학자들이 비경제적 요소, 특히 종교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이들은 말을 합니다.

연구팀은 국제 투명성기구의 조사자료등을 이용, 미국과 유럽연합(EU), 일본, 인도, 터키 등 종교적인 영향이 큰 35개국의 소득과 부패지수, 종교적인 믿음을 상호비교했습니다.

그 결과 지옥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높은 나라가 덜 부패한다는 경향성이 나타나고, 또 부패지수가 낮은 나라일수록 1인당 국민소득이 높다는 명확한 관계가 도출된다는 것입니다. 

“애통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싸파드 “sapad”입니다. 이 말은 시리아어에 본존되어 있는 원래의 뜻은 “스스로를 때리는 몸짓”을 말합니다.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슬픔의 행위를 말합니다.

“애통하다”는 말은 헬아어로 펜데오 “pentheo”입니다. 이 말은 원래 죽은 자를 위하여 슬퍼하는 애통을 말합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애통하는 이유는 ①죽은 자를 칭송하는 행위입니다. ②죽음의 비극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행위입니다. ③유가족들과 살아남은 자들을 위로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복의 본질에 대하여 두 번째로 “애통하는 마음”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사람은 행복하게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1).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잘난 사람은 잘난멋에 살고, 못난 사람은 제멋에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잘난 사람들은 잘난 자식들이 태어나기를 기대하고, 못난 사람들은 멋있는 자식들이 태어나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제새끼를 사랑하게 됩니다. 떡은 남의 손에 있는 것이 더 커보이고, 짜장면은 남의 그릇에 있는 것이 더 많아 보입니다. 물론 옛날 가난한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자식은 내 품에 있는 자식이 더 커보이고, 더 잘 생겨 보이고, 더 준수해 보이고, 더 예뻐보입니다. 그래서 누가 말했듯이 사람은 제새끼 사랑하는 고슴도치를 면할길이 없는가 봅니다.

하나님도 예외는 아닌가 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27-28,3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낳으셨는데 아담과 하와는 흙을 가지시고 손끝으로 낳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통하여 성령으로 낳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교회를 통하여 물과 성령으로 낳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육신이 아니시고 영이시기 때문에 특이한 방법으로 낳으셨습니다.

특히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를 낳으시고 보셨을 때 사람이 하나님을 닮지 않은 것은 육체 뿐이었습니다. 그 이외는 전부 하나님을 쏙 빼닮았습니다. 마음, 정신, 영혼에서 나오는 모든 인격과 정서와 감정과 행동 어느 하나 하나님을 닮지 않은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말 기뻐하셨습니다. 사람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2). 남자와 여자로 가정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성경에 보면은 혼자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데 더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천주교의 신부들이나 수녀들은 독신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독신 생활을 감내합니다. 승려들은 불교의 도를 닦기 위하여 일생을 홀로 살다가 마치게 됩니다. 특별한 목적으로 독신 생활을 하는 것은 불행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상 일반적인 경우에는 남녀가 서로 만나서 가정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거기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아담에게 데려오실 때에 아담이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2:23-25)고 말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정을 이루고 정말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사랑을 속삭이면서 사는 것은 정말 행복합니다. 부모를 떠나 독립하는 것도 그 이상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은 부부생활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행동을 하여도, 어떻게 살아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부부관계에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고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이루어 주실 때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축복을 해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는 축복, 땅을 정복하는 축복, 땅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축복을 해주셨습니다.

며느리가 신혼생활을 오래하는 친구에게 “혼자사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더 행복하고, 결혼하여 신혼생활을 오래 하는 것보다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100배이상 더 행복하단다. 그러니 너도 빨리 아이를 가져 낳으라”고 일러 주는 것을 들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동방의 에덴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 땅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2:9)고 했습니다.

3). 하나님과 동행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생령으로 만드신 이유는 하나님과 동행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이유는 사람과 영원히 교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축복하신 것은 사람과 동행하시면서 지속적으로 영원히 축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피조물 인간이 조물주 하나님과 동행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요, 행복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의 가장 근본적인 본질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예쁜 아내와 함께 낙원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각종 과일을 먹으면서 생명과일도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부부생활의 열매인 자녀를 낳아서 땅위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땅을 다스릴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2. 사람은 범죄하므로 행복의 본질을 상실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사람은 너무 행복했습니다. 행복에 겨워서 그 행복이 얼마나 귀중한 줄 몰랐습니다. 단 한번의 실수로 행복을 까불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행복의 쭉정이와 깜부기는 걷어 들이고, 행복의 본질은 까불어 날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담은 물론 인간은 누구나 행복의 본질은 상실하고, 행복의 깜부기와 쭉정이만 덮어쓰고 살아갑니다.  행복의 덤터기나 덮어쓰고 살아갑니다. 행복의 본질은 상실하고 행복의 덤터기만 덮어쓰고도 행복한 것으로 착각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고 선언하셨습니다. 물론 하와가 태어나기전 아담에게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과 사람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잘 해내는 것이 능력입니다.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해서는 안될 일을 하는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잘 하는 짓이 아닙니다. 그것은 범죄행위입니다.

① 죄는 우리들에게 문제를 더해 줍니다.  죄된 방법을 쓰면 점점 더 얽히고 골치 아파집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 지니라”(창4:7)고 말씀하셨습니다.

② 죄는 우리들에게 삶의 의욕을 상실케 합니다. 죄를 지으면 뜨거운 열심이 식어집니다. 신앙의 열정이 사라집니다. 삶의 의욕이 없어집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엇인가 빠져 나아갑니다.

③ 죄는 우리들에게 고통을 곱해 줍니다.  죄된 생활이 마취제가 될 때가 있으나 깬 뒤의 아픔은 이전보다 더 심하게 됩니다. 죄는 마약과 같습니다. 마취제와 같습니다. 깬 뒤의 아픔은 제곱이 됩니다.

④ 죄는 우리들에게서 나누어 갑니다. 가족을 깨트립니다. 이웃을 나누어 갑니다.  죄는 친구를 잃게 합니다.. 결국 죄는 사람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버립니다.

결국 죄는 사람에게서 행복의 본질을 빼앗아 갑니다.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하나님과 분리되게 합니다. 죄를 짓고는 행복하게 될 수가 없습니다.

2). 하나님의 형상을 모두 상실했습니다.

사람이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자가 되면은 인간성을 상실하게 돕니다. 도박에 빠지면 인간의 본성을 상실하게 돕니다. 취미에 도취되면 인격을 상실하게 됩니다. 뭐가 뭔지 구별이 가지 않습니다.

천진 난만한 어린 유아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바로 그랬습니다. 인간이 지음을 받았을 때에는 하나님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말을 듣고 욕심이 생겼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마11:23)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습니다.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며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창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이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벗었다는 것을 알고, 부끄럽다는 것을 느꼈다는 것, 숨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다는 증거입니다.

결국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아담은 대표자로서, 하와는 범죄자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뱀은 회복 불능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3. 애통하므로 행복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1). 사람은 고생하면서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타락이후 사람의 생활은 한마디로 고생의 생활이었습니다. 땅은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지속적으로 내어 얽히게 합니다. 얼굴에 땀이 흘러야 살아가게 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일터에서 엉겅퀴를 만납니다. 가시덤불이 가로막습니다. 손발이 상처투성이가 됩니다. 사는 것이 고생입니다.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불행하다고 한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벌받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죄의 값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아들 “셋”시대에 와서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4:26)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3). 뉘우치고 애통하며 회개하여야 합니다.

세상에는 원통해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를 갈며 슬피우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자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집을 나간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와서 “아버지여 내가 아버지께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모시겠나이다”(눅15:21)라고 말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와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동시에 그의 불행은 곧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행복이 찾아왔습니다. 

4). 행복의 본질인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 온 아들을 위하여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준비했습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웠습니다. 아버지의 무한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애통하며 회개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끝맺는 말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신을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인류를 위하여 애통는 자는 반드시 위로를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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