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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버릴 사람은 없습니다 (요 21: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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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규 목사 (분당샛별교회)

< 그래도 사는 길은 있습니다 >

한 회사원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실력이 있고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러다가 54세에 IMF를 맞아 직장에서 퇴출당했습니다. 그때 그는 가족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제야 속이 후련하다. 내가 지금까지 오랫동안 회사에 매여 가족들과 좋은 시간도 못 가졌고 취미생활도 못했는데 이제는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도 많아지고 취미생활도 할 수 있어서 잘 됐다.”

가족들은 정말 그런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처음에는 여행도 가고, 가족과 함께 외식도 하고 지냈습니다. 그러나 3개월쯤 후부터 완전히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3개월 내내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그때 쉽게 죽지 못한 이유는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죽을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이 유일한 이유였습니다.

그가 54회 생일을 맞아 가족들은 아빠에게 힘을 드리자고 했습니다. 그날 네 식구가 조용한 찻집에 가서 아내가 먼저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 54회 생일에 우리가 특별 선물을 준비했어요.” 그리고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습니다. 그 종이에는 그 동안 남편에게 고마웠던 일, 남편이 자랑스러웠던 일 54개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다 읽고 아내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었어요.”

곧 이어 대학생 딸이 아빠에게 고마웠던 일 54가지를 읽으며 아빠 때문에 자기들이 이 만큼 되었고, 자기는 아빠가 너무 자랑스럽다고 했습니다. 그때 아빠의 눈에 눈물이 어렸습니다. 계속해서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54가지 아빠에게 고마웠던 일을 읽으며 아빠는 우리 가정의 보석과 같은 분이라고 하자 아빠가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날 그는 일어섰습니다. 자존심이 무너지면서 다 무너졌는데 자기에게는 아직도 소중한 가족이 있음을 깨닫고 더 이상 무너지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후 그는 다시 든든한 남편과 아빠의 모습을 되찾고 지금 열심히 살고 있다고 합니다.

요새 경기가 어려우면서 좌절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분들을 봅니다. 며칠 전에는 극심한 경영난에 빠진 한국일보의 이병규 논설위원이 투신자살을 했습니다. 책임감이 없는 분이라면 회사가 망하든 말든 자기 살 궁리부터 했겠지만 책임감이 큰 분이었기에 회사에 대한 부담감도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힘든 때가 올 수 있습니다. 그래도 사는 길은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값진 진주로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려고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엄청난 값을 치르셨습니다. 예수님은 필요하면 쓰고 필요 없으면 즉각 버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우리를 돌봐주시고, 책임지시고, 섬겨주실 것입니다. 그 사실을 오늘 본문은 잘 가르쳐줍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중요한 덕목 4가지를 가르쳐줍니다.

1. 소리 없는 사랑의 중요성 < 침묵은 오히려 사랑의 표시입니다 >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예수님은 12절에서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시면서 차려놓은 밥상에서 그냥 먹게 하신 것이 아니라 말없이 직접 서빙(serving)까지 해주셨습니다. 그처럼 아무 말씀 없이 서빙하는 모습에서 오히려 주님의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들은 가끔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힘들어합니다. “하나님! 왜 저의 고통을 돌아보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입니까?” 그러나 그 침묵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는 것은 모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죄대로 일일이 정의의 칼을 빼신다면 누가 그 칼을 피합니까? 하나님의 침묵에는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침묵에서 회의를 느끼지 않고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 참된 성도입니다.

우리는 가끔 자녀가 분명히 잘못했는데도 야단치지 않고 침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상 그것은 더 큰 야단입니다. 야단의 목적이 사람의 변화에 있다면 부모의 사랑처럼 무서운 야단은 없습니다. 그 부모의 사랑이 침묵 중에 표현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꼭 말이 있어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은 주보를 주울 때 “이렇게 주보를 떨어뜨리면 어떡해?”하고 남이 미안한 생각이 들게 하면서 주보를 줍습니다. 그러면 주보를 떨어뜨린 분은 떨어뜨려서 미안한 생각이 들고, 그것을 보고 안 주은 분들은 안 주워서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반면에 어떤 분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주보를 줍고 깨끗하게 폅니다. 그 조용한 사랑을 사람은 몰라줘도 하나님은 알아주십니다.

제가 지난 4년간 미국 기독교선교연맹(CMA) 선교의 중간 거점으로서 요삼일육선교회를 통해 말씀 선교 및 CMA선교사 후원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약 2년 전부터 매달 10일 경에 꾸준히 ‘성전건축’이라는 이름으로 헌금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 앞으로 선교센터 건축헌금은 따로 계좌를 만들어 이제까지 모은 재정과 함께 그쪽 계좌에 따로 적립해 두려고 합니다. 언젠가 선교센터 건축을 하게 되면 아마 제일 기억나는 분이 그분일 것 같습니다.

엄청난 자금력을 가지고 분당으로 들어오는 대형교회들을 볼 때마다 솔직히 무력감이 들 때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때마다 소리 없이 후원하는 헌신자들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위로합니다. “우리 뒤에도 사랑의 후원자들이 있다.” 저는 그분이 누군지 모르지만 그 조용한 헌신에서 푸근한 사랑을 느끼고 목회사역과 선교사역의 용기를 얻습니다.

사랑에 꼭 말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조용한 헌신과 서빙에는 더 큰 사랑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침묵 속에서 더 큰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의 기도에 즉각적인 응답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더 크고 놀라운 계획을 준비하고 계시는구나!”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2천년 전에 제자들을 서빙했던 것처럼 영적으로 조용히 우리를 서빙해주시고 계십니다.

2. 기다림의 중요성 < 기다려줄 줄 아는 것이 사랑입니다 >

그때 제자들이 식사 서빙을 받으면서 무엇이 가장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을까요? 바로 주님의 못 자국이 난 손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식사 서빙을 받을 때마다 그 못 자국 난 손이 뚜렷하게 보이는데 그 장면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그때 주님은 제자들의 허기진 배에 따뜻한 음식을 먹인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허기진 영혼에 따뜻한 사랑을 먹인 것이었습니다.

요새 경영 원리에 의하면 제자들은 퇴출 대상 1순위이입니다. 그들은 어려운 때 주인을 배신한 의리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남들은 다 도망가도 자기는 도망가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입으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그들을 퇴출시키지 않고 끝까지 변함없는 사랑으로 그들을 품어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뭔가 잘하면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인정하시고, 잘못하고 죄를 지으면 퇴출될까 봐 걱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연약해졌을 때 더 사랑이 깊어지는 분입니다. 그 사랑이 결국 우리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됩니다.

그 주님의 서빙을 받으면서 제자들은 부끄러움과 감격에 넋이 나갔을 것이고, 일부 제자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했을 것입니다. “이제 다시는 주님을 배반하지 말아야지.” 그 뒤 그들은 죽기까지 생명을 내걸고 주님을 위해 충성합니다.

무엇이 그들의 영혼을 살렸습니까?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기다려주심이 그들의 영혼을 살렸습니다. 그처럼 누군가의 영혼을 살리려면 이 두 가지는 필수적입니다. 하나는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기다려줄 줄 아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속에 치유의 역사와 회복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독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탄광에 사고가 생겨 10명의 광부가 갇히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에 구조되었을 때 9명이 생존했고, 한 명은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은 한 명의 광부만이 시계를 차고 있었다고 합니다. 항상 시계만 보고 초조해하면 육체도 상하고 영혼도 상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주님은 그렇게 바쁘게 활동하셨어도 한번도 조급하고 초조한 모습을 보이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치열하게 살면서도 느긋하게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3. 어우러짐의 중요성 < 스타는 불행의 가능성이 많습니다 >

본문 13절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정겨운 장면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친히 서빙하시는 사랑의 식탁에서 제자들이 함께 어우러져 식사하는 모습입니다. 그 어우러짐 속에서 그들의 형제의식은 더욱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그 얼마 전에 “누가 크냐?”고 싸우던 모습은 이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 어우러짐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사람에게 고난보다 더 무서운 것은 고독입니다. 기도 시간을 위해 스스로 만드는 고독은 좋은 것이지만 누구에게 외면당하는 고독처럼 고통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잃어도 누가 나와 함께 있다고 확신하면 고통을 이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형제간의 어우러짐이 있는 것처럼 복된 일은 없습니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Cast Away)를 보면 항공기 추락으로 무인도에 떨어진 주인공이 고독을 달래려고 배구공에 사람의 얼굴을 그려 넣고, 그 공에 ‘윌슨’이라는 이름을 붙여 친구처럼 지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은 결단을 하고 뗏목에 윌슨을 태우고 육지를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항해 도중 지쳐 잠든 사이에 윌슨이 파도에 떠내려갑니다. 그 윌슨을 건지려고 갖은 애를 쓰다 실패하자 그는 가족을 잃은 것처럼 슬퍼서 통곡합니다.

고독의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내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기 있는 스타는 불행의 가능성이 많습니다. 영혼의 가치를 우습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몰리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한 영혼을 우습게 알고 잉여 인간처럼 귀찮게 생각하면 그때 스타는 ‘스스로 타락한 자’가 됩니다. 사실 ‘내 주위에 사람이 많이 몰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게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타 목사님의 가장 큰 고민이 무엇입니까? 옛날보다 영혼을 가치를 가볍게 볼 가능성이 많다는 인간적 본능이 가장 큰 유혹이자 고민입니다. 그처럼 영혼의 가치를 가볍게 보는 상황에서 펼쳐지는 비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비전이 아니라 내 곁에 보다 많은 일벌들을 거느리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습니다. 참된 어우러짐의 행복은 하나님께서 내 곁으로 보내준 사람을 소중하게 볼 때 주어질 것입니다.

4 지속적인 주님과의 만남의 중요성 < 한번의 체험으로 성자가 되지 않습니다 >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이 장면이 부활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부활 후에 주님은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셨고(요 20:1),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눅 24:13-35). 우리는 흔히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들이 엠마오로 가려다가 예수님을 뵙고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서 11사도와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을 알현했다는 기록으로 보아(눅 24:33) 그들은 12제자에 속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모인 상황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처음 나타나셨을 때는 도마가 없는 상황에서 모든 제자들이 모였을 때였고(요 20:19-23), 그 일주일 후에는 도마를 포함한 다른 제자들이 있을 때 나타나셨습니다(요 20:26-29). 그 다음에 오늘 본문에 나타나셨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세 번 이상 나타나셨지만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만은 오늘 본문의 장면이 세 번째였습니다.

왜 주님께서 계속 나타나셨습니까?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성도에게는 주님과의 지속적인 만남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한번의 체험으로 성자가 되지 않습니다.

대도(大盜) 조세형 씨도 한때 주님을 만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도(大盜)가 주님을 만나 변화되었다고 1등 간증 강사가 되어 수많은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일본에 가서 좀도둑질을 하다가 잡혔다는 소식을 아침에 TV를 통해 듣고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아! 이건 현실이 아니야! 일본 경찰이 사람을 잘못 본 거야!” 그날 하루 종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 잡힌 사람이 조세형 씨가 아니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사실이었습니다.

폭력계의 대부라던 조양은 씨도 한때 주님을 만났을 것입니다. 그가 변화되어 출소했습니다. 그리고 여의도 순복음 교회 본당에서 조용기 목사님의 주례 하에 성대한 결혼식도 올렸습니다. 그 결혼식 장면을 뉴스에서 보고, 또한 그의 간증과 사랑 이야기를 신문과 잡지를 통해 보면서 저도 그 가정이 행복하게 살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도 얼마 후에 또 잡혀 들어갔습니다. 그 소식도 정말 믿고 싶지 않았지만 현실이었습니다.

그런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주님과의 만남은 한번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숙식을 함께 하며 3년간 제자훈련을 받았던 주님의 직계 제자들에게도 계속적인 만남이 필요해서 주님이 계속 나타나셨다면 우리와 같은 존재에게 주님과의 지속적인 만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 번째 나타나셨다고 했지만 주님은 계속 나타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만남이 없으면 어느새 또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인간의 연약함을 알고 우리를 계속 만나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부활의 증거와 족적만 확실하게 남기고 승천하신 후에 다시 성령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성령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은혜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한두 번 은혜 체험한 것이 다가 아닙니다. 어떤 분은 왕년에 한두 번 은혜 체험한 것을 가지고 몇 년 째 간증하러 다니는 분들도 있습니다. 성령님과의 교제를 중시하는 기독교에서 신앙은 항상 현재형이 되어야 합니다. 왕년 신앙은 허무한 것입니다.

왕년에 은혜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은혜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왕년에 충성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충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엄청난 소양강 댐도 6개월만 비가 오지 않으면 물 비상이 걸린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은혜의 비가 끊임없이 내리지 않으면 그 인생에는 위기가 찾아옵니다. 은혜는 계속 공급되어야 합니다. 왕년 타령을 해서도 안 되고 “이만하면 됐다!”고 해서도 안 됩니다.

< 벼는 피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성령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 사실을 아시고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를 찾아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찾아주셨습니다. 그 성령님을 만나고 이 시간에도 내 안에 잠재한 모든 패배의식을 물리치고 다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세상이 썩은 문제도 아니고 교회가 제 역할을 못하는 문제도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나의 패배의식이 문제이고, 내 믿음이 문제입니다.

외적인 모습이 연약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내 안의 중심만 확실하면 됩니다. 남의 성공을 지나치게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밭에 가면 잡초가 훨씬 더 잘 자라고 성공하는 것 같습니다. 논에 가도 벼보다 피가 더 잘 자랍니다. 사람들이 벼와 피를 어떻게 구분합니까? 대개 키가 크면 피라고 합니다. 외적인 성장이라는 한 가지 모습만 보고 벼가 피를 보고 실망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원래 부호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인처럼 풍요롭게 살라!”는 의미로 아들 이름도 프랜시스라고 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프랜시스는 장성해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사랑을 실천하며 아버지의 바램과는 달리 초라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그를 성자라고 불렀습니다. 반면에 당시의 교황이 누구인지, 당시의 최대 성당의 주임신부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누가 성공한 사람입니까?

외모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내가 잃은 것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내가 잃은 것은 천국 창고에 잘 보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리고 실패했어도 믿음만 잃지 않으면 때가 되어 잃어버린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신비한 모양으로 변신해서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대학원 논문을 통과하지 못해 너무 속이 상해 마음을 식히려고 옥상에 올라갔습니다. 너무 서러워서 눈물을 흘리는데 갑자기 멀리 보이는 북한산이 자기에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뭐가 그렇게 서러워! 나는 이렇게 수만 년을 서 있는데...” 그 한 마디 말에 그 청년은 용기를 얻어 “그래! 다시 해보자!”고 결심하고 일어섰다고 합니다.

우리는 패배의식에 젖어 살 일이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이 땅에 있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공장에서 만들어 이 땅에 떨어뜨린 상품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입니다. 테레사 수녀님도 하나님의 작품이지만 우리도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남과 비교하며 속상해할 일이 없습니다. 내 일만 묵묵히 하면 됩니다.

우리 같은 사람이 누가 또 있습니까? 목수의 눈에는 버릴 나무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주님의 눈에는 버릴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귀하게 보십니다. 우리에게는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빛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고,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지키고 있고,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품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못나게 보여도 부활하신 후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주님이 우리에게도 계속 찾아와 주실 것입니다.

오늘 예배 중에도 또 찾아와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못 자국난 손으로 서빙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조용히 눈물 흘리며 주님을 다시는 배반하지 않기로 작정했던 것처럼 이 시간에 우리를 찾아와주신 주님 앞에서 새롭게 다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이제 다시는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내게 주신 사명을 따라 용기 있게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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