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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신앙고백 (미 7: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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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인 목사 (광성교회)
 
오늘 미가서 7장 7절에서 13까지 있는 말씀 가지고 "나의 신앙고백"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본문 7절에 보게되면 "오직 나는" 이라는 말로 시작하여 미가 선지자가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8절에도 보게 되면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이라는 말로 시작하여 역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9절 하반절에 가서도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 "내가" 라는 주제를 밝히고 신앙고백을 하고 또 10절 하반절에 가서도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목도하리로다. 역시 미가 선지자가 자신의 신앙을 고백을 합니다.

본문을 보면 미가라고 하는 선지자가 신앙을 고백하는데 나는 이렇게 믿는다. 또 내가 이렇게 믿는다 해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고백을 해야 합니다. 남녀가 사랑하거나 부부지간에 사랑을 하거나 사랑할 적에는 마음으로만 끝내면 안됩니다. 내가 아내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데 고백하지 아니하면 모르지요. 아내가 알 도리가 없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면 사랑한다는 고백을 해야 되고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면 사랑의 고백을 자꾸 해야 됩니다. 말로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회사에 나간 남편에게 아무런 전화할 이유가 없습니다. 전화할 이유가 없을 적에는 전화할 거리를 만들어서 전화를 하고 마지막 끝에 가서 당신 사랑해요. 이 한마디만 하면 됩니다. 처음에는 쑥스럽습니다. 이 여자가 새삼스럽게 왜 이러나 라고 생각할겁니다. 그러나 전화할 때마다 그런 고백을 하면 좋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고백을 안 하면 마음이 이상해집니다. 그리고 사랑을 표정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도 마음으로 믿어서 구원을 얻습니다. 그렇지만 계속 고백을 해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말 저런말을 해도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고 하시면서 신앙고백을 권하셨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의 믿음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알면서도 믿음의 고백을 하라는 겁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할 때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셨습니까? 그리고 갈릴리 바다에서 부활하신 후에 실망 중에 고기잡이하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서 베드로야 네가 나 사랑하느냐? 주님이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십니까? 그러나 사랑의 고백을 하라는 겁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생활로 고백을 해야 합니다. 나는 내 생활로 이렇게 믿고 있다 하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신앙은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신앙고백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I. 앙망하는 신앙을 고백 (7- )

여러분 강아지를 길러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겨울철이 되면 군고구마를 잘 사다먹는데 냄새가 얼마나 좋은지 강아지가 졸졸 따라 다닙니다. 그리고 얼마나 먹고 싶어하는지 고구마를 뚫어지게 바라봅니다. 다 먹고 껍질 하나를 던져주면 꼬리를 흔들고 좋아합니다. 여러분 꼬리 흔드는 것은 좋다는 뜻이지 감사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좋아하는 것과 감사는 다릅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주면 좋아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 할 줄을 압니다. 강아지가 군고구마 껍데기를 바라보듯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본문 7절에서 미가 선지자는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거슬러 올라가서 5절 6절에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찌어다.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나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식구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절대 믿을 바가 못된다는 말씀 다음에 7절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라고 고백한 것은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만 앙망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사람을 믿지 말라는 겁니다. 사람을 믿었다 가는 낙심하고 실망합니다. 세상에 사람 믿다가는 저럴 수가 있나 하고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사람은 큰소리를 치고서도 사람이 능력이 없으면 도와주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믿었다가 낭패를 당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또 이기주의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이로워야 움직이고 내게 손해가 된다하면 전혀 못들은 척합니다. 교회에서도 "축원합니다." 우리교회에 오면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라고 무엇이 있는가하여 끌려들기도 합니다. 어떻게 내 교회에 와야만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가르칠 수 있습니까?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아닙니다. 나에게 오면 병고친다 혹은 여기 오면 복 받는다고 하는가 하면 손가락 두 개를 모아 앞으로 가리키면서 받아라 받아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이렇게 충성합시다. 또는 이렇게 삽시다. 그러면 반응이 없습니다. 전부가 다 이기주의 되어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삽시다. 고 하면 아멘을 안 하는 이유가 손해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전부가 다 이기주의가 되어서 그렇습니다. 또 사람은 변화 무상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는지 모릅니다. 사람을 믿었다가는 낙심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하시고 주시고 싶으면 못줄 것이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몽땅 다 주시고도 아쉬워 더 주고 싶어하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이기주의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금년이나 내년이나 영원까지 오직 믿을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는 것이 미가의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앙망하는 신앙입니다.

영국에 유명한 스펄전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가 청소년 때 큰 꿈을 도저히 이룰 것 같지 않아서 한때 몹시 방황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아들 딸들이 청소년때 방황을 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꾸준히 나갔는데 그날따라, 눈이 너무 많이 왔습니다. 그래서 한참 가다 길옆에 예배당이 있는데 조그마한 교회입니다. 교인들이 열명쯤 왔는데 얼마나 눈이 많이 왔는지 그 교회담임 목사님도 못나왔습니다. 예배 시간이 되었는데 어떻합니까? 교인들이 서로 의논하다가 집사 한 분을 떠밀어 강단으로 올려보냈습니다. 이 집사님이 예배를 인도하는 겁니다. 예배를 인도하며 찬송 부르고 기도하는 것까지 쉽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설교가 문제입니다. 이사야서 45장 22절 "땅 끝에 모든 백성들아 나를 앙망하라." 즉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라 그말입니다.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집사님의 설교는 복잡하지 않고 어렵지 않고 힘들지 않는 설교였습니다. 이 집사님이 겨우 애를 쓰면서 한 10분 동안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밑천이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집사가 준비도 없이 설교하러 나셨으니 무슨 밑천이 있겠습니까? 이 집사가 가만히 보니 한 열명쯤 교인이 앉았는데 처음 보는 청년 하나가 앞에 않았습니다. 머리를 수그리고 어깨가 축 늘어지고 기가 쭉 빠져 있었습니다. 낙심관, 절망관, 좌절, 이 몸에 배어 이었습니다. 그래 청년, 여기를 보십시오 라고 지목하여 불렀습니다. 젊은이는 수그리고 내 자신이 자신을 들여다봐야 낙심할 것 밖에 없습니다. 내가 나 드려다 보는 사람 치고 낙심 안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본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땅 끝에 모든 백성들아 나를 앙망하라. 고 하였는데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밑천이 필요 없습니다. 학력도 재산도 지워도 필요 없습니다.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낙심할 필요 없고 희망과 용기를 갖게됩니다. 라고 그 청년을 향해 직접적인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때 스펄전이 얼마나 큰 힘을 얻는지 모릅니다. 바로 그거다. 야 오늘 은혜 받았다. 자기가 어렸을 적부터 교회에 나가면서 지금까지 설교를 얼마나 많이 들었지만 오늘과 같은 은혜를 못 받았습니다. 그러나 집사의 설교를 통해 은혜, 받았고 굉장한 힘을 얻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신학을 마치고 목사가 되어 세계적인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인물을 내 놓으라 하면 스펄전을 내놓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사람을 보면 낙심하고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낙심할 것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바라다보십시오.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 바라보는데 공부 많이 한 사람만 바라보라는 것 아닙니다. 공부 못한 사람도 좋습니다. 부자만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벼슬 높은 사람만 바라보라는 것도 아닙니다. 벼슬 없는 사람도 바라보면 됩니다. 보는데는 밑천 안 들고 힘 안 듭니다. 오직 여호와만 바라보고 앙망하는 신앙 이 순수한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지어 다시 일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여러분들의 문제를 다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II. 재기하는 신앙을 고백 (8-9)

엎드러졌지만 다시 일어나는 하는 이 재기하는 신앙은 오뚝이신앙입니다. 신앙은 다릅니다. 신념은 믿지 않는 사람도 얼마든지 가지는 것이 신념입니다. 신념은 "나는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소리는 박정희 대통령이 제일 좋아했습니다. 의지가 강한 사람일수록 신념도 강합니다. 믿는 사람의 신앙은 신념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은 내가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이일은 내가 도저히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하시면 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라는 말이 꼭 들어가는 겁니다. 신념은 "하나님"이 빠지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재기하는 신앙이 무엇입니까? 나는 거꾸러졌고 나는 병들었고 나는 망했을지라도 하나님이 일으켜주시니 다시 일어난다. 혹은 일곱 번 넘어졌을지라도 하나님이 일으켜 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것이 참 귀한 재기하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조금 어려운 일을 당하면 주저앉고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8절 9절에 보게되면 "나의 대적이여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라고 하였는데 사업이 망했는지 혹은 병석에 중한 병으로 누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잘되는 것을 그렇게 배아파하던 이 원수, 대적이 그렇게 기뻐합니다. 이때 미가는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라고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데 앉을 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 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 하사 신원 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이 의를 보리로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하면 미가라고 하는 사람은 분명히 망했던 사람입니다. 큰 중병에 걸려서 누워 일어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미가가 잘되는 것을 배아파하던 원수들이 박수치고 있는 겁니다. 그때 미가가 망했지만, 쓰러지고 엎드러졌지만 너 기뻐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실수를 했고 내가 죄를 지어서 하나님이 나에게 징계하시므로 망했고 엎드러졌을지라도 하나님의 노여움이 풀리는 날 하나님이 분명히 다시 일으켜 준다. 하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광명한 세계로 인도해 주고 광명한 세계로 인도해 주신 결과 내가 하나님의 의를 보게 되겠다는 확신을 필역하였습니다. 우리도 망하는 것 같아도 절대 망하지 않고. 거꾸러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다시 일으켜주시니 나는 일어난다는 이 재기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신학교 졸업하기 전에 부산에 가서 전도사로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부흥회에 왔던 이용남 목사님이 계시는 영등포 영은 교회 부흥회에 갔을 때 귀한 분을 만났습니다. 신학교 졸업 전에 내가 전도사로 나갔으니까 어린 전도사였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밑에서 약 2년 있다가 목사님이 다른 교회 가시고 새로운 목사님이 오시기까지 1년 동안을 신학교도 졸업 안한 전도사가 교회를 이끌고 가는 겁니다. 교인가정에 심방 가기만 하면 너무 너무 칭찬하는 집사 한 분이 계셨었는데 이름은 김생금 집사님입니다. 언젠가 토요일 오후에 낮선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그랬더니 서울서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누구냐 그랬더니 자기가 김생금 집사라고 합니다. 집사님이 너무 너무 보고 싶었던 참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다가 내일 주일 내가 이 교회에서 예배하고 서울로 올라갈텐데 전도사님이 설교하시고 설교 끝난 다음에 잠깐 말할 시간을 좀 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신학교도 졸업 못했으니까 설교를 주일날 낮시간, 저녁시간, 수요일 날 새벽 시간까지 다 하려니까 밑천이 떨어져 궁색한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설교 끝난 다음에 할 것 없이 설교까지 다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설교는 전도사님이 하시고 나에게 시간을 약간만 주시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 집사님이 오셨다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 다음 주일날 안나오던 사람까지 다 나왔습니다. 교회당이 꽉 차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분이 나와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 강단에 놓습니다. 저 양반 서울가서 돈을 굉장이 벌어 한밑천 갖다 헌금하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는 말이 여러분이 나를 천사처럼 칭찬해 줄 때 그 소식이 전부 나에게 들려 왔습니다. 그 칭찬이 들려온다는 겁니다. 들려올 그때마다 내 양심은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듯이 아팠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이 예배당 지을 때 건축위원회 회계를 맡았습니다. 교인들이 건축헌금 작정하고 내기를 시작하는데 건축을 시작 안 하니까 많은 돈이 저축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건축이 시작되어 예배당을 잘 지어 가면서 계속 건축 헌금이 들어왔습니다. 그때 나는 직조업을 하였는데 수표가 돌아오지만 막을 수 없어서 부도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때 건축 헌금으로 잠깐동안 부도를 막고 곧 갚으면 되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건축 헌금으로 부도를 막았습니다. 그러나 사업은 여전히 여의치 아니했습니다. 결국 건축자재를 구입할 때 작난을 하여 장부상 전혀 하자가 없도록 처리하였습니다. 감쪽같이 처리하였고 건축은 끝났는지라 교회에서는 수고했다고 양복 한 벌과 감사패까지 받았습니다. 결국 그직 조사업은 망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서울에 올라와서 약방을 차려 돈을 많이 벌었는데 양심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그때 횡령했던 돈의 10배를 가지고 왔으니 용서하시고 받아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라고 목이 메어 찬송을 부를 때 온 교인들도 함께 부르며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진짜 집사였습니다. 온 교인들이 더욱 우러러 보게 되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엎드러졌을 때 다시 일어났습니다. 즉 재기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헤어지고 소식을 전혀 몰랐다 영은교회에 가서 다시 만났는데 장로가 됐습니다. 요즘 뭘 하십니까 했더니 전국적인 규모를 가지고 사업을 하는데 크게 성공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믿음도 재기하였고 사업도 재기하였습니다. 며칠 전에 세상 떠났습니다. 너무 존경스러운 분이기에 여기에 소개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분명히 미가 선지자도 하나님 앞에 뭔가 잘못하고 실수해서 매를 맞고 진노를 당했지만 하나님의 노여움이 풀리는 날 다시 일어난 것처럼 아까 말한 그 집사님이 아차하는 실수로 그가 망했고 거꾸러지고 엎드러졌지만 믿음이 다시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날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셨습니다. 재기하는 신앙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 5장 15절에 보게 되면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라고 하였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할 일입니다. 일으키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해도 일으켜 주시는 주님과 함께 재기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III. 목도하는 신앙을 고백

체험적인 신앙입니다. 10절부터 13절까지 읽겠습니다. "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에 진흙 같이 밟히려니 그것을 내가 묵도하리로다. 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 날에는 지경이 넓혀 질 것이라 그 날에는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 까지 애굽에서 하수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 그 땅은 그 거민의 행위의 열매로 인하여 황무하리라." 미가 선지자는 분명코 내가 꺼꾸러졌고 내가 병들었고 내가 누웠고 내가 망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노여움이 풀리는 날 즉 하나님이 붙들어 일으켜 주시는 그 날에 나의 망한 것 그렇게 손뼉치고 기뻐하던 대적들을 하나님이 진흙 깔아뭉개듯이 밟아 뭉개 버리는 것을 분명히 묵도하리라고 미가는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내가 성을 쌓고 장막을 치는 날 확장되어 이 강에서 저 강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한없이 번영해 나가리라고 확신을 가집니다. 우리가 성경공부를 열심히 한후에 훈련에 참여해야 합니다. 성경 공부만 하고 봉사하지 아니하거나 교회가 시행하는 훈련에 참여하지 아니하면 머리만 커지고 말만 많아집니다. 성경은 배우라는 책이 아니라 그대로 살아가라는 책입니다. 말씀을 그대로 살아갈 때 성경에 약속된 온갖 하나님의 축복이 생활 속에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때 비로소 하나님의 축복을 목도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체험적인 신앙이 됩니다. 이론적인 신앙, 사색적인 신앙은 아무데도 쓸데없는 쭉정이 일뿐입니다. "성경을 배우고 그대로 살았더니 되더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발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은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졌습니다. (눅5:5-6) 베드로는 주님의 축복을 이처럼 목도했습니다. 말씀대로 살았더니 잘 되더라는 간증이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분명히 목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도하는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크신 일을 목도하고 고백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끝을 맺습니다. 사랑은 고백하는 성질을 가졌습니다. 고백되지 않는 사랑은 죽은 사랑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신앙은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미가 선지자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앙망하는 신앙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재기 하는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신자라도 엎드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일으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시면 어떠한 절망가운데서도 재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는 목도하는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체험적인 신앙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생활 속에서 열매맺는 체험적인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미가의 신앙고백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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