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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름수련회-1] 참되게 :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 (행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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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재 목사 (빛과소금의교회)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심으로써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셨고<마4:17> 그리고 마지막 승천하시기 전까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행1:3>. 즉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주제이며 예수님의 사역의 비전(vision)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도 자신이 평생을 달려온 사역의 초점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행20:25>.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사도들, 그 이후의 교회가 증거한 핵심 내용, 사상, 비전의 총체적 표현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에 이미 도래하였고 현재 오늘도 이루어져가고 있으며 그리고 장차 미래에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는 주님(Lord)의 모습으로 이 땅에 임하셨음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임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실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침례 요한의 멧세지가 “회개하라 천국(=하나님의 나라)이 가까웠느니라”<마3:2>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무슨 권능으로 이런 놀라운 일을 하느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12:28>.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주님으로서 그 주권(Lordship)을 선포하시고 행사하심으로부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눅17:20,21>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다른 번역에서는 ‘가운데’)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마음 안에 있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문맥을 잘 살펴 보면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대답을 해 주시는 대상은 바리새인들이고(바리새인들 마음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말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지요?) 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물은 질문이 “어느 때에” 시제를 묻는 질문이었음을 바로 보면,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의 나라는 물리적이고 가시적이고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지금도 이루어져 가고 있다는 대답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오늘도 계속되는 진행형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의 많은 구절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미래형으로 가르쳐 줍니다<마25:34>.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에 완성될 나라라는 뜻입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주님으로서 이 땅에 그 주권을 선포하시고 행하심으로 도래하였고 오늘도 계속해서 확장되어 가고 있으며 그리고 마침내 장차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합니다. 쉽게 이해하면, 예수님께서 겨자씨 비유에서 가르쳐 주었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을 향하여 점점 더 성장해 가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냥 성장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가루 서말의 누룩 비유에서 가르쳐 주었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변화를 통해서 성장해 가는 나라입니다. 사단이 다스리는 영역에 예수님의 통치를 실현시킴으로써, 죽음을 생명으로, 미움을 사랑으로, 혼돈을 질서로, 거짓을 진실로, 왜곡된 것을 정직으로.. 변혁시켜서 성장해 갑니다.
이 특성을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주의 복음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하심이라 하였더라”<누가복음 4장 18,19절>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마다 변혁, 혁명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더 못살게 되고, 악화되고, 망가지는 쇠락이 아니라 치유가 되고, 회복이 되고, 살아나게 되는 생명으로의 변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난 주에 전두환씨의 아들, 전재용씨에 대하여 징역 2년 6개월에 괴자금에 대한 추징금 73억을 재판부에서 선고했습니다. 전두환씨 일가, 부당하게, 거짓으로 대통령 해 먹고 엄청나게 축재한 것에 대하여, 세상이 바뀌어 나라에서 환수하려고 하자, 이 사람들이 순순히 내 놓습니까? 아니지요? 다 숨켜 놓고 빼돌리고 해 놓고 “내 재산 29만원 밖에 없습니다!” 뻔뻔스럽게 말하지요?
사람도 그러하거늘,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어서 변혁을 일으켜서 하나님의 나라의 영역을 넓히려고 하면, 그전까지 소유를 주장하고 있던 사단의 세력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절대로 가만히 안 있습니다. 아주 발악을 해서 안 뺏기려고 합니다.
저 옛날의 출애굽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를 세우려고 하는 하나님의 손 앞에서,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순순히 놓아주었습니까? 죽어라 안놓아 주지요? 놓아 주고 나서도 다시 빼앗아 오려고 난리를 치지요?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영적 전투”의 현장입니다. 사람들의 심령을 인도해오려는 성령님의 역사와 안 빼앗기고 계속해서 인간을 자신의 노예로 부리고 싶어하는 사단의 발악 사이의 영적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전장터입니다.
인간 세상의 역사가 무엇입니까? 역사(history)는 그의 이야기(His Story)라고 하듯이,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공인 이야기입니다. 인간 역사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라는 분명한 시작과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라는 명확한 끝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지금의 역사는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치열한 영적 전투의 장입니다.
마치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하고 이제 승패가 판가름난 남은 전투를 치루어야 하는 것처럼, 지금은 머리가 상하여 패배가 결정된 사단의 권세를 몰아내는, 남은 영적 전투를 치루는 때입니다.
패배가 결정된 것을 안 이후, 몇몇 독일군들은 더욱 발악을 하며 거세게 저항했듯이, 십자가에서 결정타를 맞고 회복될 수 없게 머리가 상하여, 패배를 아는 사단의 저항은 최후의 발악을 하는지라, 사실 어느 때보다 더욱 거셉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승패가 결판난 싸움입니다. 최후의 발악을 몸부림치며 하고 있지만, 그러나 가루 서말에 누룩 퍼지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마침내 완성됩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 안 놓아주려고 별 꼼수를 다 부리고 난리를 치고 발악을 하였지만, 그러나 놓아 줄 수 밖에 없었듯이, 사단이 꼬리를 흔들며 난리를 쳐도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진리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혹은 문이)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지금까지 드린 이야기, 몇 가지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했고 오늘도 꿈틀거리며 자라가고 있으며 마침내 완성됩니다. 둘째로, 세상은 왕위 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전장이고 역사는 영적 전투 중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 사이에 “누가 왕이냐”를 놓고 치열한 전투 중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이란, 예수님께서 초림(初臨)하심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오늘도 점점 더 실현되어 가고 있으며 마침내 미래의 어느 날에 완성됨을 바라보는 눈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오늘날 성령 하나님이 바톤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 가운데 역사하셔서 점점 더 가루 서말에 누룩 퍼지듯이, 실현되어 갑니다. 성령의 권능으로써 변화시켜 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세상에서도 이 성령님이 일하심을 바라보며 그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기를 기대하며 소망으로 품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딱 두 부류로 갈라 놓습니다. 예수님의 주님되심 앞에 무릎꿇고 예수님의 주권(lordship)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거절하는 사람으로 갈라 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날에, 마치 어부가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구분하듯이, 농부가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듯이, 모든 사람은 영생이냐 불못의 사망이냐로 그 운명이 구분됩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한 이후, 인간은 원래 다 가라지같은 존재였으며, 성긴 가루같은 존재였으며, 마귀와 함께 지옥의 불못에 들어갈 운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의 실상,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이전에, 마귀의 수하에서 살던 때의 실상이 어떠한 지 에베소서 2장이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2:1-3>
옛 사람, 마귀의 나라에 소속되어 마귀편에 속한 사람의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 세상 풍속을 좇고” 세상의 흐름, 유행, 사조를 따라갑니다.
둘째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릅니다. 사실은 아무 것도 없는데, 있는 척, 아는 척, 잘난 척하기를 좋아하는 마귀를 모방합니다. 허상을 좇아 사는 것이지요? 구체적으로 이런 모습입니다. 욕망이 충족되면 행복할 줄 생각하는 것이 허상입니다. 소유가 많아지면 만족할 줄 생각하는 것이 허상입니다. 자아실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면 의미있는 삶이 되는 줄 생각하는 것이 허상입니다. 그래서 허상을 좇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있어 보이려고” 하고 “내 뜻대로 관철하려고 하고” 그러지요?
셋째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에 따라 살아갑니다.

이런 인간들에게 무엇이 선포됩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충만하게 완성시키시는 성령님께서 이런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결국은 끔찍이 망하고야 마는 사단의 나라로부터 돌아오라고,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 편에서 생명을 누리도록 성령께서 복음으로 초청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얼마나 실력이 있느냐, 재주가 많으냐, 돈이 많으냐, 권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당신이 성령님의 이 초청에 어떻게 반응하여 누구의 편에 서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더 이상 당신이 맹하니 아무 생각없이 욕망과 기분내키는대로 살면서 마귀의 종노릇하지 말라고 성령께서 당신을 부르십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은혜와 능력을 누리며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보람있게, 힘있게 살도록 부르십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입니다.
<마20장>에 의하면, 장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주인이 포도원의 일군으로 부르시는 비유가 나옵니다. 쉽게 이해한다면, 장터는 세상이고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장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소망도 없이 그저 쾌락에 좋은대로, 욕망에 좋은대로 인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포도원의 일군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군으로서의 인생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초청하시는 핵심이 이것입니다. 무의미하게, 공허하게, 멸망해가는 세상에서 빈둥거리며 인생 낭비하지 말고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고 하나님의 상급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어라는 것입니다.

저희가 오늘 주제가 “참되게” 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의 실상이 이러하다면,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되게 사는 것입니까? 오늘의 역사가 영적 전투를 거쳐서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으로 귀결된다면, 그 때에 성령의 초청을 거부하고 마귀 편에 섰던 영혼들은 마귀와 함께 불과 유황이 타는 지옥 불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일군으로 살아온 백성들은 예수님과 함께 왕노릇하는 데,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이 정말 참되게 사는 것입니까?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며 육체의 욕심에 따라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 참된 삶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일군으로서 성령님을 좇아, 성령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수고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참된 삶입니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참된 삶입니까?
세상에 사람들은 정말 다양하게 살아갑니다. 직업도, 삶의 환경도, 기질도, 습관도 참 다양하게 살아갑니다. 어떤 모양으로 살아가든 그러나 인간이 참되게 사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과연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입니다.
구멍이 나서 침몰해가고 있는 배에 남아서 사랑노래 부르고 있으면, 돈주머니 웅켜 쥐고 있으면, 권력 다툼을 하고 있으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인간과 세상의 실상이 이러하거늘, 인간이 참되게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의 일군으로 드려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종을 울립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전4:1,2>
오늘 주제가 “참되게” 인데, 예수님을 믿는 것의 진실, 참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예수님을 참되게 믿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참되게 믿는 것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하여, “이런 것이 아닙니다”라고 깨우칠 수 있는, 성경의 두 가지 장면을 먼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는, <눅12:13-15>입니다. “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
어느 형제가 있었는데, 형이 좀 못되어서 아버지 유업을 독차지하였습니다. 그러면 동생 처지에서는 정말 억울하지요? 그래서 동생이 예수님은 인자하시고 사랑이 많을 것이라 여기고 예수님 앞에 나아옵니다. 그리고 아주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청탁을 하지요? “예수 선생님, 제가 좀 억울합니다. 우리 형에게 한번 말씀해 주셔서 유업을 나누게 해 주십시오.”
그 때에 사랑의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성경 그대로 읽어 드리면,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고 대답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은 인간의 사업 잘 되게 해 주고, 시험에 떡떡 붙게 해주고, 가정 화목하게 해 주고 이런 필요 채워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예수님을 나의 소소한 문제의 해결사로 여기는 소위 기복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는 기복주의 물질주의 종교가 아닙니다.

또 하나는 이전에도 제가 여러번 말씀드렸던 이야기입니다. <마3장>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선포하던 침례 요한이 회개한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침례 요한이 침례를 줄 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침례 받고자 나아옵니다. 그러자 침례 요한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였습니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회개할 생각은 안하고 심판만 피해 보겠다는 지독히도 이기적인, 잇속에 빠르고 밝은 정말 나쁜 놈들아!” 하는 것이지요?
안타깝게도, 아니 두려움을 느끼게도 오늘날 한국의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이 침례 요한의 독설에 해당되는지 모릅니다. 구원받았다고 하지요? 난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죽으면 천국간다고 확신하고 있지요?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동기가 죄를 깨닫고 회개해서가 아니라,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하여, 천국의 보장을 받으려고 예수님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사람들보다 더 이기적인 사람들이 있습니까? 이 땅에 살면서도 자기 안전, 자기 성공, 자기 명예에 목매어 살다가 아무런 회개없이, 천국에 가서도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약삭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 이 사람들보다 더 이기적인 사람들이 있습니까? 이들은 천국행 티켓을 예약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요일마다 교회에 오긴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의 마음은 자신에게로 집중되어 있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생활을 기복의 도구로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우선적으로 목사들 탓입니다. 교회 성장이 우선되어 회개의 복음을 정직히 증거하기보다는 목사가 먹고 살기 위하여 혹은 큰 교회 목사가 되어 성공한 목사로 인정ㅂ다고 싶어서 사람 붙들어 두는 것이 우선이 된, 그래서 ‘사탕발린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전도자들이 회개하라고 선포하지 않고 구원받으십시오 라고 선포해서 이 지경이 된 것입니다.
암튼 예수님을 참되게 믿는 것은 심판을 피하기 위한, 내세에 대한 보장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세속에 물든 기복종교, 미신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예수님을 참되게 믿는 것입니까? 눈을 크게 뜨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 주시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올인(all-in)하셨습니다. 또 우리에게 올인을 요구하시고 그리고 당신의 능력과 임재의 올인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잘 아는 말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아, 내가 한 달을 새벽기도 열심히 했으니까, 예수님이 돈을 3배는 더 벌게 해 주시겠지.” 이런 것이 아닙니다.
“네 인생을 올인해라, 나는 나의 능력을 올인해서 너의 인생을 책임져 주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일부분 더 받도록 조금만 더 나를 위해 열심을 내봐라” 이런 약속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쫀쫀한 분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약속해 주셨지요?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네가 마귀의 하수인 하는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라,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를 충만하게 완성케 하는 성령님께 네 인생을 올인하여 따르라 네가 내 능력과 생명과 사랑을 올인하여 너를 책임져 주겠다” 이렇게 초청하십니다.
이 진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비유에서는 이렇게 표현되었습니다.  <마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의 인생의 모든 것을 올인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말씀이며 또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올인한 사람이 누린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예수님을 참되게 믿는 것입니까? 이 하나님의 나라의 초청에 응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을 주님, 나의 왕으로 모시고 예수님을 따르며 사는 삶입니다. 어중간하게 머뭇거리며 마귀의 하수인하던 삶에서 돌이켜서 천국의 백성으로서 분명한 응답을 드리는 것이 예수님을 참되게 믿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으로서 “참되게” 살 수 있습니까?  먼저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무슨 유명한 사람이 되고, 재벌 할아버지가 되고, 인기 짱인 탤렌트가 되었어도 마귀 편에 서 있다면, 당신의 운명은 볼 짱 다 본 것입니다. 평생 속아 산 것이 되는 것이지요?
이 세대가 영적인 전투의 세대인 것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됨을 기억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답게 사십시오. 이것이 인생을 참되게 사는 길입니다.
무엇을 하든, 어떤 직업을 갖든, 어디서 살든, 가난하게 살든 부유하게 살든,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십시오. 이것이 인생을 참되게 사는 길입니다.

참된 삶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첫째로, 회개하십시오. 울고 불고 난리를 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생각을 고치라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지독히도 이기적인 마음과 삶을 돌이키십시오. 더 이상 이 세상 풍속을 좇지 않기를, 더 이상 허상, 뽀다구에 연연하지 않기를 그리고 더 이상 기분과 욕망에 따라 살지 않기를 결단하십시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침례 요한과 예수님의 선포에 정직히 응답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한 사람들을 위한 나라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십시오. 지난 6월달에 저희가 예배 폐회 찬송으로 불렀던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주님 나라 임하시네 그의 날은 멀지 않았네 너는 일어나 주 위해 서라 하나님 널 부르시네 세상은 아직 어둠 속에 빛 되신 주 보기 원하네 너는 일어나 주를 따르라 주님의 영광 네게 임했네 일어나 주 위해 서라 강한 용사여 주님이 너와 너와 함께 하시네 주께서 다시 오실길 그 길 예비하라 영광의 주님 만왕의 왕 곧 오시리”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눅9:62> 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당신의 마음, 중심을 다스리시는 주인이냐입니다. 당신의 마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로 주인이십니까? 여전히 당신 자신이 주인이십니까? 
예수님을 진정으로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을 제일 존귀히 여깁니다. 예수님을 제일 존귀히 여기는 사람은 그의 삶의 우선순위에서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우선순위란, 시간과 돈과 같은 나의 자원을 어디에 우선적으로 사용하느냐는 가치관 및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배우고 섬기는 시간을 우선적으로 중요하게 여깁니다. 나의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헌금에 분명한 우선순위를 둡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에게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한국에서 일요일이면 예배당에 나오는 수많은 교인들이,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의 보호의 은혜도, 인도하시는 아름다운 추억도 못 누리는 제일 큰 이유는,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주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우선순위가 명확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으며 여전히 그때그때의 기분과 나의 변명과 나의 의,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부르심에 명확히 응답하십시오.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의 약속에 당신의 인생을 걸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그분을 따르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인생을 참되게 사는 길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참된 삶을 위하여 성령을 좇아 의와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의 속성을 대표적으로 증거해 주는 말씀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뷔페를 먹으나 라면을 먹으나 생활에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먹으면 감사한 것입니다. 잘 먹고 잘 마시는 것에 목숨 거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 없습니다. 꼭 더운 밥을 먹어야 하고, 밥 먹을 때마다 국을 꼭 먹어야 하고 잘 차려진 밥을 먹고 마시는 것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 그 사람은 자기 배가 신(神)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제일의 속성은 성령 안에서 의(義)를 이루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올바름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충만한 완성을 위하여 일하시는 성령님을 좇아서 나의 삶에 관계된 모든 영역에서 의, 정직을 추구, 실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을 좇아 내 삶에 관계된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의 도를 실천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 더, <골1:13>은 하나님의 나라를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속성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는 사랑의 계명이 제일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이 사랑이라는 말에는 두말의 여지가 없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던 것,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시고 그리스도되심을 선포하고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모든 일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워졌습니다.
당연히, 오늘까지 인간의 역사에 하나님의 나라가 증거되고 실현되어 온 것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되신 예수님을 본받아서 드려지는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제자들, 교부들, ‘우리 인간은 존재하는 곳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곳에서 산다’고 했던 성 어거스틴,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평화를’ 기도했던 성 프랜시스, 정의의 개혁을 부르짖었던 마틴 루터까지도... 하나님의 나라에 충성했던 백성들은 한결같이 사랑이 특징지워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도스도예프스키의 마지막 작품인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표도르 까라마조프가의 네 아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입니다.  큰 아들 드미트리, 둘째 아들 이반, 셋째 아들 알료사, 넷째 아들 스메르자코프.
각각 개성이 다른 모습을 통해서 인간성을 파헤친 소설이지만, 정작 도스도예프스키가 그의 마지막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알료사의 스승인 조시마 장로의 가르침 속에 나타납니다. 알료사의 일생을 형성케 했던 조시마 장로의 가르침, 이것입니다.
“세계를 개조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먼저 새로워져야 한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형제처럼 느끼기 전에는 세계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을 입어 사랑의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며,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배우고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을 드려가는 삶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사랑은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배워야 하는 마음, 배워야 하는 삶입니다. 제일 소중한 것일수록 유사품이 많듯이, 우리는 오늘 오염된 사랑 타령의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하셨지만,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다 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다른 사람의 궁극적 문제를 해결해 주는, 다른 사람의 실재적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하여 당신의 한 알의 밀알이 되신 희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공동체 생활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큰 뜻은 사랑하는 마음, 사랑하는 삶을 배우며 키우며 드리며 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며 살기를 배워갑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삶을 배워갈 때에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실현시켜 가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의 의와 사랑의 삶을 통하여 선포되어지고 실현되어집니다.

20세기 세상의 사람들에게 제일 큰 영향을 미쳤던, 칼 막스, 이 사람에게는 이상세계(Utopia)의 꿈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칼 막스 뿐만이 아니라 초기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마음에는 유토피아의 꿈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계급이 없는 세상, 빈부차가 없는 세상, 모든 사람이 동무라 불리우는 평등한 세상, 굶어 죽는 사람이 없는 세상,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받아 죽는 억울한 사람이 없는 세상, 다같이 일하고 다같이 먹고 다같이 즐겁고 다같이 기쁜 세상, 그들은 꿈꾸었습니다.
이 공산주의 운동의 포고라 할 수 있는 공산당 선언(Communist Menifesto) 맨 마지막에 칼 막스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싸워 쟁취할 세계가 있습니다.”
싸워서라도 쟁취해야 한다는 잘못된 방법론이 엄청난 실패와 처참한 비극들을 낳았지만, 그들이 비전의 사람이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유토피아에 대한 그들의 도전은 인간의 마음에 아직도 남아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동경의 표현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의 도전과 실패를 거울삼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은 남은 일생을 어떻게 살고 싶습니까?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참되게 살고 싶은 열망이 지금도 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련한 추억처럼 뒤안길에 감추어 두었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신앙인이 되고 싶습니까? 세상 풍속,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르는 허구, 육신의 욕망을 좇는 동물적 인간의 삶을 따르시겠습니까? 여전히 내 즐거움, 내 쾌락, 내 만족과 내 가족의 안녕과 평안만을 위한 이기의 삶을 살며 그 기복의 수단으로서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당신을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일군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해 보십시오. 나만을 위하여 살았던 자기중심적 생각, 자기중심적 생활에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그 분을 따르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에 올인해 보십시오. 이제는 성령께서 당신의 마음과 삶을 인도해 주시도록 의탁하고,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사랑과 의의 삶을 드리기를 헌신해 보십시오.
그 날에 당신의 마음, 중심의 심령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그 날에 겨자씨 한 알이 큰 나무가 되게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당신의 마음 속에서 꿈틀거리며 경험됩니다. 그 날로부터 당신의 삶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사망과 거짓과 술수와 폭력이 사라지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사랑과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쳐나는 아름다운 물결이 흘러납니다. 이것이 인간으로서 참되게 사는 삶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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