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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 4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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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장빈 목사 (동광교회)

어제가 오늘부터 가을이란 뜻의 '입추'(立秋)였지요. 아직 여름의 끝자락 열기가 남아 있긴 하지만, 이미 우리 가슴에선 가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가을이군요. 여러분, 이 가을엔, 우리 주님을 더욱 깊이 만나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이 가을엔 사랑하는 사람을 깊이 만나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여 이 가을엔, 오히려 찬송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럼, 여름과 가을이 만나는 길목에서, 우리 먼저 인사 나누고 갈까요?

<이 가을엔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최근에 마음이 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너무나 마음이 상한 나머지 상처 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눈물로 밤을 지새워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때 왜 마음이 상하셨습니까? 무엇이 나의 마음에 그토록 큰 상처를 남겼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상하는 경우는, 대개 무언가를 잃었을 때입니다. 큰 돈을 잃었을 경우, 애견을 잃었을 경우, 혹은 사랑하는 당신을 잃었을 경우, 우리의 마음엔 큰 상처가 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잃어버린다는 것, 실로 마음이 상하는 일입니다.

마음이 상함, 곧 상심은 이내 슬픔으로 이어집니다. 몸의 상처에선 피가 나지만, 마음의 상처에선 눈물이 납니다. 해서 눈물과 피, 피와 눈물은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상처 난 마음에선 눈물이 넘쳐흐릅니다. 그렇게 흐르는 눈물과 함께 상처 난 마음엔 슬픔만이 가득합니다. 상심은 슬픔으로 이어집니다.

어느 철학자는 "인간의 가장 큰 슬픔은, 행복했던 때를 기억하는 슬픔”이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제 잃은 것을 기억하는 오늘은 슬픔의 날입니다. 행복했던 그 때를 그리워하는 오늘은 눈물의 날입니다. 내가 느끼는 가장 큰 슬픔, 빼앗긴 행복을 기억하며 느끼는 슬픔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시편의 기자 역시 아름다웠던 지난날을 기억하며 슬퍼하고 있습니다. 4절의 맨 마지막 문장이지요,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지난날을 기억하니 마음이 상하는데, 3절의 마지막이지요, 얼마나 상심이 큰지, 상처 난 마음에서 흐르는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될 정도라 합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도대체 무엇을 잃고 그렇게도 상심하고 있는 걸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눈물로 음식을 삼게 하는가? 그의 탄식을 직접 들어봅니다. / 42:4 / (읽기) / 그랬습니다. 시편의 기자가 잃어버린 것은, 하나님의 집에서 누리던 영적 기쁨과 찬송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올라가 예배하며 누리던 영적 행복을 빼앗겼던 것입니다. 해서 지금 그 날을 기억하며 슬퍼하고 있는 중입니다.

마음의 상처는 또한 낙망과 불안을 불러옵니다. 상한 마음처럼 낙망과 불안이 들어앉기에 좋은 마음도 없습니다. 5절에 보니, 지금 시인의 영혼이 낙망하여 불안에 떨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소중한 것을 잃은 것만 해도 속상한데, 마음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낙망 가운데 불안해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시편 42편은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에서 도망쳐 나와 이곳저곳을 유랑할 때의 서글픈 심정을 적어 놓은 시로, 나중에 고라 자손에게 주어 성전에서 부르게 한 시편이라 전해집니다. 해서 성경은 이 시편의 제목을 고라 자손의 마스길, 곧 교훈시라 붙여 놓았던 것입니다. 고라 자손을 통하여 전해진 다윗의 시편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3절의 내용이 더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는군요. / 42:3 / (읽기) / 아들에게 쫓겨난 다윗, 어딜 가나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되고 맙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너 하나님한테 버림 받았구나!> <아니, 당신이 믿은 하나님이 진짜 있기는 한 거냐?> 조롱하는 사람들의 비웃음 소리에 시인 다윗의 억장이 무너집니다. 그런데 6절에 보니, 다윗이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한다고 하는군요. 우리 식으로 하자면, 한양에서 쫓겨난 왕이 함경북도 청진이나 북청 동네에 숨어 지내는 형국입니다.

피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다윗,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들과 함께 하나님의 집에 올라 예배하던 날을 기억합니다. 주의 백성들과 함께 아버지 집에서 찬송하던 그 날을 그리워합니다. 하지만 그리움이 커지면 커질수록 현실은 더욱 실망스럽고, 마음은 더욱 불안하기만 합니다. 더 이상 기대고 바랄 것 없는 상황에서,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다윗은 그렇게 탄식에 탄식만을 거듭했던 것입니다.

계속되는 그의 탄식을 들어봅니다. / 42:7 / (읽기) / 폭포 소리, 깊은 바다, 파도와 물결, 대적들의 위협을 묘사하는 상징적 표현인데요, 이 모든 것이 나를 덮쳐 내 존재 자체가 엄몰하고 있다고 절규합니다. 여기 엄몰한다는 말, 침몰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큰 파도에 휩쓸려 저 깊은 바다 속으로 자꾸만 침몰해 들어가는 다윗, 결국 깊은 바다 속에서 숨이 막힌 다윗,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내뱉고 맙니다. / 42:9-10 / (읽기) / 한 때 하나님의 총애를 받았던 다윗, 그가 하나님을 향해,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냐고 부르짖어 탄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까지 탄식하며 원망하던 다윗, 어느 순간 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요, 그의 영혼 깊은 데서부터 새 노래가 울려 퍼지자, 놀랍게도 그의 몸이 바다 위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상심의 자리, 낙망의 자리, 불안의 자리에서 울려 퍼진 희망의 노래, 역시 다윗이란 탄성이 절로 나는 노래, 일단 다윗의 새 노래를 들어보겠습니다. / 42:5/ (읽기) / 그런데 놀랍게도 이 노래는 11절과 43장 5절에서 똑같이 반복됩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습니다. 왜? 그만큼 중요한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여기 새 노래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 시인이 말을 건네는 상대가 바로 나라는 점입니다. 6절에 보니 내 속에 있는 내 영혼을 불러냅니다. 나와 내 속의 또 다른 내가 힘을 합하여 이 위기를 돌파해 내자는 제안이기도 하며, 그렇게 하겠노라 다짐하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자꾸 다른 사람을 쳐다보려고 합니다. 위기 앞에서 먼저 다른 사람을 탓하려고 합니다. 아니오, 그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아닙니다. 문제의 원인이 어디 있든 그 문제는 나의 문제요, 해서 문제를 풀어야 하는 당사자도 바로 나 자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내 안의 내가 변해야 당신이 변합니다. 내 속의 내 영혼이 새로워져야 세상도 새로워집니다. 내 속의 내가 회개하지 않는 한, 문제의 해결은 어렵습니다. 내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다윗입니다. 다윗의 위대함이 여기 있습니다. 아들 탓을 하지 않습니다. 배신한 무리들을 탓하지 않습니다. 아들의 영혼을 불러내지 않습니다. 내 속에 있는 내 영혼을 상대로 대화합니다. 불안해 떨고 있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향해, 상심하여 눈물만 흘리고 있는 내 안의 내 영혼을 향해, 아니, 그러지 말라고, 우린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이제 그만 눈물을 멈추고 함께 새 노래를 부르자고 제안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면 낙망의 자리에서 오히려 찬송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심히 불안한 상태에서 오히려 찬송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슬픔을 극복하고 새 날을 열어갈 수 있는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오늘 주신 말씀, 세 가지로 정리하며,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영혼이 낙망할 때 내 주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2:6 / (읽고) / 아들에게 쫓겨 도망치는 압지 다윗, 그런데 그 순간까지도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6절의 첫 문장, <내 하나님이여~!>, 중간에 <내가>, 마지막에 <주를 기억하나이다!>, 표시하시고요, 세 부분만 붙여서 읽어볼까요?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기억하나이다!>

아들 압살롬이 지휘하는 쿠데타 군의 기세로 보아, 이제 다윗의 시대는 끝이 난 듯 했습니다. 다윗의 몸도 늙었습니다. 기력도 그전만 못합니다. 골리앗을 눕혔던 다윗, 이젠 칼을 들기조차 힘겹습니다. 그의 몸은 재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듯 합니다. 그의 몸은 이미 항복을 선언한 상태입니다. 이제 이 몸 가지고는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 때 다윗의 영혼이 주님을 기억합니다.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무기력해진 다윗이 인생 막장에서 원수 같은 아들의 얼굴을 기억한 것 아닙니다. 나를 배신한 부하들의 얼굴을 기억한 것 아닙니다. 그랬다면 그는 분노에 이를 갈다 어디선가 화병으로 객사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주님만을 기억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내 주님을 기억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이 상하여 낙망의 자리에서 불안에 떨게 될 때, 그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린 그 어떤 낙망의 자리에서도, 주님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영혼이 낙망할 때는, 오히려 주를 기억하라! 이것이 <오히려 찬송>으로 나아가는 첫 번째 비결입니다.

여기서 나의 하나님을 잘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하나를 소개해 드립니다. 평소에 하나님의 이름을 자꾸 불러 아뢰시기 바랍니다. 다급한 일을 당했을 때,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터져 나오는 그 이름은, 평소에 자주 부르던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주님의 이름을 불러 아뢰는 습관을 들여 놓아야 합니다. 가장 좋기는 새벽마다 주의 전에 나와 내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아뢰는 것이 참 좋습니다. 그러다 보면, 일상생활 속에서도 줄곧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뜨거운 냄비를 모르고 잡았다고 깜짝 놀랐을 때, 나는 무어라 외칩니까? <오 마이 갓!> 우리 식으로 하면 <아이고 아버지, 오 주님!> 정도가 되겠지요. <오 나의 하나님, 오 마이 갓!> 정답입니다. 이제부터 제가 질문을 드리면, 모두가 다 <오 마이 갓!>으로 대답해 보십니다. 안전하게 운전을 하고 가는데, 커다란 트럭이 내 옆을 스치듯 추월할 때 깜짝 놀라서 하는 말? <오 마이 갓!> 엄청 슬픈 일을 당했을 때 하는 말? <오 마이 갓!>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기쁜 일을 만났을 때 하는 말? <오 마이 갓!> 언제 어디서나 우리 성도들에 적합한 감탄사는? <오 마이 갓!> 늘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을 불러 아뢰어, 다윗처럼 어떤 자리에서도 주님을 기억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언제나 주님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영혼이 낙망할 땐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42:8 / (읽기) / 그랬습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주님을 기억하는 다윗, 그 주님의 안내를 따라 기억 속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런데 그 추억 여행 속에서 놀랍게도 다윗은 자기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평생토록, 낮에는 인자함으로 보호하시고, 밤에는 찬송 가운데 평안한 잠을 주셨던 하나님, 그랬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언제나 내 곁에 계셨으며,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주셨으며, 항상 대적의 칼에서 나를 살려주셨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해서 다윗은 그 추억 여행 끝에 이렇게 다짐한 것입니다. 다시 읽으며 외웁시다. / 42:8 / (읽기) / <나는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라!> 절망을 이겨낸 다윗의 힘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나니, 낙망하고 불안해하던 자신의 모습이 오히려 부끄러워졌습니다. 지금까지 나와 동행하신 하나님, 한번도 나를 홀로 두신 적 없으신 하나님, 바로 그 생명의 하나님이 지금도 내 곁에 계신데, 왜 내가 낙망하고 불안해했던가?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그랬습니다. 낙망의 자리에서 주님을 기억하자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고, 원망이 변하여 찬송이 되었던 것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일, 주님을 기억하며,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억하며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억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기억을 넘어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과거는 기억의 대상이요, 현재는 기도의 대상이란 뜻입니다. 하여 어제를 위해서는 기억하되, 오늘을 위해서는 기도하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상당히 철학적인 인사가 되는군요. 그래도 옆의 분과 인사 한번 하실까요?

<어제를 기억하며 오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막다른 상황에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기도입니다. 내 몸조차 백기를 들고 포기하려 할 때도,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은 기도 밖에 없습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사탄이 나의 몸은 얽어 맬 수 있으나, 내 기도는 얽어맬 수 없다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적의 무리가 바울의 몸은 감옥에 가둘 수 있었으나, 바울의 기도는 가두지 못했던 것입니다.

해서 우리 성도들의 사전엔 포기란 단어가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염려 대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걱정할 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밤을 새운다 해도 해결되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 염려 대신 기도하면, 곧 철야기도가 됩니다. 그 시간에 걱정 대신 기도하면 바로 새벽기도가 됩니다. 기억하며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 응답하시고, 새 날을 열어주십니다. 해서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 <오히려 찬송>으로 나아가는 두 번째 비결입니다.

<주께 기도하여 날마다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3. 영혼이 낙망할 때에, 하나님을 바라며 오히려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42:11 / (읽기) / 먼저 두 개의 명령형 동사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바라다>와 <찬송하다>입니다. 지금 시인은 절망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바라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큰 소리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고백인데요, 여기서 하나님을 바란다는 표현을 현대어 성경에서는 <기다린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란다, 곧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이제 곧 나에게 찾아오실 주님, 오셔서 나를 건져주실 주님, 나는 그 주님을 기다리겠다는 겁니다. 나의 하나님, 분명히 나에게 오실 터이니, 나는 끝까지 내 주님만을 기다리겠다는 겁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리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하나 있군요. 그것이 바로 <오히려 찬송>입니다.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겠다는 겁니다. 그럼요, 원망하는 대신 오히려 찬송해야 합니다. 불평하는 대신 오히려 찬송해야 합니다. 절망하는 대신 오히려 찬송해야 합니다. 짜증내는 대신 오히려 찬송해야 합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우린 오히려 찬송해야 합니다.

누구의 시시비리를 가릴 일이 아닙니다. 누구의 책임을 물을 일도 아닙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 오직 하나님을 바라며,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입니다. 해서 다윗도,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아들의 잘못을 추궁하는 대신, 하나님을 바라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겠노라 다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여건이 찬송할 만 할 때 찬송하는 건, 아무나 하는 일입니다. 해서 <오히려>라는 단어가 오히려 중요합니다. 내 영혼이 지쳐 쓰러지려고 합니까? 마음에 상처가 너무 커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십니까? 어디를 보아도 희망이 보이질 않습니까? 불확실한 이 시대에 그저 불안하기만 하십니까? 아니오, 오히려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그럴수록 오히려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선혈이 낭자한 내 가슴 부여잡고, 그러나 오히려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찬송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찬송입니다. 오히려 찬송은 세상이 따라 부를 수 없는 찬송입니다. 오히려 찬송은 인간의 상식과 통념을 뛰어넘는 찬송입니다. 오히려 찬송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내는 찬송입니다. 오히려 찬송은 잘못을 바로잡는 찬송입니다. 오히려 찬송은 기적을 가능케 하는 찬송입니다.

거기 11절 말씀 가운데,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이란 표현이 있군요. 내가 여전히 젊다고 자부하는 가족들을 위해, 이런 비유로 설명해 드리고 싶군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은, 내가 오히려 찬송할 때에, 내 곁에 오셔서, 내 얼굴 두 손으로 감싸 안으시며,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애기야 가자!>

오늘의 말씀 마당을 닫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언제나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때나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오히려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하여 언제나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 여름 잘 마무리 하시고, 올 가을엔 더 풍성한 감사의 결실로, 이웃을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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