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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월절 특사 베드로 (행 1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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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성 목사 (멋진교회)

교도소 근처의 식료품 가게에서 제일 잘 팔리는 품목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두부입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출옥하는 사람에게 제일 먼저 두부를 먹입니다.

감옥에서 나올 때 왜 두부를 먹일까요? 인터넷 지식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예전에는 교도소 음식이 상당히 부실했기 때문에 고단백의 영양식을 빨리 먹이고자 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소설가 박완서 씨가 또 다른 재미있는 답을 했습니다. 징역살이를 콩밥 먹는다고 합니다. 두부는 콩으로 만든 것입니다. 콩이 가공되었기 때문에 두부는 다시 콩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두부를 먹이면서 다시 감옥가지 말라는 염원을 담는 것이라고 합니다.

감옥을 나서는 사람이 목이 메도록 두부를 씹으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요? 감옥 밖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겠지요. 두부를 먹이는 가족들도 전과자가 되기 않기를 간절히 소망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오는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천사의 인도를 받아 극적으로 구조됩니다. 날이 밝으면 처형될 처지였지만 아직 사명이 남았기에 베드로를 구출합니다. 그런데 천사는 감옥을 나서는 베드로에게 색다른 채비들을 요구합니다. 세 가지입니다. 허리띠, 신발, 겉옷입니다.

8 절 말씀을 봅니다.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 대”

이 세 가지는 긴박한 현장에 약간 어울리지 않습니다. 지금 사느냐 죽느냐 하는 기로에 선 베드로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허리띠, 신발, 겉옷을 챙기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천사는 베드로를 급히 깨웠습니다. 베드로의 옆구리를 걷어차면서 깨웠습니다. 그토록 긴박한 순간입니다. 맨몸으로라도 우선 감옥을 빠져나가는 것이 급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허리띠와 신발과 겉옷을 챙기게 했습니다.
거기다가 허리띠는 띠라고 했고, 겉옷은 입으라고 했는데, 신발은 들메라고 했습니다. 왜 신발을 신으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왜 신발을 어깨 위에 들메라고 했을까요?

살금살금 발자국 소리를 내지 말라는 뜻이었을까요? 사실 베드로를 지키고 있던 군사들은 4 명씩 4 팀이었습니다. 모두 16 명이었습니다. 죄수 한 명에게 이렇게 많은 군사를 배치하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입니다.

헤롯은 베드로를 처형하는 일이 정치적으로 중요했습니다. 헤롯은 먼저 야고보를 처형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일을 좋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베드로도 처형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베드로는 기독교의 수장이었습니다. 베드로를 죽이면 기독교는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헤롯은 유월절이 지나면 백성들 앞에 베드로를 끌어내 공개 처형하기로 했습니다. 이 행사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하게 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굳게 지키도록 했습니다.

베드로를 지키는 장면이 성경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의 양손을 각각 쇠사슬로 매었습니다. 베드로가 도망치지 못하게 양쪽에 두 명의 군사가 항상 붙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잠을 잘 때도 베드로는 두 군사 틈에 끼어 잘 수밖에 없었습니다. 옥 문 밖에 또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천사의 인도를 받아 옥을 빠져나가는 장면을 보니 옥문이 겹겹입니다. 쇠문을 세 개나 통과해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10 절.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베드로는 이렇게 철저한 감시와 통제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찼다고 했는데, 사실 두 군사 틈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옆구리 공간이 넉넉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죽음의 위기 앞에서 베드로가 깊이 잠들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베드로의 태평한 성격 탓일까요? 여느 사람 같았으면 잠을 이루지 못할 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에 교회는 깨어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베드로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모여 있던 곳은 교회가 처음 세워진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성령이 강림한 바로 그 다락방에 성도들이 모여 철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12 절에 보면 나중에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와 찾아간 곳이 바로 마가의 집입니다.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베드로가 다시 살아난 것은 오직 교회의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교회의 기도는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게 했습니다. 천사의 인도로 16 명의 파숫군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군사들은 날이 밝도록 베드로가 어찌 되었는지 몰랐습니다. 베드로의 손에 채워진 쇠사슬이 풀어졌습니다. 굳게 잠긴 쇠문이 절로 열렸습니다. 기도의 능력은 이렇게 기도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었으면 더 좋았을 뻔 했습니다. “교회가 베드로를 위해서 철야 기도하는데, 베드로도 함께 기도하고 있었더라.” 감옥에 붙잡혀 고생하는 베드로에게 깨어 기도하는 것을 기대한 것이 무리일까요?

아무튼 베드로는 태평스럽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잠자는 베드로를 구출하기 위해서 비상수단을 써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베드로를 깨워 영적 무장을 하게끔 채비시켜야 했습니다.

감옥에서 구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나와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허리띠, 신발, 겉옷은 사명을 감당할 베드로에게는 영적 무장의 상징입니다.

군인들이 훈련받는 중에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훈련은 행군하는 것입니다. 이 행군 훈련은 하루에 100Km를 걸어서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5일 정도 훈련을 받다 보면 발에 물집이 생기고, 심하면 발톱이 빠지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행군 훈련은 군인들이 받는 훈련 중 가장 강도가 높습니다.
그냥 걷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을 가상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개인 장비를 모두 배낭에 넣습니다. 배낭에는 여벌 옷, 우비, 모포, 야전 삽, 전투화, 비상식량 등이 들어갑니다. 거기에 수류탄과 탄알, 소총 무게까지 합한다면 20 Kg이 넘습니다. 이것들을 짊어집니다. 또 얼굴은 위장하기 위해 시꺼멓게 칠을 합니다. 거기에 철모를 쓰면 그것을 완전 군장이라고 합니다. 군인이 적과 싸우기 위해 이렇게 무장합니다.

만약 짐이 너무 무겁다고 무장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군인은 총과 탄알만 있으면 전쟁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배낭에 들어있는 각종 필수품들이 잘 갖춰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를 보장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이 무장을 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말씀에서는 이러한 무장을 하나님의 전신갑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엡 6:13-17>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최소한의 영적 무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허리띠, 신발, 겉옷.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위해 적어도 이 세 가지는 필수입니다.

먼저 천사는 베드로를 구출하기 위해서 감옥을 찾아옵니다. 천사가 나타나자 깜깜한 감옥에는 광채가 가득했습니다. 7절에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했습니다. 빛은 어둠의 세력을 몰아내는 힘이 있습니다.

잠든 베드로에게 나타난 천사는 모두 5 가지의 명령을 합니다.

첫째 명령은 ‘급히 일어나라’입니다.

천사는 깊이 잠든 베드로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쳤습니다. 그리고 “급히 일어나라”고 명했습니다. 생명의 위협이 바짝 다가온 긴박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를 깨우는 일이 그만큼 급했습니다.

그리고 이 급한 상황은 베드로 개인의 상황만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일꾼을 쓰시기에 급하십니다.

어둠이 판을 치고 의인이 고통당하기 때문에 급하십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가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의 고통을 나누고 그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이 사회의 구조적인 악에 맞서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시켜 줄 종이 너무나 급하게 필요합니다.

요즘도 신문 사회면을 채우는 범죄 기사는 파렴치를 넘어서 인간이기를 포기한 짐승 같은 범죄자들의 범행이 날로 경악케 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사회 윤리는 땅에 떨어져 타락과 향락과 광란의 동네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있지만 선교가 없는 마른 막대기 같은 모습 속에서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잠들어 있기에 하나님은 너무나 급하게 지금 당신의 종들을 깨우고 계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받는 우리는 지금 옆구리를 치시는 천사의 발길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잠든 나를 깨우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치시며 깨우고 계십니다. 추수할 것은 너무 많은데 일꾼이 부족해 급하게 찾고 계십니다.

내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명령하십니다. 내가 안주하고 있는 내 삶의 근거를 포기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희망과, 삶의 안락함을 제공해 주던 재물도 포기하고 일어나야 합니다. 때로는 행복의 근원으로 여기는 집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의 일을 위해서 일어서는 것입니다.

누운 것은 일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쉬는 자세입니다. 누웠을 때는 감옥 천장만 보입니다. 그러나 일어나면 일할 세상이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일어나라는 명령은 순서가 아닙니다. 먼저 손과 발을 묶은 착고를 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양옆에 지키고 있는 군인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정말 베드로의 몸은 일어설 수 없도록 쇠사슬에 묶여 있었습니다. 일어선다고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일어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라” 명하셔도 반응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가도 가야하고, 소도 사야 하고, 논밭도 돌봐야 합니다. 이렇게 일어설 수 없는 사정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건강해지고 나서, 돈 좀 벌어 놓고 나서, 애들 키워 놓고 나서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두 만만치 않은 사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조건이 갖추어 졌을 때는 평생 찾아오지 않습니다. 아직 이렇게 쇠사슬에 묶여 있다고 핑계만 대고 있을 것입니다.

주일 예배에 빠져야 되는 이유를 대보시죠. 전도하지 않는 이유를 대보십시오. 언제나 핑계거리는 산처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 베드로가 일어설 때 쇠사슬이 풀렸습니다. 아직 쇠사슬에 묶여 있는 몸이지만 일어나라 할 때 일어서니 쇠사슬이 벗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아직 일어설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지만 기적을 믿고 일어서니 쇠사슬이 벗어졌습니다. 인간의 판단으로 불가능한 조건이 가능한 조건으로 바뀌었습니다. 아직 묶인 채로 일어서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천사가 인도하여 나갈 때도 성을 지키는 든든한 쇠문이 저절로 열렸습니다. 닫힌 문을 향해서 나아갈 때 막힌 문이 열린 것입니다. 문이 굳게 잠겨 있지만 문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쇠사슬이 아직 풀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어설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면서 일어서는 사람은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쇠사슬이 풀어진 것이 기적이 아니라 일어선 것이 기적입니다.

일어서면 묶였던 몸이 자유의 몸이 됩니다. 그 동안 막혔던 일들이 풀려 집니다. 그 동안 나를 잡아매어 두었던 쇠사슬이 다시는 나를 묶어 두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일어났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 허리띠를 띠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 소개된 하나님의 전신갑주 가운데 허리띠는 진리입니다.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나 신약의 세례요한은 언제나 가죽옷에 허리띠를 띠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진리만을 외쳤습니다. 진리는 바로 “말씀” 입니다. 이제 명령에 따라 일어 선 베드로가 준비해야 할 영적 무장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 당하실 때 모두 성경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말씀은 사단의 궤계를 무너뜨리는 강력한 영적 무기입니다. 말씀 앞에서 사단은 꼼짝하지 못합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이 진리의 허리띠로 동여야 합니다. 허리를 여미는 것은 일하는 자세입니다. 결심하는 자세입니다. 준비된 자세입니다. 여러분 ! 누구나 진리의 허리띠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연초에 매일 성경을 석 장 이상 읽자고 했습니다. 요즘 둥지 보고를 받아보면 많은 둥지가 성경 읽은 장수를 보고하지 못합니다. 아직 출애굽해서 요단강을 건너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호수아까지도 못 읽고 광야에서 방황하고들 있습니다. 그래가지고 무슨 허리띠를 준비할 수 있습니까?
제발 성경을 읽고 성경을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설교를 경청하십시오. 이것이 영적으로 무장하는 첫 단계입니다.

다음 세 번째 명령은 신발을 들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 가운데 신발은 “평안의 복음” 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제일 먼저 대문에서부터 그 집의 평안을 빌었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어디나 하나님의 평안이 먼저 들어갑니다.

우리가 전할 복음은 평안의 복음입니다. 평화를 위해 우리는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나 이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제가 우리 교인들에게 이 전도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무지하게 많습니다.

도무지 전도하지 않는 여러분. 어떻게 해야 전도 못하는 교인들이 전도하는 교인으로 변화될 것인가? 저와 여러분이 풀어야 할 커다란 숙제입니다.

천사는 계속 명령을 합니다.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고 합니다. 이 겉옷은 무엇입니까 ? 이 겉옷은 능력입니다.

아합 왕 때 이스라엘에서 활약하던 구약의 예언자가 이제 때가 되어 하늘에 들려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제자 엘리사가 이 일을 눈치를 채고 엘리야의 뒤를 졸졸 따라 다녔습니다. 마지막임을 느낀 엘리사는 거머리처럼 스승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요단강에 이르렀을 때 요단 강물로 길이 막혔습니다. 엘리야는 겉옷을 말아서 강물을 철썩 내리 치니 물이 이리 갈라지고 저리 갈라졌습니다. 마치 모세가 홍해를 가른 것처럼 길이 생겼습니다. 강을 건너고 나서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엘리사가 구한 것은 스승인 엘리야 선생님의 영감의 갑절을 구했습니다. 그 때 엘리야는 어려운 것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불말과 불 수레가 내려왔습니다. 회리바람은 두 사람 사이를 가르고 엘리야는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엘리사는 갑절의 영감을 구했지만 스승 엘리야는 안수기도 한 번 안 해 주고 무정하게 그냥 올라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스승을 엘리사는 그야 말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엘리사는 속이 상해서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쫙 찢었습니다. 엘리사는 옷을 찢을 정도로 격해져 있었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엘리야가 입고 있던 겉옷이 뚝 떨어졌습니다. 스승의 마지막 선물입니다.

엘리사는 그 겉옷을 주워 들고 오던 길을 되돌아갔습니다. 아까 물을 가르고 건넌 요단강이 또 길을 막았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 겉옷을 둘둘 말아 가지고 물을 쳤습니다. 치면서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랬더니 물이 이리 갈라지고 저리 갈라지면서 요단강이 열렸습니다. 엘리야에게 임했던 영감의 갑절의 영감이 엘리사에게 임한 것입니다. 이 겉옷은 바로 능력의 겉옷입니다.

능력을 받지 못하면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 능력은 오직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천사가 일어나라고 해서 일어났습니다. 허리띠, 신발, 겉옷을 챙겼습니다.

그 다음 마지막 명령은 무엇입니까? “따라 오라”입니다.
이 “따라 오라”란 말씀에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구약에 예언자들을 부르실 때는 언제나 “내가 명하는 곳으로 가라” 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언제나 “나를 따라 오라”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도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따라 오라는 말씀 속에는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 계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유능한 장군은 진두에 앞장을 서서 나를 따르라고 공격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몸을 사리는 졸장은 자기는 제자리에 서서 부하들만 앞장세웁니다. “돌격 앞으로!” 를 명하지만 그 싸움의 결말은 빤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언제나 앞장서십니다. 나는 주님 뒤를 따라 가면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앞 얼굴 모습보다 뒷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앞서 가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천사를 따라 나서니 옥문이 절로 열렸습니다. 성으로 통하는 쇠문이 열렸습니다. 파수꾼 앞을 지나 밖으로 나와도 거침이 없었습니다. 앞장서신 대장 예수를 따라 가니 완전히 자유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일을 마음껏 감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길로 자신을 위해 밤을 지새며 기도로 후원하고 있는 성도들이 모인 곳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 기적의 은혜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승리의 새벽입니다.

어둠의 시대를 환한 빛으로 채우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채비를 하십시다. 진리의 허리띠와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들메고 능력의 겉옷을 입고 무장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뒤를 따라 갑시다. 승리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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