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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니느웨, 서울, 제2의 요나 (나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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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유관지 목사 (목양교회)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한 예언자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라크 사태와 관계해서 모술이라는 도시의 이름을 자주 듣습니다.
자이툰 부대 파병이 준비될 때 처음에는 모술에 주둔할 예정이라고 발표되었었습니다.
이 모술이 성경에 나오는 니느웨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 제국의 서울이었는데 대단히 강성한 도시였습니다.
요나서 4장을 보면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큰 성읍이라고 하였습니다.(욘3:2)
1845년부터 니느웨 성에 대한 발굴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성 둘레가 96Km 이었습니다.
사흘 동안 걸을 만한 거리입니다.
이 때 발굴된 니느웨의 모습과 성서의 기록이 여러 면에서 일치하고 있다고 합니다.

니느웨는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성벽의 높이가 26m이었고 성벽 위로 전차 세 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성 주변에 너비 24m 깊이 15m의 방어용 연못이 있었습니다.

규모가 컸다는 점에서 니느웨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과 비슷합니다.

든든하게 방어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둘이 비슷합니다.
분단상황 때문이지만 세계의 여러 도시들 가운데 서울은 수도방위사령부, 수도군단, 가장 강력한 군사력이 방위를 책임지고 있는 도시입니다.

니느웨는 티그리스 강변에 건설된 성읍인데 서울은 한강을 끼고 있다는 점도 비슷합니다.

니느웨가 서울이 비슷한 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원래 이방도시였었으나 복음이 전해져서 새로워진 기록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니느웨의 악독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재앙을 내리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 앞서 요나를 보내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외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려하실 때 반드시 예고를 하십니다.
요나의 말씀 선포를 듣고 니느웨에는 금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났습니다.
강도 높은 회개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니느웨의 아닷 니라니(Adad-Nirari)라는 왕 때(BC 808-783) 개혁운동을 한 기록이 있는데 그 뒤의 일들과 연관해서 보면 이 개혁운동이 요나의 말씀 선포 때문에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복음이 들어오기 전 서울, 그 때 이름 한양은 매우 뒤떨어진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개화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미신숭배가 심했습니다. 무당이 많았습니다.
양반과 상민 계급의 차별이 매우 심했습니다.
일부 계층을 제외하고는 아파도 치료 받기 힘들었습니다.
배우고 싶어도 신분 때문에, 마땅한 교육시설이 없어서 배우기가 어려웠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기 직전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매우 빈궁했습니다.

복음이 들어온 다음에 서울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 점도 니느웨와 서울이 비슷한 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요나의 전도로 인한 니느웨의 변화는 오해 가지 못했습니다.
요나와 나훔 사이에는 백오십 년 정도 사이가 있었는데 그 사이에 니느웨는 도로 사나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니느웨는 니느웨 성을 말하면서 동시에 앗수르 제국 전체를 말합니다.
서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은 남한 전체를 말하는 이름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해외에 나갔을 때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코리아에서 왔다’ 하지 말고 ‘나는 서울에서 왔다’고 대답하는 편이 지혜롭습니다. 
서울에 살지 않는 분들도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좋습니다.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면 ‘남이냐? 북이냐?’ 질문 받는 일이 있습니다.
니느웨는 대단히 강포한 나라가 되어 북왕국 이스라엘을 쳐서 멸망시켰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남왕국 유다를 다스릴 때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많은 괴로움을 주었습니다.
니느웨 성 안에도 악한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나훔서 3장 1절을 보면 니느웨 성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않았다고 했고  살인이 많았고 음행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니느웨는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악의 도성이었습니다.
나훔은 니느웨를 “피의 성”이라고 불렀습니다.
나훔서 3장 1절에서 4절까지를 보세요.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휙힉하는 채찍 소리, 윙윙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교통혼잡이 심했던 모양입니다)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무력 충돌이 심했던 모양입니다)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이는 마술에 능한 미모의 음녀가 많은 음행을 함이라 그가 그의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그의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니느웨 성의 타락한 모습을 실감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훔서는 묘사가 아주 생생한 것이 특징입니다.
나훔서에 대한 주석들을 보면 ‘나훔서는 복수를 말하고, 저주를 말하고, 증오에 가득 차 있고, 성경답지 않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나훔서는 묘사가 생생하고 표현이 분명해서 아주 선명한 메시지를 준다. 문학성이 대단히 높은 성경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서울은  매우 타락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범죄가 많고, 교통사고율이 높고, 공해가 심하고, 경제가 불안하고, 과격한 시위가 이어지고, 파업이 많은 도시로 알려졌습니다.
좋을 때는 그 사람이나 그 도시의 장점이 강조되는데 그렇지 못할 때는 단점이 강조됩니다.
오늘날 서울은 장점보다 단점이 강조되는 도시가 되고 있습니다.
88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이후에는 해외에 나가서 ‘나는 서울에서 왔습니다.’ 하면 대단히 자랑스러웠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까?

복음을 받아들인 다음에는 변화가 있었으나 그 변화가, 다시 말해 복음이 생활문화가 되지 못하고 흔들림으로 위기감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서울은 니느웨와 비슷합니다.

오늘 우리는 나훔서의 메시지를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나훔서 1장 1절,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를 “서울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이렇게 바꿔 읽어야 합니다.

요나 때는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했습니다.
이것은 사십 일의 유예기간이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나훔서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임박한 멸망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나훔서가 기록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는데 성경학자들은 니느웨가 멸망한 기원전 612년 바로 이전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니느웨는 기원전 612년 바벨론과 메데의 연합군에 의해서 멸망했는데 나훔서의 예언이 너무 긴박하기 때문에 ‘니느웨는 이 예언이 선포되고 곧 멸망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짐작하는 것입니다.

나훔서 1장 2절에서 7절까지에는 하나님의 성품 여러 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네 가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성품은 때에 따라서, 또는 사람에 따라서 그 가운데 어느 한 가지가 강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성품들 앞에서 오늘 나의 모습을, 그리고 서울의 모습, 이 나라의 모습을 비춰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은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절을 다시 보세요.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이 말씀은 십계명에도 나옵니다.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애굽기 20장  5절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다.’는 것이 아주 분명한 사실임을 알려주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훔을 흔히 ‘복수의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예언자의 별명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성품들 가운데 하나를 잘 말해 주는 별명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거스르는 자에게 보복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나는, 우리는, 서울은, 이 나라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않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대적하시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는 분입니다.
오늘, 나는, 서울은, 이 나라는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고 있습니까?

나훔서 1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첫 번째 성품 앞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입니다.
3절 앞부분을 보세요.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성경에는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여러 군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하였습니다. 
민수기 14장 18절에도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레미야서 15장 15절에서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고, 베드로전서 3장 20절에는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방주 때 오래 참고 기다리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제 되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니까 우리는 무사하겠구나!’ 하지 마세요.
이 말씀은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어서 이제까지 참으셨다. 계속해서 참지는 않으실 것이다!’ 이렇게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할 것은 노하지 않는 분은 아니십니다.
벌할 것은 벌하시는 분입니다.
이것도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선 오늘 본문이 그것을 밝히고 있지요. 3절 앞부분을 다시 보세요.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아까 읽어 드린 출애굽기 34장 6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그 다음 7절에는 이와 같은 말씀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민수기 14장 18절,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는말씀 뒤에도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라는 말씀이 계속됩니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이 말씀의 해석,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참으셨다,’ 이 앞에 여러분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까?

셋째, 하나님은 권능이 크신 분입니다.
3절을 보면 여호와는 권능이 크다고 하시고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하였습니다.
4절과 5절도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있습니다.

나훔이 ‘니느웨는 곧 망한다!’ 선포했을 때 사람들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했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니느웨는 견고해서 누구도 니느웨를 함락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원전 612년 바벨론의 나보폴라살(Nabopolassar)과 메데의 카악사레스(Cyaxares) 연합군이 니느웨를 침공할 때 티그리스 강의 흐름을 바꿔서 물이 범람하게 해서 니느웨를 점령했습니다.
8절을 보면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곳을 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대로 되었습니다.
나훔서 3장 17절에는 니느웨를 향해 “그 있는 곳을 알 수 없도다”라고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있는데 니느웨는 기원전 612년에 멸망당해 1845년 발굴되기까지 있는 곳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권능이 크신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면 못하실 것이 없는 분입니다.
이 사실 앞에 여러분 나를 비춰보고 우리를 비춰보고 오늘 한국의 현실을 비춰보시기 바랍니다.

넷째, 하나님은 진노하실 때는 무섭게 진노하시는 분입니다.
6절을 다시 보세요.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

온순한 분이 화를 내면 더 무섭다는 말이 있는데 하나님은 정말 그런 분입니다.
홍수로 심판하실 때,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때, 하나님, 얼마나 두려운 분이었습니까?
4절을 보세요. 하나님은 목초지가 풍부한 바산과, 좋은 포도원들이 많은 갈멜과, 꽃과 아름다운 나무들이 많은 레바논을 시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오래 참으십니다. 그러나 진노하실 때는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신 악인들을 철저하고도 분명하게 처벌하십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훔서 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 네 가지를 살폈습니다.
그리고 이 네 가지 성품 앞에서 나를 비춰보고, 우리를 비춰보고, 특별히 한국의 현실을 비춰볼 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모스서 7장에는 다림줄의 환상이 나옵니다.
다림줄은 ‘담이 제대로 되었나?’ 추를 달아 재는 줄입니다.
다림줄로 서울을 재어볼 때 어떤 결과가 나올까 두렵습니다.
8장에는 아모스가 여름실과 한 광주리의 환상을 본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름실과를 ‘끝이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즘 여름실과가 많이 나오는데 어제가 입추, 내일이 말복, 이제 여름도 다 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번영이 끝났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이 환상을 보여 주셨는데 이 환상 앞에서 우리도 두렵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이 아직 하나가 더 남아 있는데 그것은 잠시 뒤에 살피기로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수도 이전을 주장하는 분들, ‘아, 서울이 니느웨처럼 위험하다는 이야긴데 그러니까 수도를 빨리 이전해야 한다.’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장소가 문제가 아니지요.  사람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 상태가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제2의 요나가 되어야합니다.
‘한국은 이대로 있으면 안됩니다! 이대로 가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습니다!’ 선포해야합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120년 전인 1884년에 맥클레이라는 감리교 선교사가 한국에 왔습니다.
맥클레이 선교사는 고중 임금을 뵙고 미국 감리교회가 한국에 와서 선교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원을 했습니다.
고종은 이것을 허락했습니다.
같은 해에 알렌이라는 장로교 평신도 의료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제중원, 오늘날이 세브란스병원을 설립하고 선교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 해에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들어왔고 계속해서 선교사들이 들어왔습니다.
이들이 제1의 요나였다면 이제 우리가 제2의 요나가 되어 한국 사회를 향해 외치고 사회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나훔서는 요나서의 후편이라고 말합니다.
나훔서에는 보복, 분노, 심판, 원수가 멸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모습, 이런 것들이 있어서 성경의 이단아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러나 자세히 보면 나훔서는 하나님이 모든 민족과 국가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귀한 성경입니다.
불의한 국가와 부패한 민족은 반드시 패망한다는 귀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나훔서가 요나서의 후편이라면 나훔을 제2의 요나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러다면 우리는 제3의 요나가 되어야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2의 요나이건, 제3의 요나이건 여러분 도망치는 요나는 되지 마세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순종해서 니느웨 성을 돌며 외치는 요나가 되어야 합니다. 

요나의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간단한 메시지를 던진 예언자라는 점입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이것이 요나의 메시지 전부입니다.
아까 하나님은 권능이 크신 분이라고 했지요.
권능이 크신 하나님은 그 메시지를 사용해서 니느웨 성이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너무 복잡해졌습니다.
요나처럼 좀 간단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외치고 심판이 있음을, 제1의 요나들이 복음을 들고 이 땅에 찾아왔을 때만큼이나 어둡고 어렵고 어지러운 이 세상을 향해 외쳐야합니다.
우리는 한없이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하나님의 권능을 입히시어 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심판이 있는 것을 믿는 사람들의 삶을 보여 주어야합니다.
소돔 성이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 당했는데 오늘 성도들은 한국의 의인 열 명으로 살아야합니다.
의인의 삶을 보여 주어야합니다.

아까 오늘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의 성품 네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둘째,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셔서 이제까지 참으셨다’는 뜻이라는 것도 말씀 드렸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권능이 크신 분이다.
넷째, 하나님은 진노하실 때는 무섭게 진노하시는 분이다.

이 사실에 앞에 나를 보고, 우리를 보고, 특히 니느웨와 닮은 점이 많은 서울을 볼 때 매우 두렵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 하나가 더 남아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입니다.
7절을 보세요.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우리가 제2의 요나가 되어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의인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줄 때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임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산성이 되실 것입니다.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는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감싸 안으실 것입니다.
성경에서 안다고 하는 것은 대강 아는 것이 아니고 자세하게 아는 것이라고 말씀 드린 일이 있습니다.
또 아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따르는 것을 포함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아, 아무개가 나에게 피하는구나!’이렇게 아는 것에서 끝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피한 사람들을 감싸시며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지금 서울, 대한민국의 현실, 너무 너무 답답합니다.
염려되는 일들이 너무 너무 많습니다.
갈수록 답답해집니다.

그것은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때 제2의 요나들이 되어서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제 더 이상 참으시지 않으시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 환난 날에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고 그들을 감싸 안으시는 하나님으로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서울에, 그리고 이 나라에 임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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