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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 1: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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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대식 목사 (평화교회) 

요즈음 가장 가슴 아픈 일들 중 하나는, 사람됨의 가치를 아낄 줄 모르는 우리 시대의 풍조입니다. 남의 생명이나 가치를 가볍게 여기거나 함부로 빼앗습니다. 희대의 살인사건, 불특정 26명의 목숨을 앗아간 연쇄 살인 사건으로 온 세상이 어둡습니다. 피의자의 칼에 맞아 경찰관 두 명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참 끔찍하고 가슴 아픈 사건입니다.

게다가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은 자신의 인격조차도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 상실증 환자’와 같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주는 퇴폐와 환락과 무절제한 놀이 문화에 자기 자신을 헐값으로 팔아넘기는 모습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가, 나는 얼마나 값비싼 존재인가 하는 존엄성을 잃고만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하나님은 참 안타깝게 바라보고 계실 것만 같습니다.

사실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살아왔습니다. 동서양의 성인과 현자들이 추구하였던 것도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 오랜 인류 역사 동안 계속되어온 질문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인간을 만족시켜 줄 만한 명쾌한 답이 나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더욱이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을 볼 때, 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답을 찾기 보다는 나를 잃어버린 자기 상실증 환자로 전락해 버린 느낌을 갖게 합니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함에 따라 한때 인간은 자기들이 세상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란 존재는 이제 필요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하나님을 세상 밖으로 밀어 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밀어냄으로 인간 자신이 세상 밖으로 던져져 버렸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험한 세대 한 복판을 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신앙인입니다. 성경을 생명의 책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성경이 인생의 어떤 질문을 가지고 읽어도 거기에 마땅한 답을 주기 때문입니다. 마치 목마를 때 두레박을 내리면 어김없이 맑은 생수를 퍼 올릴 수 있는 우물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책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 즉 우리 인생은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가, 나는 본래의 내 모습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하는 답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성경은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라고 오늘 본문 27절에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니, 하나님은 창조 작업의 마지막 날인 여섯째 날에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좀 익살맞은 표현을 한다면 다섯 번의 창조 연습을 하시고 마지막으로 심혈을 기울여 걸작품을 뽑아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습니다. 즉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지어졌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요 14;9)이라 하시면서 하나님 닮은 존재임을 밝히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즉 인간 창조의 모델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많은 피조물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을 모델로 하여 지음 받은 유일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귀한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귀중한 것입니다.

진화론을 주장하는 어느 학자가 30년 동안을 고집스럽게 자기 학설에 매여 있다가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에 그가 저술한 책에서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진화론을 주장할 때는 동물원에 가서 원숭이를 볼 때마다 조상을 보는 것 같아 심정이 아주 착잡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물과 사람이 같다고 생각하니, 동물이 사람을 닮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동물을 닮은 것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은 후로는 사람은 엄연히 동물과 다르며, 그래서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기를 보고 다음에 동물을 보니 그 동물들이 얼마나 귀엽고 아름다운지 동물들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고 할 때 하나님의 외모 그대로 만들어 졌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인간도 하나님의 영을 닮은 영적인 존재로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육체적인 존재이기에 물질을 필요로 합니다. 정신적인 존재이기에 지성과 정서를 갖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신령한 면을 추구하는 존재요, 영원을 사모하며 사는 존재인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사실은 엄청난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비록 겉으로는 보잘 것 없는 존재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어떤 어려움도 이겨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자기 자신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 사는 사람, 자신에 대해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사람이 자기 앞에 놓은 일을 잘 해결해 나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는 긍지를 가지고 스스로를 귀하게 여길 때, 그래서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며 세상일을 하나님과 함께 해결해 나가겠다는 생각을 갖고 일할 때 불가능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둘째로 인간은 긍정적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실 때마다 피조물들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하셨습니다. 그래서 짤막한 창세기 1장 속에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7번이나 나옵니다. 7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완벽하고 선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라면 나는 하나님을 따라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세상 모든 것을 보고 “야, 참 좋다!” 감탄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을 보시고 모두 좋다고 평가하셨고 심히 기뻐하신 것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긍정적인 사고와 적극적인 태도를 갖고 살라고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좋다고 하시는데, 내가 어떻게 나쁘다고 하며, 하나님이 긍정하시는데, 어찌 내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처지에 놓이든지 먼저 좋다고 하는 긍정적인 생각과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느 분은 이런 의문을 던지실 것입니다. 부조리와 불합리와 불의로 가득 찬 세계, 음모와 흉계와 모략으로 점철된 인간 역사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역사를 보고도 보기에 심히 좋다고 할 수 있겠냐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해 좋았다는 세계는 인간이 죄짓기 이전의 세계를 향해 하시는 말씀이지, 오늘의 이 지저분한 세계와는 상관이 없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인류가 지나온 역사나 오늘의 역사는 완전한 것이요, 아름다운 것이요,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찌 보면 절망적인 시대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도 모르시고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보기에 좋다고 판단하시는가? 지금이라도 성경에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말씀을 빼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여전히 그 말씀이 진실 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합니다. 인간이 보기에 좋았다가 아닙니다. 이 점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입니다. 전체를 설계하시고 계획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이 계획대로 창조되었음을 확인하신 후에 좋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좋은 것인지, 왜 좋다고 하시는지 우리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우리 보기에는 이 세계 속에는 부정적인 요소가 많은데, 하나님은 그런 것에도 불구하고 좋다고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런 때 우리 인간의 생각과 판단을 멈추고 하나님의 판단과 그 뜻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것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은 신비하고 오묘하여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세상을 보는 자세를 우리는 배워야 할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일은 좋다고 생각하면 좋게 여겨지고 나쁘다고 생각하면 나쁜 쪽으로 기웁니다. 어느 교회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숙제를 내 주었습니다. 자기 집에서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을 찾아서 다음 주일에 그것을 발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유난히 가난한 집에 살던 한 아이가 말했습니다. “전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집에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할 수 없었어요. 그러나 굳이 말하라고 한다면, 찢어진 창문 틈으로 햇살이 곱게 들어와 내 동생 머리 위를 비추는 것이 참 아름다웠어요.”

몇 십 년이 지난 후에 이 선생님과 성장한 학생은 우연히 만나게 되어 옛날을 회상하며 즐거이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때 그 학생이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제게 던졌던 숙제는 나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 뒤부터 나는 내가 어디 있든지 그 자리에서 아름다운 것을 찾기 시작했지요, 그러고 그런 내 생활 태도는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답니다.”

그렇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삶에 있어서 부정적인 것을 보고 낙심하기 보다는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려는 모습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이 좋다고 하시는데 내가 나쁘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긍정하시는데 내가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나와 세상을 긍정하며 적극적인 자세로 사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나가는 신앙의 길입니다.

셋째, 성경은 내가 복 받은 존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최대의 축복을 하셨습니다. 인간은 창조되는 순간부터 우주의 주인공이었습니다.

28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하셨습니다. 다스리라, 정복하라, 충만하라, 이러한 최고의 복을 가지고 인간은 태어났습니다. 여기에 인간됨의 자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창조하신 우주 만물을 우리 인간에게 다스리도록 맡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스림에 필요한 자유의지, 지혜, 능력, 지도력 그리고 위엄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복도 여기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엄청난 복을 주셨다고 하는데도 스스로 복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우리는 “나는 지지리도 복이 없어”하며 한탄하는 소리를 곧잘 듣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면 늘 그렇게 복없이 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스스로 나는 복 받은 자라는 자부심에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복 받은 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말하는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고귀한 존재,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며 살아가는 존재,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한 몸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복 받은 존재입니다.

이 모든 나의 나됨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데서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하나님이 나를 당신과의 관계 속에서 설정하셨기에, 나의 영혼은 하나님을 발견하고 주님 품에 안기기 전 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기쁨과 평안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많은 것을 이루고 나서도 끝내는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공허해 한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참다운 인생을 시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은 창조 이전의 혼돈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갈 때만 중심을 잃지 않는 참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창조주로 고백한 후에라야 비로소 사람이 사람답게 됩니다. 또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며 십자가를 바라보는 가운데 나의 참 가치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엄청난 사건은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통해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죄인 된 나의 모습을 보면서 동시에 내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구원한 나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목숨을 걸고 물에 빠진 아이를 건져주었습니다. 그 아이는 “아저씨, 나를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고마워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만에, 그러나 다만 한 가지 꼭 기억하고 살기를 바란다. 너는 어떤 사람이 자기 목숨을 던져 가면서 구해 낼만한 가치 있는 사람인 것을 잊지 말고 살아다오.”

그렇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독생자를 희생하면서까지 구해주실 만큼 귀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상의 죽음의 대가를 지불하면서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나의 나 됨의 가치가, 무궁무진한 깊은 가치가 십자가 속에 숨어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 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존귀한 존재입니다. 나는 긍정적이며 적극적으로 살아야 할 만큼 의미 있는 존재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믿고 위탁하신 일들을 행하며 사는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사람의 가치가 가볍게만 여겨지는 세상일수록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이 존재의 존귀함을 결코 잊지 말고, 하나님의 축복받은 자녀로 힘차게 사는 성도 여러분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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