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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의 일생(10) : 피스 메이커 (삼하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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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문수 목사 (신반포교회)

지금 아테네에서 올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올림픽은 전쟁과 분쟁을 그치고 세계 인류가 스포츠를 통해 평화를 도모한다는 취지로 시작되어 흔히 ‘인류 평화의 제전’으로 불리곤 합니다. 근대 올림픽의 기원이 된 고대 올림픽 역사를 보면, 그리스 각 도시 국가의 청년들이 한데 모여 체력과 기예를 겨루는 축제로 그 기간 중에는 모든 전쟁을 중단했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올림픽은 세계 인류에게 귀한 잔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말은 인류 평화의 제전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진정한 평화와 거리가 멀다는 사실입니다. 테러의 위협으로 안전 요원이 무려 7만 명, 선수 1인당 7명꼴이라고 합니다. NATO 군대까지 동원되고, 안전 비용은 무려 15억 유로(약 2조 1,000억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작 개최국인 그리스 사람들은 계엄령 하에서 지내는 것처럼 불편과 불안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죠?

우리에겐 평화가 중요합니다. 평화가 없으면 아무리 소유가 많아도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마음속에, 가정에, 국가와 세계인류에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평화를 만들어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만드는 평화는 언제나 불완전합니다. 언제라도 폭발해 버릴 수 있는 휴화산 같은 평화에 불과합니다. 오직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고전14:33)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인간에게 평화가 깨지고 말았습니까? 에덴동산에서 뱀, 즉 사단의 유혹으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언약의 증표인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함으로 평화가 깨지고 만 것입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지고, 연이어서 가정의 평화가 깨지고, 결국은 온 세상의 평화가 깨진 것입니다. 사단은 갈등과 다툼을 일으키는 트러블 메이커(Trouble-Maker)입니다. 죄에 빠진 인간도 마찬가지 트러블 메이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평화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평화를 누릴 수 있고, 더 나아가 평화를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모범이 됩니다. 그는 항상 마음속에 평화가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시련과 고통이 있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마음에 평화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 평화는 자신이 의지적으로 만든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의 마음속에 평화가 있었기에 더 나아가 평화를 만드는 피스 메이커(Peace-Maker)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행복한 인생이었으며, 행복을 나눠주는 인생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평화를 사랑하는 다윗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함께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도 평화를 사랑하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다윗의 신앙과 삶 : 피스메이커의 모델

본문은 사울 왕이 전쟁터에서 죽고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자 지파의 왕이 된 직후에 일어는 사건의 기록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행한 일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가 어떤 신앙과 인격의 소유자인가가, 그리고 왕으로서 어떤 정치를 했는지 파악할 수 있는 가늠자가 됩니다.

4절(하) 보면, 사람들이 다윗에게 보고한 내용이 나옵니다. 무엇입니까? 사울의 시체를 장사한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 보고를 들은 다윗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5절~7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5절 → 사자(심부름꾼)들을 보냈습니다. 무엇하러 보냈죠? 다윗의 원수 사울의 편이니까 보복했나요? 그게 아니죠. 축원합니다. “ ...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대단한 일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울의 시체를 장사한 사람들을 괘씸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하나도 남김없이 색출해서 처형할 케이스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축복을 빌어줍니다.

* 6절~7절 → 계속 하나님의 은혜를 축원하면서, 더 나아가 자기가 보상해주겠다고 다짐합니다.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이제 너희는 손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지어다 너희 주 사울이 죽었고 또 유다 족속이 내게 기름을 부어 저희의 왕을 삼았음이니라” 이제 자기가 왕이 되었으니 책임지고 포상해 줄 터이니 아무 염려 말라는 겁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야베스 사람들이 다윗 앞에서 벌벌 떨 일입니다.

보통의 상식으로 보면 정말 희한한 일입니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원수 사울을 용서하고, 심지어 그의 공적(功績)을 포용하고 인정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인간 본연의 모습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그의 성숙한 신앙에서 우러나온 겁니다. 다윗은 자신의 사사로운 이기심이나 이해관계를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자기 정권욕만 추구했다면 결코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 겁니다. 정반대로 야베스 사람들을 탄압하고 처형했을 겁니다. 자기편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은 사울도 그의 편에 선 사람들도 용서하고 포용함으로 화해하고, 더 나아가 통합된 이스라엘을 이루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마5:43~45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다윗의 이런 모습은 비단 본문에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사무엘 上, 下 도처에 나옵니다.
그 중에 가장 두드러진 대목을 몇 가지 찾아보기로 합니다.
* 삼상24:, 26: → 사울에게 쫓기다가 오히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만났는데, 그냥 지나갑니다. 당장이라도 사울의 핍박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이 기름 부은 왕이라며 살려줍니다. 자기가 다음 왕이 될 것이지만,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왕권이 이양되기를 바랐단 것입니다.
* 삼하1:17 이하 → 사울과 요나단을 애도하며 지은 노래(哀歌)가 나옵니다.(활 노래)
그리고 이 노래를 지가 혼자만 부른 게 아니라, 유대 사람들에게까지 가르쳐 부르게 합니다.
삼하1:19 보면 사울과 요나단을 가리켜 칭송을 합니다. “이스라엘아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심지어 삼하1:24에서는 사울의 업적을 치하합니다.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저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사울이 많은 과오를 범했지만 그래도 일부 공이 있었습니다. 암흑 같은 사사 시대를 끝내면서 이스라엘에게 외적의 침략과 궁핍으로부터 구해 주었습니다. 붉은 옷을 입혀주고 금 노리개를 채워줬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번영을 가져다 줬다는 표현입니다.

다윗이 요나단에 대해 애통해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사울에 대한 태도는 정말 대단합니다. 사울을 용서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그의 공적을 칭송까지 하다니! 보통은 정권이 바뀌면 직전 통치자의 과오나 들추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왕(前王)을 인정함으로써 반대 세력까지 다 포용합니다.

* 삼하2:8 이하 →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군대장관 아브넬이 정권을 세우고 저항 ... 그러나 할 수 없이 싸우면서도 인내하며 관용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동족 간의 싸움과 분열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7년 6개월의 시간을 끌면서도 무력으로 하지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스보셋 정권이 스스로 자멸하게 되고, 마치매 다윗이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왕이 됩니다.

* 삼하3:36 → 이런 원칙을 지키는 다윗의 모습에 백성들이 감동을 받고 절대 신뢰하게 됩니다.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 삼하5:1~3 →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다윗에게 찾아가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삼하5:1 “ ... 보소서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 신뢰와 사랑의 표현입니다. 만일 다윗이 무력으로 사울의 세력을 진압하려 했다면 힘으로 억누를 수는 있었겠지만, 진정으로 사랑과 신뢰를 받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무력으로 억누르는 것은 겉보기에 그럴 듯하지만 결코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언젠가 폭발하는 불안정한 휴화산과 같은 것입니다.

다윗은 이처럼 원수라도 용서하고 포용하고 인정함으로 참 평화를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자신도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고, 모든 백성에게 평화를 나눠줄 수 있었습니다. 사울이 자기에게 충성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다윗과 괜한 갈등을 일으키고 핍박했던 ‘트러블 메이커’였다면 다윗은 문자 그대로 ‘피스 메이커’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신앙과 삶을 본받아야 됩니다. 그게 곧 바른 신앙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라고 하면서도 얼마나 갈등과 평지풍파를 일으키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도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많은 불안과 고통을 가져다주는지 모릅니다. 우리 신앙은 달라야 합니다. 다윗처럼 피스 메이커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2]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사명 : 그리스도의 평화를 선포하는 피스메이커

우리는 다윗의 모범을 따라 피스 메이커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 중요한 특권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오늘 이 시대를 위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입니다. 우리는 이 특권을 누리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다음 몇 가지를 실천해야 될 것입니다.

① 평화의 복음 전파 : 평화를 위해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것은 복음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평화가 깨진 것은 인간의 죄악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죄가 있는 한 마음의 평화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우리 마음 속에 참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평화를 회복시키기 위해 친히 화목 제물이 되신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의인이 됨으로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게 됩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여러분, 이 평화가 없으면 세상 모든 것을 소유해도 불안합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인간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상호 간에 진정한 사랑과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엡2:13~1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이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 ... )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 ” 이렇게 해서 가정의 평화, 민족의 평화, 세계의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 복음화, 민족 복음화, 세계 복음화를 우해 헌신해야 됩니다.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는 평화를 전하는 일입니다. 선교도 마찬가지 세계에 평화를 전하는 일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사야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52:7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지난 주간에 중국 단기선교를 다녀왔습니다. 선교는 정말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새삼 느껴졌습니다. 새 개의 가정교회를 방문했는데, 생전 처음 보는 분들입니다. 앞으로 다시 볼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천국에서나 다시 볼 분들입니다.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금방 마음을 열고 가까워졌습니다. 서로 반가워하며 악수하고 얼싸안았습니다. 헤어질 때는 아무 섭섭해 했습니다. 특별히 두 교회에서 30명이 세례를 받았는데, 목사도 즐겁고 동행한 우리 교인들도 즐겁고, 본인들도 즐겁고, 현지 교인들도 즐겁고, 선교사는 두 말 할 필요도 없고 ... 금세 하나가 됐습니다. 이게 바로 평화의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모두 이 복음을 전파함으로 우리 가운데, 우리 민족과 세계 인류 가운데 평화를 만들어가는 피스 메이커의 사명을 감당하기 바랍니다.

② 용서 : 다윗이 용서함으로 모든 이스라엘 민족을 평화로 이끌었던 것처럼 용서는 평화를 창출합니다. 보복은 악순환을 가져옵니다. 용서만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17세 어린 시절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로부터 13년 동안 애매하게 종살이,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러나 그는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총리가 된 후에도 형들에게 보복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에 형들이 두려워하자 오히려 눈물로 그들을 위로합니다. 그리고 형들은 물론이고 후손들의 부양까지 책임지겠다고 약속합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만일 요셉이 보복을 했다면, 그 형들의 후손들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아마 보복의 악순환이 지속됐을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그러나 용서가 말처럼 그리 쉬운 게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어렵다 못해 불가능합니다.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지 이런 이야기를 책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두 상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경쟁 관계라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가운데 앙숙이 됐습니다. 안타까워하시던 하나님께서 천사에게 가서 중재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사는 한 상인에게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소원이 뭐요? 무슨 소원이든 하나님이 다 들어주신다고 했소.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당신의 라이벌인 그 상인에게는 그 두 배를 주실 겁니다.” 그 상인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한참 생각에 잠겼던 그가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답니다. “제 눈 하나를 뽑아주시오.” 상대방이 잘 되는 꼴은 절대 못 보겠다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용서를 실천함으로 평화는 만들어집니다. 다윗은 진심으로 용서할 줄 알았던 사람이기에 본인이 먼저 평화를 얻고 행복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용서를 실천함으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평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③ 화합 : 하나님은 화목하고 연합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마치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무슨 특별한 효도나 선물보다 우선 동기 간끼리 화목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롬12:18 보면 뭐라고 말씀합니까?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우리가 서로 화합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반대로 화합하지 못하고 분쟁과 다툼으로 갈등하고 분열되면 싫어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마12:25 “ ...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여러분, 다윗이 축복을 받고, 그의 통치 기간 중에 이스라엘이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바로 화합입니다. 다윗과 백성, 백성과 백성이 화합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다윗은 화합의 정치, 상생의 정치를 구현했던 사람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정치인들이 말로는 화합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문자 그대로 화합의 정치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모습을 심히 기뻐하시고 다윗을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자화상은 어떻습니까? 오늘 마침 8.15 광복 59주년인데 나라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착잡해집니다. 신문을 보고 방송을 들으면 정말 짜증이 날 지경입니다. 국내외적으로 좋은 소식이 거의 없습니다. 다 아시는 내용이지만, 아직 북핵 문제는 미결 상태 그래로죠. 국제 유가는 연일 퐁등하죠. 중국은 고구려가 자기 땅이었다고 주장해서 속을 긁고 있죠. 한미관계는 비끗거리죠. 선진국들은 저 앞으로 달려가고, 뒤에서는 후진 경쟁국들이 바짝 다가와 추월할 태세죠. 요즘 경제 신문을 보시면 자주 접하게 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브릭스(BRICs)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4개국의 영문 첫글자를 조합해서 만든 신조어입니다. 그 4개국이 곧 브라질(B), 러시아(R), 인도(I), 중국(C)입니다. 그 중에서도 중국은 우리 바로 옆에서 위협적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번 중국에 다녀오면서 피부에 닿으리만치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남부의 지방 도시들이었지만, 그곳에서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역력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행들이 이구동성으로 중국이 무섭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국내적으로 보면 또 어떻습니까? 새 정부가 들어선 지 1년 반이 흘렀습니다. 그러면 안정될 만도 한데 계속 시끄럽습니다. 17대 국회가 들어서면서 새 정치를 한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 구태 그대로입니다. 곳곳에서 분열과 갈등의 모습 투성이입니다. 여야, 노사, 지역, 계층, 세대간, ... 어디 하나 화합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구석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 부패 문제도 속히 청산되어야 하지만, 갈등과 분열의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어려울수록 더 화합해야 되는데, 그리고 화합하면 큰 역사가 일어날 텐데 ... 이것 해결하면 나머지 문제는 다 해결될 텐데 ... 정말 안타깝습니다.

민주 정치는 다양성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조화와 일치가 없으면 난장판이죠. 획일적인 일치야 나쁘지만 다양한 목소리가 하모니를 이루는 게 민주 정치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는 다양성만 있지 조화의 일치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우리 한국인의 기질을 꼬집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재미 교포에게 들은 말인데, 얼마나 통용되고 일리가 있는지 모르지만 한번 들어보십시오. 외국인들의 상점이 많은 지역에 한국인이 한 명 들어가면 외국인들이 겅계하기 시작한답니다. 그 다음 두 명이 들어오면 잔뜩 긴장을 한답니다. 한국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보면 다들 똑똑하고 능력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세 명이 들어오면 안심을 한답니다. 왜 그럴까요? 이제 자기들끼리 싸울테니까 걱정할 게 없다는 겁니다. 듣기 싫은 소리지만 한번 귀기울여 들어볼 말입니다. 혹시 우리들에게 서로를 인정하고 화합하는 게 부족한 게 아닌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러분, 시너지(Synergy)라는 말을 아시죠? 협력을 통항 상승 작용을 의미합니다. 여러 사람들리 힘을 합치면 정말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말도 있습니다. 아너지(Anergy)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분열과 갈등으로 인한 상충 작용을 가리킵니다. 서로 분열되고 갈등이 많으면 결국은 무력화되어 망하는 법입니다.

여러분, 밀림에서 가장 강한 동물이 무엇일까요? 동물 학자들에 의하면, 개미랍니다. 왜 그런가요? 개미 한 마리는 살짝 누르기만 쉽게 죽는 아주 약한 동물입니다. 그러나 협력하면 심지어 수 km 줄을 지어 다니며 맹수라도 격멸할 수 있는 위력을 발휘합니다. 우리 모두가 배울 지혜입니다.

사실 우리 한국인도 잘 보면 협력을 잘 하는 민족입니다. 2002년 월드컵 대회 때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그 붉은 물결,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리고 1997년말 IMF 외환위기 직후에 온 국민이 장롱에 있는 금까지 꺼내다 바치며 금모으기 했던 것을 기억해 보면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 모습이 다 어디로 갔는지 답답할 뿐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이 솔선하여 곳곳에서 화합 운동을 일으키면 좋겠습니다. 서로 인정하고 격려하고 하나가 될 때 반드시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혹시 우리의 역량이부족해도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또 합심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반드시 이 나라 이 민족을 일으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다윗은 평화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를 체험한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평화를 사람들과 나눌 줄 아는 사람, 가슴이 넓어 모든 사람을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피스메이커였던 것이죠. 그래서 자기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 신앙이 참되다면 우리도 동일하게 피스메이커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특권이요 사명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다윗처럼 피스메이커로 행복을 나누며 사는 아름다운 인생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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