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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배를 담은 질그릇 (고후 4: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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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신 목사 (양정교회)
 
  인간은 질그릇 같은 존재입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그릇입니다. 아무런 장식이나 색을 칠하지도 않아서 생김새가 볼품이 없습니다. 불속에 한번 만 구워냈기 때문에 옹기그릇처럼 단단하지도 않습니다. 살짝만 건드려도 금이 가고 깨지기 쉬운 것이 질그릇입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질그릇이라고 표현한 것은 보잘것없고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작은 충격에도 상처받고 작은 일에도 실망 잘하고 낙심 잘하는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질그릇을 무엇에 쓰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 질그릇에 보배를 담으셨다고 했습니다.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는 이 말씀은 곧 보배를 담았다는 것입니다.
  그릇은 무엇이 담겼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집니다. 
  그릇에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됩니다. 우유를 담으면 우유통이 됩니다. 쓰레기를 담으면 그것은 쓰레기통입니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질그릇이라 해도 보석을 담으면 보석함이 됩니다. 보석이 담긴 질그릇은 더 이상 질그릇이 아닙니다.

  1. 하나님이 이 질그릇에 담아주신 보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질그릇인 우리들에게 담아주시는 보배는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보배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무엇이 보배인가” 라는 문제는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습니다. 이 보배에 대하여  '칼빈'(Calvin)이나 '핫지'(Hodge)는 이를 “사도직”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레트'(Barrett)나 '알포드'(Alford)라는 신학자는 보배를 “복음”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두 가지 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도직을 말하든 복음이든 분명한 것은 우리의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고후 4:6절 말씀을 보면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질그릇 같은 우리 마음에 비추어 담긴것입니다. 누가 담겼습니까?
  예수가 담겼습니다.
  내안에 예수가 있으면 보배를 간직한 것입니다. 최근 파리의 여인이라는 드라마에서 어떤 연기자가 좋아하는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내 안에 너 있다” 라는 대사를 하여 유명해졌습니다.
“우리는 내 안에 주님 있다” 라고 표현할수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섬기는 사람들은 보배를 가진 사람입니다.
  고전 3:16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전 6:19절에서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라고 했습니다.
  누구 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시인하게 하면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보배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세상에서 가장 귀한 가치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살아 가야하는 이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알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2. 보배를 담은 질그릇의 모습
  보배를 가진 질그릇은 더 이상 질그릇이 아닙니다. 이제는 보배로운 그릇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보배를 가졌다면 보배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은 질그릇이라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① 보배를 가진 사람은 어떤 어려움에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고후 4:8-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보배를 가진 사람은 아무리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해도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거나 상처받지 않습니다. 쉽게 절망하고 낙심하는 것은 마음에 보배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천지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내가 품고 있는데 세상의 그 무엇이 내 심령을 이지러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용기를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② 보배를 가진 사람은 참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요 16:22절에 보면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 누구도 빼앗을 없는 기쁨이 있다면 그것이 보배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예수님을 볼 때 누구도 빼앗을 수없는 기쁨이 생겨집니다. 예수님이 바로 보배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넘치는 기쁨과 행복은 마음에 보배를 간직한 사람들만 체험할 수 있는 축복입니다.

  초대 교부 크리소스톰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하라는 로마 황제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는 황제의 명령을 듣지 않아 체포되었습니다.
  "그놈을 독방에 처넣어라"
  "아니 되옵니다. 기도교인들은 독방을 더 좋아합니다"
  "왜 그런고?" "조용한 기도실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잔인무도한 악당들이 있는 곳에 집어넣어라" "그것은 더욱더 아니 되옵니다. 악당들을 전도하여 기독교인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끌어내어 목을 쳐라" "폐하! 그건 더욱 아니 되옵니다"
“왜 그것도 안된단 말이냐?"
  "기독교인들은 순교를 최상의 영광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도 헛일이옵니다. 그들은 순교할 때 울지도 않사옵니다.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얼굴에서 광채가 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담은 마음은 어떤 환경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습니다.
  세상은 "잠시의 쾌락"만을 줄 수 있지만 주 예수께서는 충만하고 영원한 기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요 15:11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쾌락은 환경에 따라 좌우되지만 기쁨은 내적인 것이어서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쾌락은 항상 변하지만 기쁨은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적인 즐거움 뒤에는 흔히 우울함이 따릅니다. 그러나 참된 기쁨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히13:8)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근거가 있습니다
  쾌락을 계속 유지하려면 우리는 쾌락을 주는 것들을 끝없이 찾아 다녀야 합니다. 왜냐하면 쾌락이란 사람의 손에 영원히 붙들려 있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이와 반대입니다. 기쁨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선물입니다.
  쾌락은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지만 기쁨은 자기희생에서 출발합니다.
자기 만족을 추구하면 할수록 더 공허하게 됩니다. 오늘 한 잔 분량의 쾌락으로 즐거울 수가 있다면 다음 날은 한 통 분량의 짜릿한 흥분이 있어야 즐거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우리 자신을 희생하여 내어 주는 것에 기초를 둡니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초점을 두는 것이 어떤 삶인지를 알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모두 채워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더 큰 만족을 얻게 됩니다. 오직 주님의 것을 구할 때에만 떠나지 않는 기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으로 널리 알려진 워너 메이커(1838-1922)는 체신부 장관까지 지낸, 모범적인 크리스찬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한 가정의 아버지, 대사업가, 체신부 장관이면서 교회에서는 주일학교의 지도자로 봉사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로 그는 유명해졌습니다.
  "사업이나 공직은 부업이지만, 주일학교를 비롯한 교회일은 내 주업입니다."
  그의 사업 60주년 기념 파티에서 친구가 질문했습니다. "자네가 이렇게 큰 사업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83세의 워너 메이커 씨는 간단히 대답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바쁘게!"
  예수님을 소유하면 기쁨이 찾아 옵니다. 그분이 바로 보배이기 때문입니다.
 
  ③ 보배를 가진 사람은 마음이 넉넉해집니다.
  행 5:41절에 보면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말도 되지 않는 공격적인 비난의 화살을 맞고서도 그들은 마음에 상처받지 않았습니다. 실망이나 절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보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진정한 보배를 담은 사람은 누가 뭐래도 상처받지 않습니다.
  넉넉한 마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어느 사람이 미국 여행 중에 친지의 집에서 묵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그 집 부부를 따라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귀부인답게 품위 있는 야회복을 입은 안주인이 목에 눈부신 목걸이를 하고 나왔습니다.
  그 모습을 본 여행객이 부인에게 농담을 던졌습니다.
  “그렇게 차려입고 나오니 가짜 목걸이가 꼭 진짜처럼 보입니다.”
  여행객은 자신의 농담이 입에서 끝나기도 전에 자신이 실수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파티에 참석하려고 정성껏 가꾸고 나온 귀부인에게 가짜 목걸이 운운했으니, 세상에 남의 아내에게 그 보다 더한 실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행객의 예상과는 달리, 그 부인은 아주 밝은 표정으로 한바탕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이 목걸이가 가짜인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실은 뉴욕의 밤거리가 위험하기 때문에, 전 진짜는 늘 금고에 넣어두고 외출할 때는 이처럼 가짜만 착용 한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소중한 것 을 깨닫게 합니다. 
  만약 그 부인에게 진짜 보석이 없었다면, 그녀는 여행객의 말에 깊은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무례하게 말할 수 있느냐고 화를 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인이 상처받기는커녕 오히려 여유 있게 웃음으로 받아넘길 수 있었던 것은 그녀에게는 진짜 보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짜가 있었기에 가짜도 자랑스러웠던 것입니다.

  진짜만 상처받지 않습니다.
  무엇에 의해서든, 누구에 의해서든, 내가 아직도 상처받는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내가 아직 진짜가 되지 못했거나 아니면 자신 안에 있는 참 보배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의 영을 그 속에 모시는 자만 어떤 경우에도 상처받지 않는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있음입니다.
  주님 보내신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보배를 담아놓은 질그릇이 된 것입니다. 더 이상 보잘것없는 질그릇이 아닙니다. 보배 함이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보잘것없는 질그릇처럼 살지 마십시오.

  미국의 16대 대통령은 이 보배를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는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된 다음 선거에서 가장 악랄하게 자신을 비난하며 해를 입혔던 다른 당 출신의 스텐턴 이라는 사람을 국방장관에 기용했습니다.
  사람들은 남북전쟁으로 나라가 어지러울 때 원수를 국방장관에 임명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다 만류했지만 그는 원수를 자기의 친구로 만들었습니다.
  스텐턴은 링컨의 마음에 감동받아 헌신적으로 국방장관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후일 링컨이 저격수의 총탄에 쓰러졌을 때 달려가서 가장 슬퍼했던 사람이 스텐톤이었습니다. 자기 마음 안에 보배가 있는 사람은 원수를 용서하고 오히려 친구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마음에 보배가 있는 사람은 자기를 미워하는 자와 죽이려는 원수들까지도 포용하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질그릇은 아주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보잘 것 없는 존재인 우리 마음에 가장 고귀하시고 사랑 많으시며 은혜로운신 예수님께서 자리하고 계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여전히 온갖 잡동사니 물건을 담아놓은 그릇처럼 세상의 온갖 걱정 근심과 시기 질투 미움 이런것 담아두고 살아갈까요? 아니면 기쁨이 넘치고 사랑이 넘치며 넉넉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포용할 수 있는 차원이 다른 그릇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어떻게 하면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 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의 참여해야 합니다.
  11절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 죽인 것”이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몸에 짊어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 15: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갈6:17절에서는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질그릇과 같이 보잘 것 없는 우리의 육체에 예수 그리스의 고난의 흔적을 새기는 것이 보배를 담는 것입니다.
  나의 몸에는 어떤 흔적이 새겨졌습니까?
  교회를 위한 수고, 복음을 위해 흘리는 땀방울, 모두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골 1:28-2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복음을 위해서 성령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배를 마음에 간직한 사람은 복음과 교회를 위해,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해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예수님의 생명이 역사합니다.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는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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