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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식일인데 (요 5: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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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장영일 목사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 대 12)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 시작하면서

오늘 설교 본문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기적을 믿으면서도 기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기적을 믿으면서도 왜 자기 앞에 일어난 기적을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사실 오늘 현대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많습니다. 기적에 대한 기대가 없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2. 기적의 경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벌써 하나님으로부터 일어나는 경이로움과 환희의 경험이 오래 된 경우입니다. 유대인들은 늘 모세 시대의 출애굽의 기적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홍해를 가른 이야기, 나중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요단강을 마르게 하고 건넜던 그 일에 대한 이야기, 사사 시대의 위대한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다윗 임금의 전설 같은 골리앗을 이긴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을 어릴 적부터 듣고 자라 하나님의 하시는 기적은 믿었지만,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자기 자신들이 그런 일들로 놀랐고 기뻤던 경험들이 없으니 자기 앞에 일어난 기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비슷한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믿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에게 그런 일들에 대한 경험이 없습니다. 혹은 과거 10년 아니면 더 이전에 믿음의 출발을 할 때 자신에게도 하나님 체험이 있었지만 그 일이 지속되지 못하고 이젠 감감한 옛 추억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 앞에 일어난 기적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혹은 새로운 기적에 대한 기대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신앙의 냉소주의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동요를 부르며 춤을 추면 어른들은 귀여워하긴 하지만 더 이상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또 그런 예쁜 짓을 기대하지도 않는 것과 같습니다. 젊은 연인들이 장난을 치며 재미나게 노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생각하기를 ‘한 때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그런데 말이야 다 헛거야~ 사랑? 그 사랑 별거 아니야~“ 하면서 젊은 연인들의 사랑 행위를 폄하해 버리고 마는 것을 두고 사랑의 냉소주의라고 합니다. 냉소주의는 허무주의와는 다릅니다. 냉소주의는 그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더 이상 그 존재를 살만한 에너지가 없어진 것입니다. 에너지가 고갈된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삶(기적)에 대한 기대도 희망도 갖지 못하고 투덜거리고만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냉소주의는 신앙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신앙을 살지 못합니다 아니 신앙을 살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 의미를 예를 들어 생각해봅니다. 우리 교회가 당면한 일이 곧 건축입니다. 우리 대부분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에겐 많은 어려움이 앞에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것이 곧 건축 재정일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방법으로 건축이 완공될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들으면서 대부분이 아멘!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방법인 기적이 나 자신을 통하여 일어날 것을 기대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신앙의 냉소주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혹은 이 말을 들으면서 ‘목사들 다 하는 소리지!’ 하고 속으로 찬웃음을 짓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자리에 나와 예배드리는 분 중에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다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까지 믿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살아 계셔 섭리하시며 우리의 삶의 현장에 함께 하시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도록 기적을 베푸실 분이십니다.

우리는 깨어 있도록 애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한 경이로움과 환희가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 방법이 곧 항상 기뻐하는 것이요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요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삶의 태도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순수함을 잃지 않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3. 율법에 메여 있기에 그렇습니다

또 다른 이유 하나는 율법에 메여 종노릇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유대인들이 메여 있던 율법이 안식일 규례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10절)

우리가 백보 양보해서 그 유대인들을 좋게 봅시다. 그들은 평소에 베데스다 못가에 살던 병자들을 긍휼히 여겼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루 속히 나아서 건강한 사람이 되기를 빌었을 것입니다. 지나가면서 그들에게 ‘샬롬!’으로 축복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38년 된 그 병자에게도 수 없이 축복해주며 매일 안부까지 물었을 것입니다. 그랬던 그 병자가 나아버린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모두 야호 하며 주변의 병자들이 좋아하며 함께 기쁨으로 환성을 지르는데 유대인들에겐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가 안식일에 고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태도가 바뀌어졌습니다. 고침 받은 그 병자를 축하해주며 잔치를 벌여주어야 할텐데 안색이 변하였고 굳어지면서 그 병자에게 다가와 심각하게 말했습니다 -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그들을 묶어버린 것이 곧 안식일 율법이었습니다. 기적 곧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면서도 그들의 머리엔 율법 조항이 먼저 떠올랐던 것입니다. 율법으로 기적을 심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은 옳지 않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일을 행한 자가 누구냐?’(12절)고 물으며 마치 수사관이 범인을 색출하려는 듯한 모습으로 예수를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고 준수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까지 올라왔던 것입니다. 율법은 분명히 우리를 인도하며 지키는 가이드 라인입니다. 시편에 여호와의 율법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고 했습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할 때 도로 위에 그어진 차선을 따라 갑니다. 차선을 따라 가지 않으면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 차선이 생명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2차선 달리다가 보니 절벽에서 떨어진 큰 돌맹이들이 가로 놓여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도 절개지에서 돌들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습니다. 2차선이니까 중앙선을 넘어가면 안 된다고 하여 그 돌맹이 위로 계속 가야합니까? 분명히 우리는 상대 차선을 살핀 후에 중앙선을 넘어가 그 지점을 지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넘어갈 수 없는 중앙선을 넘어갔다고 난리법석을 떠는 것입니다. 도로 교통법을 어겼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이 바람에 뒤차들이 막혔고 언제 절벽에서 돌이 또 떨어질지 모르는 도리어 더 큰 위험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이와 유사한 율법주의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율법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적용하는 사람이 기계적으로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3-27)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3-5)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4. 마무리 하면서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중에 배우고 익히는 것이 바로 질서와 규율입니다. 매우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그 질서와 규율들이 살기에 편리하게 해주고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줍니다. 그러다 보니 순수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질서와 규율이 도덕의 기준이 되어버렸고 안전만이 행복의 길이라고 여겨버렸습니다. 여유에서 오는 평안, 순진함에서 오는 웃음과 짜릿한 기쁨, 자연에 대한 경의 등의 가치는 썰데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있는 듯 합니다. 기적은 합리성과 과학성을 깨뜨리는 위험한 것으로 경계 받고 있습니다. 교회 생활에서도 새로움을 향한 실험은 전통을 깨뜨리는 위험스러운 것으로 주의를 받고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하심을 막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의 행동들은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었고, 특히 안식일 규율을 깨는 것은 그들의 공동체를 깨뜨리는 가장 위험한 것으로 인식하고 예수님을 핍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절)

예수님은 안식일에 일하는 것의 판단은 율법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안식일의 휴식은 무노동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누리는 환희가 참된 안식입니다. 우리의 안식은 오직 주님 안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주님의 품에 안기시기 바랍니다. 주의 영이 역사하시는 대로 순종하면 참 기쁨과 안식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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