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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때를 따라 돕는 은혜 (히 4: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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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이용호 목사

'때를 따라 돕는 은혜' 이 제목에 두 가지 큰 개념이 있습니다. '때'와 '은혜'라는 개념입니다.
  어느 집에 스무살난 아들놈이 부모 앞에 자꾸 반항을 합니다. 집을 나가겠다며 부모에게 근심되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가족회의를 했습니다. 식구들을 다 모아놓고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윽박지르면서 말을 합니다. "얘, 네가 걸핏하면 집을 나가겠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그래?" 아들이 하는 말이 "내 인생을 바로 살기 위해서 나가려고 합니다" "그럼 도대체 네가 추구하는 인생이 무엇인데 집에서는 안되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냐!" "제가 바라는 인생은 돈도 많이 벌고요, 여행도 많이 다니고요, 마음에 맞는 여자도 만나고요. 그렇게 즐겁게 사는게 제 인생입니다. 우리 집에서야 어디 그런게 됩니까?" 하니까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면서 "야 임마, 그런데 있거든 나하고 같이 가자" 하더랍니다.

  현재 선 자리에서

  별 의미없이 한번 웃고 넘어가는 이야기 같지만 이 시대에 어떤 의식을 상당히 풍자하는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지금 여기 머물러 있는데서, 내가 하고 있는 일,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만족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톨스토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나하고 만나고 있는 사람이다." 나 하고 같이 살고 있는 가족, 나 하고 같이 일하고 있는 직장의 동료, 함께 교회를 섬기고 있는 교인들끼리 보람과 행복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지금 내 앞에 있는 너는 아니다, 너는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하는 식으로 자기 앞에 현재 있는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른다는 것이고, 내가 현재 하는 일 속에 가치가 있다는 것을 못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때를 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가 우리 앞에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찌니라"고 했습니다. 이 때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정한 때가 있습니다. 전도서 3장에 보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때를 가리켜서 우리편에서는 믿음으로 순종으로 다가가야 됩니다. 하나님이 정한 때는 우리가 믿음으로라야 그 때를 만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 때를 만나게 되고 믿음으로 순종할 때 그 때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때는 나를 위한 때를 예비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내 소원과 내 필요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신비로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 앞에 자기 육체의 가시가 없어지기 위해서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바울에게 응답하시는 말씀이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응답한 이 말씀 속에 때와 은혜의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를 정하시고 그 때에 우리의 때를 연결시킵니다. 우리의 필요, 우리의 소원은 여호와 하나님의 때와 부합할 때 은혜가 되고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명을 위한 은혜

  그러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는 이 말을 세 가지 측면에서 접근을 해 보겠는데 첫번째로 은혜는 사명을 위한 은혜입니다. 전도서 3장1절에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때를 정하시는데 이 때에는 목적을 이루는 때가 있다 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은혜를 구할 때 사명을 위한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목적을 이루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은혜는 일을 위해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기를 구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엘리아야, 네가 할 일이 아직 있다.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후계자를 삼으라" 이 사명을 주시면서 엘리야를 다시 일으켜 세웠던 것입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는 이 개념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있다 라는 것입니다. 때도 사명과 연관이 되고 은혜도 사명과 연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때를 구하는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은혜의 목적입니다.

  두번째, 때를 따라 돕는 은혜란 말은 항상 우리에게 허용되고 머물러 있는 은혜라는 말입니다. 항상 은혜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의도하신 때에 필요한 은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안에 있는 우리는 언제나 임마누엘의 영역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고 있는 사실을 믿고 순종할 때 때를 따라 돕는 은혜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정시기도가 되어야 수시기도가 가능하다." 교회에서 시행하는 기도회에 참석할 줄 알아야 평상시에 개인기도생활에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는 기도회,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하는 그 기도회에 참석할 줄 아는 성도라야 평소에 혼자서도 하나님 앞에 기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하는 기도회도 외면하면서 개인기도생활을 하는 줄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교회 공예배가 안되는 사람은 혼자서 경건훈련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교회의 정시 프로그램에 내가 헌신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모이자 하는 거기에 모여야 됩니다. 월례회에 참석을 해야 됩니다. 기도회에 참석을 해 보아야 됩니다. 기도회에 참석하는 그 습관이 나로 하여금 수시로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내가 일상적으로 수시 기도가 되는 거기에 교회행사에도 참여가 되는 것입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는 말은 평소에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때는 사명이고 은혜도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임마누엘 은혜 안에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런 때와 은혜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길

  저가 천안에 가서 들은 이야기인데 교수님 한 분과 학생 몇 사람이 승용차를 타고 가는데 신호대기로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승용차 뒤에 버스가 와서 서더랍니다. 잠시 후에 그만 트럭이 신호대기 중인 버스를 추돌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버스가 앞 승용차를 추돌해서 타고 있던 일행이 사고를 당했습니다. 사고의 경위를 알아보니까 참 묘하게 되었습니다. 이 버스가 원래 트럭 뒤에 따라왔다고 합니다. 이 트럭이 음주운전으로 왔다갔다 하니까 버스기사가 뒤에 따라가다가는 위험하겠다 싶어서 이 트럭을 지나서 다른 차선으로 달려와서 이 버스는 교수가 탄 승용차 뒤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버스가 뒤의 트럭을 피해서 차선을 바꿔 섰는데도 트럭이 와서 뒤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트럭이 앞의 승용차를 바로 받았으면 그 차안에 탄 사람들은 즉사했다는 것입니다. 버스가 뒤에 받혔는데 정도가 심하게 받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도 안했는데 버스가 뒤에 와서 얼마 안되는 동안에 이런 사고가 났다는 것입니다. 버스가 아니었더라면 그 사람들은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험한 가운데도 하나님의 보호가 있구나 그것을 절실히 느끼게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감당치 못할 시험을 당치 않고 부상은 약간 입었지만 그 정도로 사건이 수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잊어버리고 살아도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고 계시다는 것을 항상 믿고 살아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입는다는 것입니다. 요행을 가지고 때를 기다리는 도박같은 개념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게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고자 하는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때를 따라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내게 주시는 은혜

  세번째, 내게 주시는 오늘의 은혜를 받고 산다는 개념입니다. 은혜는 내게 주시는 은혜라야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궁무진하지만 내가 그 은혜를 받지 못하면 나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은혜는 개적으로 받는 개념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10절에서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은혜받는 데는 아무리 욕심을 부려도 과욕이 안됩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것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과욕이 안됩니다. 우리는 헛된 욕심을 너무 많이 부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위해서는 아무리 과욕을 부려도 그것은 무리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으로 살아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만 하고 일만 한 사람으로 보지만 안 그렇습니다. 바울 서신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서 계속 그 은혜를 바라보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뛰어갔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 주님을 향하여 뛰어가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갔다는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 교회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은혜받는 열정과 함께 일을 해야 됩니다. 은혜를 받는 열정, 기도하는 열정,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뛰어가는 그 열심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해야만 아무리 해도 지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받는 일을 등한히 하고 기도생활을 등한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멀어지면서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일군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주님을 향한 열정, 그 은혜를 사모하는 열정이 넘쳐나고 있는 모습을 배우길 바랍니다. 

  언젠가 밤늦게 교회에서 커피를 먹기 위해 친교실에 들어섰는데 기도하는 소리가 좌석에서 들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에게 방해가 될까봐 불을 못켰습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까 열심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커피를 빼면 동전이 '찰카닥'하고 소리가 나니까 그냥 생수를 한 모금 뺐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하도 열정적으로 기도를 하기 때문에 방해를 안 받고 계속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개인이 혼자서 기도를 하는데 그렇게 뜨겁게 열정적으로 기도하는게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내가 은혜받기 위해서 욕심을 부리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남이 은혜받는 것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목말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은혜를 누려야 됩니다. 이 때라는 개념은 오늘이라는 개념이 강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항상 현재를 강조합니다. 오늘 받는 은혜라야 됩니다. 어제의 만나 말고 오늘의 만나를 내가 얻어야 합니다. 내게 주시는 은혜, 오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내게 주시는 오늘의 은혜를 입은 자는 나로 인하여 타인에게도 은혜를 입게 합니다.

  은혜는 언약이요 책임이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용어로 보면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은혜를 문자적으로 이렇게 해석합니다. "자격이 없는 자에게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호의" 자격이 없는데도 그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그에게 좋은 선물을 주는 것을 가리켜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는 은혜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자격있는 자처럼 대해 주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거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라는 말에는 그런 문자적인 뜻으로 못난 사람이 잘난 사람 앞에 호의를 받는 개념으로 보면 안됩니다. 이 은혜에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연결이 됩니다.

  첫째, 은혜는 계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 아래서'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말할 때는 메시야와 연관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러니까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그것이 언약아래서의 은혜다 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은혜는 거룩한 책임성이 따라옵니다. 은혜받은 자는 하나님의 앞에 은혜받은 자로 살아드리는 책임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거져 주시는 은혜를 거져 받고 살면 그것은 복이 되지 않습니다. 은혜가 복이 되려면 은혜에 대해 영적인 의무감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언약 아래에 있습니다. 이 은혜를 받은 자가 복이 되도록 살게 되어 있는 언약의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책임하게 받으면 오히려 저주가 됩니다. 이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은혜가 목적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드림으로써 은혜받은 우리가 복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의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 은혜의 책임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은혜받은 네가 복될찌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네가 내게 이렇게 살아가라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구하는 우리가 이 본문 안에 14절, 15절을 놓치면 안됩니다. 우리가 자꾸 4장16절만 가지고 앞의 것을 잊어버리기 쉬운데 앞의 두 구절이 오히려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은혜의 주체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이것을 전제하지 않고는 은혜를 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이야기 할 때는 예수가 누구냐는 것과 그 예수가 은혜의 주체자라 하는 그것을 고백해야 됩니다. "큰 제사장이다"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고 우리를 중보하시는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승천하신 자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은혜는 하늘에 계신 승천하신 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고백이 은혜를 받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 제사장은 우리에게 연약함을 체휼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다, 십자가를 경험하며 우리의 죄의 고난을 함께 지신 분이다 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때를 따라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주체자다, 은혜의 근원이 승천하신 자 곧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가 내려온다 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우리는 두 가지 자세로 은혜를 받는 비법을 실천해야 됩니다.

  위로부터 임하는 은혜

  첫째는 위로부터 임하는 은혜를 구해야 됩니다. 골로새서 3장1절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믿고 나서 우리가 영적으로 교만해지기 쉬운 요소가 있는데 예수는 믿으면서도 위의 것을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위의 것을 찾지 않고 예수믿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더 잘못되면 땅의 것만 찾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땅의 것만 집착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이 둘 다 부족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은혜의 근원입니다. 은혜는 찾는 자에게, 사모하는 자에게, 바라보는 자에게,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목하고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몽골 사람들의 평균시력이 2.9라고 하는데 참 놀라운 것입니다. 시력이 가장 좋은 사람은 7까지 나온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시력이 좋다 해도 2.5 정도 나온다고 합니다. 그만큼 몽골사람들은 공해없는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살기 때문에 영향이 많다 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시력이 민감해야 됩니다. 위를 바라보는 시력이 있어야 합니다. 위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위를 바라보는 시력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믿음으로 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습니다. 땅의 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그 사람만큼 피곤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위의 것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예배당 짓는다고 우리 교인들이 수고를 많이 합니다. 옛날에는 예배당을 지으면 자갈을 나르고 벽돌을 나르는 등 몸소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전문가들이 다 합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이 일하는 거기에 우리가 하나 놓치지 말 것은 기술자들이 집을 짓지만 그들이 우리 예배당을 지어주는게 아닙니다. 성도들은 전문가들이 집을 짓는 거기에 맞추어서 더 기도하고 더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더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힘이 드는 헌금도 믿음으로 드릴 때 보이는 집이 기술자들의 손에 의해서 지어지는 줄 믿습니다. 내가 함께 애를 쓰면서 집이 지어져야 그 건축을 통하여 내가 복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전을 건축하는 이 기간에 더욱 위를 바라보는, 위의 것을 구하는 영적인 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성전건축으로 변화가 일어나야 됩니다. 변화가 일어나야 부흥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얼마 후에는 대신고등학교에 피난살이를 가야 합니다. 피난 가서 불편한 게 문제가 아닙니다. 피난 가서 영적으로 변화만 받으면 그런 피난은 두세 번 가도 괜찮습니다. 피난 가서 영적으로 변화를 받읍시다. 입당하면서 또 변화를 받읍시다. 그래야 우리가 집을 짓는 영광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집을 짓는데 나는 점점 굳어져 가고 나는 점점 못나져 간다면 그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위의 것을 바라보는 것은 은혜를 받는 첫걸음입니다. 은혜 받는데에 지나칠 정도로 욕심을 부리십시오. 잠자는 관리집사를 깨워서 예배당 문을 열어달라는 열심도 내십시오.

  대가를 지불할 때 열매를 거둔다

  두번째,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믿는 성도들은 그 은혜를 위해서 영적인 대가를 지불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 돈주고 못삽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제나 영적인 값을 요구합니다. 육적인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는데는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선물을 사드려도 통하지도 않고 그분 앞에서 이 세상의 어떤 것을 가져가도 거래가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우리의 영적인 것을 요구하면서 은혜를 주십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 말은 영적인 것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요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영적인 것을 드릴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희생을 하기 바랍니다. 영적인 희생이 무엇입니까? 내가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영역이 전부 영적인 희생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시간을 내는 것도 영적인 희생입니다. 몸을 바쳐 수고하는 것도 영적인 희생입니다. 

  어떤 신학생이 학기말 시험을 쳐야 되는데 공부를 안 했습니다. 필수과목 점수가 안나오면 낙제를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시험지를 받아보니까 아무리 해도 학점이 안나올 것 같았습니다. 고민하다가 거의 백지 답안지를 써내게 되었는데 맨 밑에 이렇게 교수 앞에 아양을 떨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답을 다 아십니다. 저는 그 답에 무조건 아멘합니다." 시험지를 냈습니다. 그리고 채점결과가 나왔습니다. 답이 이렇게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만점, 너는 빵점."
  하나님은 모든 답을 다 아십니다. 그러나 내가 그 답을 찾아가는 대가를 지불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주시는 것이라 해서 그야말로 거저 임하는 줄로 알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어느 집회에 가서 은혜를 받으려 하면 그 집회를 위해서 내가 기도하고, 은혜를 받는 영적인 대가를 지불하고 그 집회에 가면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거저 한번 참석해 보자 하고 가면 은혜를 못 받습니다. 그렇게 해서 받는 은혜는 은혜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느낌이고 감동이지 아무 열매가 없습니다. 진정 은혜를 받은 사람은 열매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얼마나 예배를 즐겨 버리고 열매없는 예배를 많이 드리느냐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은혜를 받았으면 열매를 맺는 삶을 가져야 됩니다.

  맺는 말

  때를 따라 돕는 은혜는 두 가지 요건을 하나님이 요구합니다. 때를 바라보고 구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은혜주실 그 때는 하나님께서 정해놓았습니다. 그것을 당겨서 요행처럼 구하지 말고 다 맡겨놓고는 무조건 우리는 위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기 위해서 영적인 대가를 지불해야 됩니다. 값을 지불해야 됩니다. 수고를 지불해야 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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