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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신을 포기할 때와 고집할 때(단 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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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서정호 목사 

남태평양의 원숭이 잡이

남태평양의 섬들에서는 이런 재미있는 방법으로 원숭이를 잡는다고 합니다. 나무에 줄로 묶어 놓은 여러 개의 야자열매에 작은 구멍을 내고 땅콩을 잔뜩 넣어 두고 멀리 숨어서 잠시 기다리면 원숭이들이 땅콩 냄새를 맡고 하나 둘 몰려옵니다. 주위를 살피다가 야자열매 구멍에 손을 쑥 집어넣고는 땅콩을 한 줌 콱 쥡니다. 그 때 사람이 줄을 들고 나타나서는 원숭이를 잡는 것인데, 원숭이들은 꽥꽥 소리를 지르고 펄쩍 펄쩍 뛰기만 할 뿐 도망을 가지 못 합니다. 왜냐하면 야자열매에서 손이 빠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땅콩을 놓아 버리면 손을 뺄 수 있는데, 땅콩을 포기해야 자기가 산다는 것을 이 원숭이들은 생각하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포기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원숭이들은 한 줌의 땅콩과 그들의 자유와 생명을 맞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포기는 성숙을 향한 발판

사람들은 '포기'라는 단어를 싫어합니다. 우리 문화에서 '포기'라는 말은 '패배' 혹은 '좌절'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할 때 우울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러나 '포기'라는 단어에 대한 이런 부정적 생각들은 '포기'라는 삶의 태도에 대한 극히 단편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원숭이 잡이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포기야말로 우리의 삶이 성숙과 성장, 자유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사람이 30대가 되면 20대의 몸매, 피부, 체력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20대에 축구장에서 3시간을 뛰기 전에는 내려오지 않았던 사람도 50대가 되면 1시간만 뛰고 다음 날을 위해서 내려와야만 합니다. 미련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30대엔 적당히 장미 빛을 잃은 피부가 자연스럽고, 40대엔 원숙미가 흐르는 주름이 아름다운 법입니다. 눈 밑의 주름과 탄력성을 잃은 피부를 영원이라는 세계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이끄는 인도자로 볼 수 있을 때 우리 삶은 비로소 깊이와 아름다움을 더해 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포기는 우울해 해야 할 일이 아니고 새 것을 얻기 위해 옛 것을 버리는 현명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유아 시절의 의존심을 포기함으로써 비로소 성숙한 성인으로써 대접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 청소년기의 책임 없는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책임성 있는 사회적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외모와 인기, 멋진 몸매와 같은 청년 시절의 관심거리에서 벗어남으로써 비로소 진지하게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 우리의 젊음이 영원하리라는 불멸에 대한 환상을 버림으로써 죽음이라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고 인생의 진실에 대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미련을 포기함으로써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서 더욱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잃어버린 연인에 대한 미련을 포기함으로써만이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보는 나만의 안경을 고집하는 일을 포기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안경으로 세상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포기란 우리의 삶을 더욱 성숙하고 더욱 의미 있는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엔진의 역할을 합니다. 포기하지 않는 삶은 우리를 영원히 과거와 미련과 자기연민의 감옥에 묶어 두는 것입니다.

피터팬 증후군

포기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우리는 '집착'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데, 집착이라는 접착제로 삶이 과거에 고정되어 버린 사람들을 가리켜 '피터팬 증후군' 환자라고 부릅니다. 미국 심리학자 댄 카일러 박사가 1983년 '피터팬 신드롬' 이란 저서를 발표하면서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이 용어는, 책임 있는 자리로 나가기 싫어하는 '무책임', 이기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지나친 자기애', 유아기적 자기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는 '왕자 병', '마마보이' 등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포기해야만 할 것들에 집착하는 사람만큼 안쓰럽고 불쌍해 보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포기란 삶의 태도는 영적 세계에서도 무척이나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자격으로 포기를 종종 너무나 중요하게 거론하셨다는 사실은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고 야고보 사도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욕심은 어디서 올까요. 집착입니다. 불행의 모든 원인은 집착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지난 것이든 앞으로 일어날 그 무엇이든, 또 보이는 물질이든 보이지 않는 정신이든 그 무엇에 붙잡혀 있는 것. 집착은 정말 금물입니다. 삶은 끊임없이 변화되는 것이지 고정된 사진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변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침햇살에 비친 논두렁의 거미줄이 영롱합니다. 금방 햇살에 이슬이 마르고 빛은 사라집니다. 그러면 금방 피어오르는 꽃잎이 있습니다. 저녁노을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금방 내 어둠이 내려옵니다. 이것이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집착합니다. 아침햇살에 비친 영롱한 거미줄에 집착하고, 노랗게 물든 저녁노을에 고정됩니다. 그래서 한낮에 햇빛에 빛나는 녹색을 보지 못하고,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지 못합니다. 집착은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정말 쪼잔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 집착은 무지의 산물입니다. 집착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 지혜중의 지혜입니다. 십자가 경험, 그것은 집착에서 자유로워짐입니다.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차원 위에 역사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9장 3절에서 시작된 다니엘의 기도 내용 중 일부와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거역한 남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하여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갈 때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당시 다니엘은 어린 나이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바벨론의 관리가 되게 하셨고, 성년이 된 다니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니엘은 자기 민족이 노예 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인한 징계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징계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기한이 있음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한 말씀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이 사실을 안 다니엘은 금식 기도를 결심했습니다. 다니엘의 기도는 백성들을 대신한 처절한 회개의 기도였습니다. 4절부터 19절까지가 참회와 함께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현실은 망국의 한을 안고 사는 절망의 민족이 되었건만 그들은 그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10년 20년 세월이 흐르면서 유대인들은 노예로서의 삶에 길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사람들의 세상에서 똑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멸망당하기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그 경고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름은 가지고 있었지만 실상은 세상적인 평안과 안일을 누리면서 자신들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 현실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증언하십니다. 렘7:1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였느니라.” 35:17,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에게 나의 그들에게 대하여 선포한 모든 재앙을 내리리니, 이는 내가 그들에게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며 불러도 대답지 아니함이니라 하셨다 하라.”사66:4,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오늘의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라’ 하면서도 생활 속에서는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의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같이 많이 증거 된 때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서 더욱 멀어지고 있습니다. 롯의 때에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이 롯의 말을 듣고도 농담으로 여겼던 것과 같습니다(창19:14).

그러나 아직은 기회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사람인 다니엘을 예비하셨습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현실을 알고, 하나님의 계획을 깨달았습니다. 다니엘은 지체함이 없이 기도를 결심했고 곧 시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시대에 기회를 부여하고 계십니다. 우리 자신들과 이 시대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는 기회가 아직은 있습니다. 이 기회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이킬 수 있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준비해 두고 계십니다. 다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 기회가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옵니까?

사람의 자기포기가 하나님의 시작

자포자기가 아니라, 자기포기입니다. 즉 자신의 생각과 계획과 생명의 주체 권까지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 권리는 내가 주님을 믿고 영접하는 순간에 이미 주님께로 이양된 것입니다. 다만 내가 순종하지 못함으로서 아직 내 것처럼 여기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제 나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함은 실제의 주인에게로 권리가 옮겨지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로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과 계약을 맺고 ‘선민’이 된 이스라엘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그들이 자신의 삶이 자기 자신의 것인 줄 알고 마음대로 살았으니, 주인에 대한 반역이며 계약의 파기입니다. 이 잘못된 길을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자기포기입니다. 다니엘은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자신과 민족에 대한 완전한 포기각서

다니엘의 기도는 곧 자신과 민족에 대한 완전한 포기각서였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잘못된 소유욕에 대하여 회개했습니다. 이제는 용서와 긍휼마저도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의 기도를 즉각 들으셨고 응답하셨습니다.

포기가 응답이다

포기는 응답이며 회복의 은혜입니다. 포기는 응답과 치료를 가속화시킵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헤일 수 없는 축복과 은혜 속에 살지만, 우리는 또한 예수님 때문에 포기해야할 것들이 많습니다. 지금, 왜, 그렇게 갈등하고 힘들어합니까? 왜, 그렇게 속상해 합니까? 포기하지 못하며, 포기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침묵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막힘을 통하여 여시며 아픔을 통하여 성숙케 하시며 포기를 통하여 응답하십니다. 축복이 신앙의 꽃이라면, 포기는 신앙의 열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매보다, 눈에 화려하게 보이는 축복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생명은 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열매 속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 없는 포기의 쓴 열매들을 통하여 생명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되고 진짜 '명품신앙인'으로 성화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출발은 소유와 누림이지만, 신앙의 마지막은 포기와 내려놓음입니다. 그러므로 초보 신앙인들은, 믿음 때문에 얻은 것이 많다고 간증하지만, 신앙이 성숙하신 분들은, 예수님 때문에 버리고 포기한 흔적이 많다고 간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치명적인 약함을 아십니다. 다 포기해도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그것을 내놓으라 하십니다. 무엇을 건드리시면 우리가 꼼짝없이 하나님께로 나올 것을 아십니다. 어떤 치부를 드러내시면 우리가 겸손하게 설 수 있는지도 아십니다. 우리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오죽 잘 아시고 그렇게 하셨을까요?

혹, 예수 안 믿을까 봐. 혹, 지옥 갈까 봐. 혹, 교만하여 하나님 무시할까 봐. 혹, 기도 없이 내 힘으로 살까 봐. 혹, 종교인으로 머물까 봐 하나님은 우리의 항복을 이끌어 내시려 하십니다. 그 방법 외에는 어쩔 수 없는 극약처방으로 몰고 가십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때는 없었으면 했던 것들이 지나고 나면 있었던 것들이 감사와 축복이 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독자를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질도, 건강도, 자신의 생명도 포기할 수 있었으나 귀한 자식 이삭은 내놓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독자를 포기하라 하십니다. 모세에게는 애굽의 궁궐을 포기하라 하셨고 마리아에게는 옥합에 든 향유만은 꼭 움켜쥐고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어 놓으라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더 많이 소유하고 싶은 옥합이 있고, 내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독자 이삭이 있고, 더 오래 누리고 싶은 애굽의 궁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포기하라고 재촉하십니다.

포기하는 것이 쉽다면 무슨 연단이 될까요? 누구나 포기할 수 있다면 그 포기가 무슨 축복이 될까요? 연단 중에 마지막 연단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애정포기'이고 또 하나는, 끝을 모르는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 훈련과목을 통하여 우리를 사람다운 사람 만들고, 알곡신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무정할 정도로 우리를 다그치시고 몰아 부치십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주님만이 우리의 힘이시며, 주님만이 우리가 붙잡아야할 끈이라 하십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처절하게 저항하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도 도망가는 우리를 포기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포기할 수 없다고 저항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몰고 가십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그냥 포기한 분들 보다, 고통스러운 매를 맞고 포기한 분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보면, 우리는 분명히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포기 못하면 응답도 침묵하고, 눈도 어둡고 귀도 막힙니다. 그러나 포기하고 기도하면, 눈도 열리고 귀도 뚫립니다. 그러고 보면, 배우자를 하나님이 안 주심이 아니라, 내 눈이 어두워 발견하지 못함입니다. 왜 응답이 더디 오는가요? 포기하지 않고 구하기 때문이고 움켜쥐고 구하기 때문이고 날 위해 구하기 때문입니다. 왜 늘 목마르고 답답한가요? 하나님의 포기요구와 나의 탐욕과의 충돌현상 때문입니다. 포기는 높은 수준의 영성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포기를 통한 성숙과 자아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불같은 시험과 고난을 왜 주시는가요? 너의 옛사람, 편견, 고집, 자존심, 고정관념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방법과 은혜로 살라고 하시는 싸인입니다.

하나님의 길은 포기하면 열린다

하나님의 길은 포기하면 열립니다. 하나님의 치유는 포기하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포기하고 항복할 때 비로소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포기하라고 하심은 우리를 망하게 하심이 아니라 흥하게 하심이며 우리의 것을 빼앗기 위함이 아니라 더 주기 위함이며, 우리를 어렵게 하심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부자이면서도 물질을 포기했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부자이지만, 가난해도 물질의 종으로 산다면, 그 가난은 옳은 가난이 아닙니다.

포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포기는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은혜로는 가능합니다. 더 좋은 것이 생기면, 덜 좋은 것은 포기하듯이 주님이 더 좋으면 덜 좋은 세상 것은, 무엇이라도 저절로 포기하게 됩니다. 더 큰 은혜, 더 깊은 은혜 받으면, 포기 안 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포기하려 노력하지 마시고 포기되는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포기의 현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죽어야 살고 포기해야 얻는다'는 단순한 진리를 마음에 품고, 포기와의 전쟁을 위하여 성소로 나아가 엎드립시다. 우리에게 아무리 크고 많은 문제가 있더라도 그것은 주님 앞에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문제는 내 자신입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못하는, 그래도 엎드리지 못하는, 그래도 매달리지 못하는 그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은, 우리가 엎드리는 시간이며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타이밍은, 내가 포기하는 순간임을 놓치고 살면 안 될 것입니다.

‘내’가 ‘나’이기를 포기할 때

‘내’가 ‘나’이기를 포기할 때, 하나님은 ‘나’를 위한 당신의 계획을 시행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나’이기를 고집할 때는 하나님께서 일 하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고향에서는 아무런 능력도 행하실 수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믿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8:34)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끈기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포기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내가 나를 포기한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기대하고 붙잡는 끈을 결코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의 추적은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낙타 무릎

낙타가 유별스럽게 눈썹이 긴 이유는 사막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끝도 없는 사막에 모래바람이 붑니다. 모래 언덕에서 뜨거운 모래바람이 앞을 가릴 때, 오직 길을 잃지 않고 앞으로 갈 수 있는 것은 낙타뿐입니다. 낙타는 커다란 혹을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 이유도 역시 사막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가도 가도 목이 타는 사막에서 갈증을 이기는 길은 자신 속에 물을 저장에 두는 길뿐입니다. 낙타는 무릎에 굳은살이 유독 눈에 띄게 두껍습니다. 사막의 모래바람이 불어 닥칠 때에는 낙타라고 해도 더 이상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그 때에는 조용히 무릎을 꿇습니다. 그 모래 폭풍이 지나가기를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사람들을 흔히 ‘낙타 무릎’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무도 많이 무릎을 꿇었기 때문에 무릎에 굳은살이 두껍게 생긴 덕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이라 할지라도 삶의 고난에서는 예외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인생의 깊은 고뇌 속에서도 하나님께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의 나를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의 나의 삶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할 때 무엇이라고 고백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신뢰의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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