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덴의 바울 (행 17:21)

  • 잡초 잡초
  • 540
  • 0

첨부 1


- 설교 : 강성찬 목사

아덴의 바울

남들처럼 열심히 '마련하기 위하여' 살아가는 이씨 이야기입니다. 전세방을 얻기 위하여, 텔레비전을 가지고자, 냉장고를 사고자, 마침내 집을 장만하고자, 앞선 친구의 뒤통수만 바라보고 달려온 우리 가운데의 한 사람,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두통이 일었습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심한 고통이었습니다. 약국에 가서 약을 지어먹어 보았으나 별로였다. 직장 동료의 권고에 따라 종합병원으로 가서 진찰을 받았습니다. 평소 안면이 있는 의사가 심각한 얼굴로 나타났습니다. '아직 단정적으로 말씀드리기에는 이르지만.........' '그럼 암이란 말입니까?' '결과는 사흘 후에 나옵니다. 그렇게 속단하진 마십시오' '다 압니다. 친구가 나 같은 증상을 보인 지 여섯 달 만에 갔지요' 의사 앞에서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병원을 나서면서부터 동료의 부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집에 와서 돌아보니 자신의 삶이 원망스럽기만 했습니다.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이, 평화보다는 불안이 많았던 나날, 몇 쪽 보다가 남긴 책이며, 항시 내일로 미루어 온 여행이며, 마저 정리하지 못한 것들이, 해야 할 일들이 많고도 많았습니다. 그것들을 6개월 내에 완료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3년만 더 살게 된다면 몰라도, 아니 생명이 1년만 더 연장된다면...'한번 멋지게 살아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죽게 되다니..' 그는 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왜 나에게는 이 세상의 행복을 단 한 번도 맛보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이불 섶이 흥건히 젖도록 울었습니다. 사흘 후 이 씨는 입원 준비를 하여 병원으로 갔습니다. 의사가 빙그레 웃으며 나타나 그에게 말했습니다.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제는 제가 오진을 했었습니다. 엑스레이 필름을 다시 검토해 보니 그것은 암세포가 아니라 작은 종양이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물결치듯이 밀려드는 햇살을 느꼈습니다. 어느 하루 뜨지 않는 적이 없는 태양이건만, 이때처럼 해가 찬란하게 느껴졌던 적은 이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돌 틈에 피어 있는 냉이꽃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오 네가 거기 있었구나' 그는 허리를 구부렸습니다. 그러자 풀꽃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습니다. '저도 여기 있어요' '저두요' 하고, 그는 풀꽃들에게 일일이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래 너희들이 거기 있었는데 나만 모르고 지냈구나. 미안했었다' 상쾌한 봄바람이 살짝 그의 머리칼을 흔들었습니다. '오, 너도 여기 있었구나' 그는 바람을 소중히 손바닥에 받아 든 듯이 하여 들이켰습니다. 가슴을 시원하게 젹셔주는 공기 한 모금, '아 이처럼 단 공기를 이제껏 내가 모르고 지냈었다니, 정말 죄송한 일이었어' 그는 그제 서야 행복을 제대로 알아본 것 같았습니다. 의사가 그의 곁에서 말했습니다. '위기의 고비를 넘긴 사람은 대개가 당신과 같이 이 순간이 인생의 첫걸음인 것처럼 감격하고 다짐을 새로이 하지요. 허나 그것도 작심 사흘입니다. 며칠 지나면 다시 자기가 무한하게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고 몰염치해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꼭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를 당신의 최초의 날인 동시에 최후의 날인 것처럼 생각하고 사십시오'(멀리 가는 향-어느 날 갑자기-인터넷정보클럽)

오늘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덴에서 열린 올림픽에 참가한 사람들입니다.

아덴(Athens)은 에게해의 지류 샤론만에 위치하였으며 피라에우스(Piraeus) 항구에서 약 8km 떨어진 내륙도시이다. 이 도시는 아티카의 영웅 데세우스에 의해 건설되었습니다. 헬라의 신화에 나오는 아테네(아덴)는 로마의 신화에 나오는 미네르바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 이름을 따서 아덴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문학, 철학, 과학, 수사학 등이 꽃을 피웠으며 민주주의의 기초가 내려지기도 하였습니다. 펠로폰네수스 전쟁(B.C.431-404)으로 인하여 아덴은 빛을 잃었지만 그 문학적, 역사적 명성은 그대로 남아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바울이 이 도시를 방문하였을 때는 찬란했던 옛 영광이 사그라든 뒤였으나 그 화려한 명성만은 계속 지속되고 있던 터라 그 도시민들의 자부심은 대단하였습니다. 당시 아덴은 로마 세계에서 군사적 측면뿐 아니라, 정치적 측면에서는 물론 문화적 측면에서도 아덴은 로마의 중심이 되는 도시였습니다. 아덴 곧 아테네는 문화와 운동과 철학의 도시입니다. 이 도시에는 기원전 5세기경에 벌써 음악당이 있었고 운동경기장도 있었는데 그 때 당시 운동경기장의 좌석이 6만개였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올림픽이 다시 열렸습니다. 선수들은 최선을 다하여고 경기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덴에서 영적 경주에 최선을 다하는 바울 사도의 모습을 봅니다.

  우상을 보고 분해합니다.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16절)

아덴성에 우상이 가득 찬 것을 보고서 바울은 분노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분하다'(파로크수노)는 '자극하다'또는 '노엽게 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바울은 거짓된 우상들이 가득 찬 것과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인생들이 우상 숭배를 하는 사실에 자극을 받고 의분을 품고, 노여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보이는 우상들에 대해서 관대하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행위를 보고서 거룩한 분노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무능한 피조물들에게 돌리는 어리석은 행위이기 때문입니다(사 42:8). 바울이 가졌던 이 거룩한 분노는 복음에의 열정으로 나타났고, 이로 인하여 그의 선교는 더욱 알차게 진행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도가 가지는 분노는 남을 정죄하는 분노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주의 사역에 대한 각성과 열정으로 승화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어린 시절에 관한 전설입니다.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 파는 직업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하나님 앞에 죄짓는 우상장사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우상장사를 하지 않으실까?"하면서 늘 생각하고 고민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버지 데라가 아브라함에게 "저 신상들이 상하지 않도록 잘 지켜라."고 부탁하며 출타하였습니다. 마침 그 때 이웃집에서 음식 한 그릇을 가져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께서 출타하신 틈을 타고 작고 큰 여러 가지 모양의 우상들이 진열되어 있는 신당에 들어가서, 우상들을 망치로 때려 부순 후 그 중에 제일 큰 우상의 손에 망치를 끈으로 꽁꽁 묶어 쥐게 해놓고는 음식 그릇을 우상의 앞에 갖다놓았습니다. 외출했다 돌아온 아버지 데라가 신당에 들어가 보니 신상들이 모두 목이 부러지고 팔, 다리, 허리 등이 꺾어져 있었습니다. 데라는 놀라고 화가 나서 아브라함을 불러 야단쳤습니다. 아브라함은 시치미를 뚝 떼고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이웃집에서 떡을 가져왔기에 그 떡을 신당 앞에 두었더니 신상들이 서로 먹겠다고 소동을 부렸는데 결국 제일 크고 힘센 우상이 망치를 들고 다른 신상들을 모두 때려 부수고 떡을 차지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 데라는 더욱 화가 나서 "사람이 만들어 놓은 흙덩이 신상이 어떻게 다른 신상을 때려 부수고 떡을 먹는단 말이냐?"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겸손하게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했습니다. "그래요. 아버지, 생명도 없는 우상이 어떻게 사람에게 명을 길게 하여 주고, 복을 준다고 하며 속여서 우상을 파십니까? 이제 이런 일은 그만 두세요." 그러자 아버지는 깊이 깨달은 바 있어 우상 만들어 파는 직업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가족을 이끌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옮겨갔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후 믿음의 조상이 되고 복의근원이 되었습니다.

인도를 정복한 마하무드는 그쟈라트를 점령한 후 다른 곳에서처럼 우상을 깨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곳의 우상 중에는 높이가 자그마치 15피트나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우상을 섬기는 신도와 사제들은 그것만을 파괴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간절한 소리를 무시하고 그 우상을 부수었습니다. 그러자 그 곳에서 보석이 비오듯 쏟아 졌습니다.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의 보석이 우상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우상을 파괴했으므로 그 보석을 전부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파괴해야 될 우상을 남겨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상을 파괴하는 것이 오히려 이익을 가져옵니다. 과감히 부숴 버릴 때 마음속에 하늘의 보물인 성령의 은혜가 임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섬길 때 측량할 수 없는 부를 얻게 됩니다.

  철학자들과 변론 합니다.

바울은 회당에서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저자에서는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당시 저자는 헬라 사회의 중심이었으며, 특히 아덴의 저자는 헬라 문화의 심장부였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에비구레오 즉 에피쿠로스와 스도이고 즉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과 변론을 하게 됩니다.

에비구레오 철학은 에피큐로스(Epicurus B.C.341)란 철학자가 세운 학파로 행복을 생의 목적으로 추구하였던 자들입니다. 에피큐리안 곧 쾌락주의자들이 이 사상을 따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불신하던 무신론자들입니다. 그들의 삶의 방법은 지금 이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냐? 안 계신 것이냐가 중요하지 않고, 지금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느냐를 더 중요시하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 쾌락주의 자들은 우연히 존재되어지는 것이 인생이기에 순간순간 우연히 만나는 것들을 어떻게 하면 편안하고 아름답고 유쾌하게 즐길 것인가를 논합니다. 내일을 준비하되 물질적인 쾌락에 안위함을 유지하려던 어리석은 농부의 비유처럼 그들의 최우선의 삶의 순서는 쾌락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말하지 않기로 작정한 한가지 규율은 '죽음은 말하지 말자'는 규칙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이 오면 그 쾌락은 끝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생각을 하지 말고 죽음을 기억하지도 말자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합니다. 어떤 배가 항해를 계속하고 있을 때, 폭풍우로 인해 배가 항로에서 벗어나 버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바다는 다시 고요해지고, 아름다운 만(灣)이 있는 섬 곁에 닿아 있었습니다. 배는 그곳에 닻을 내리고 잠시 쉬기로 했습니다. 그 섬에는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고, 맛있게 보이는 과일이 열린 나무들이 있어서, 시원한 나무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으며 새들이 즐겁게 지저귀고 있었습니다.

배의 손님들은 다섯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졌습니다.

첫째 그룹은, 그들이 섬에 상륙해 있을 동안에 적당한 바람이 불어서 배가 떠나가 버릴지도 모르므로, 아무리 이 섬이 아름다워도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지에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아예 상륙하지 않고 배에 남았습니다.

둘째 그룹은, 서둘러 섬에 상륙하여 향기로운 꽃향기를 맡고 푸른 나무 그늘 아래서 맛있는 과일을 따먹고는 원기를 회복하자 곧 배로 돌아왔습니다.

셋째 그룹은, 상륙했으나 섬에 너무 오래 있었기 때문에 때마침 좋은 바람이 일어나 배가 출항해 버리리라 생각하고 당황하여 달려 돌아왔기 때문에 소지품을 잃어버리거나 자기들이 애써 차지하고 있던 배 안의 좋은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넷째 그룹은, 바람이 일어나서 선원들이 닻을 올린 것을 보았는데도 아직 돛이 올려지지 않았으니 선장이 자기들을 남기고 출항할 리는 없으리라는 갖가지 이유를 붙여서 될 수 있는 한 오래도록 그 섬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배가 항구를 떠나려는 것을 보고는 당황하여 헤엄쳐서 배의 옆구리로 기어올라 왔기 때문에 바위나 배의 주위에서 상처를 입어, 그 상처는 항해가 끝날 때까지 낫지 않았습니다.

다섯 번째의 그룹은, 섬 속 깊숙히 들어가 너무 많이 먹고 또 아름다운 섬에 도취하여 배가 출항할 때 울리는 종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숲 속에 있던 맹수에게 잡혀 먹히거나 독이 든 과일 따위를 먹고 병이 들어 모조리 죽어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배는, 인생에 있어서 선행(善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섬은 쾌락을 상징합니다.

첫째 그룹은, 조금도 맛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그룹은, 조금은 쾌락에 잠겼지만, 자신이 배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는 잊지 않았습니다. 셋째 그룹은, 쾌락에 지나치게 잠기지 않고 돌아왔지만, 역시 좀 고생을 했고, 넷째 그룹은, 돌아왔지만 돌아오는 것이 늦었기 때문에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상처가 아물지 않았습니다. 다섯번째 그룹은 일생을 허영 때문에 살거나, 장래의 일을 잊어버리거나, 달콤한 과일 속에 독이 들어있는 것도 모르고 먹고 죽는 가장 심각한 자들입니다.

  스도이고 철학은 주전 340년 경 구브로(Cyrus)에서 출생한  제논(Zenon)이란 철학자로 말미암아 세워진 학파로 세네카(Seneca) 아우렐리우스(Aurelus-그는 후에 기독교로 돌아왔음)등이 이 학파에 속합니다.

스토익 철학자들은 모든 것은 운명에 의하여 결정되어지고 다스려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너무 기뻐할 필요도 없고 너무 슬퍼할 이유도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어진 그 운명을 잘 살펴서 편하게 살아가자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최고의 덕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좀 더 편리하게 살고 좀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는 지식을 추구하면 그 지식이 편안한 인생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임스 조이스 라고 하는 철학자는 “사람의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성격이 바뀌고, 성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꿔진다”라고 말했습니다.

최근 한국과학기술원 수학과 박사학위 논문심사를 통과한 김용수씨(32)는 운명은 나약한 사람에게는 가혹합니다. 그러나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는 성공의 자극제가 될뿐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공교롭게도 열일곱살 때 시력을 완전히 잃었고 고등학교를 중퇴했습니다. 안마사로 나설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역경에 순응하는 삶이 싫었습니다. 아직 건강한 청각신경이 남아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녹음강의를 듣느라 귀에 물집이 잡혔습니다. 점자서적은 책장이 닳아 없어질 만큼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야채상을 하는 아버지는 아들을 정성껏 뒷바라지했습니다. 그 결과 용수씨는 전자거래의 암호체계에 관한 연구로 박사과정을 통과했습니다. 시각장애인으로서는 국내 최초의 이공계 박사학위자가 되었습니다.

연세대 총장이었던 백낙준 박사는 한국 교회사에서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 아버지는 점쟁이었습니다. 길거리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 관상을 봐주고 돈을 벌었습니다. 어느 날 길을 지나가던 한 집사가 백낙준의 아버지를 보고 한마디를 했습니다. "여보시오. 그런 짓 하다가 당신도 망하고 자식들도 망할 텐데 그 짓 빨리 그만두고 예수나 믿으시오." 그때 그는 눈을 흘기면서 '너나 잘 믿어라. 재수 없게 왜 떠들고 가'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잠을 자려고 누워있는데 집사님이 한마디 던진 말이 계속 귀에서 맴돕니다. '그런 짓 하다가 당신도 망하고 자식들도 망해' 잠을 자도 그 소리가 들립니다. 드디어 그는 모든 것 을 다 청산해버리고 예수를 믿었는데 그 아들이 연세대 총장이 되었습니다. (백낙준 박사의 부친의 회심-인터넷 정보 클럽)

인간 철학이나 학문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그리스의 한 철인이 친구에게 쓴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그는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새 종교집단이다. 사람이 죽어도 슬퍼하지 않고 기뻐하며 그들의 신에게 감사의 예식을 드린다. 그들은 시체를 들고 묘지로 행렬할 때 마치 즐거운 소풍이나 가듯이 노래를 부르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행진한다.” 라는 말을 썼다 합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전해주는 산 증거입니다. 초대 교인들은 부활의 신앙, 영생의 확신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남기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을 남겼으며 예수는 영원한 생명을 남겼다.”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유산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남기신 부활의 믿음,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죽는 순간에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세 가지를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내 조국 프랑스…,충성스런 군인…,사랑하는 아내 조세핀…” 그의 고백에는 인생을 마감하는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베토벤이 죽음을 맞으며 읊조린 말속에서는 진한 허무와 체념이 묻어난다합니다. “친구여, 이제 희극은 모두 끝났네”

톨스토이도 죽음의 불안과 공포에 몸을 떨었습니다. “이제 나는 어찌할 것인가”

스탈린은 임종할 때 두 눈을 부릅뜨고 왼손을 내저으

며 저항했다 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힌 한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에는 가시관, 손과 발에는 못이 박혀 죽어가면서 평안한 모습으로 외쳤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전능하심을 믿습니다.

린드버그(1902-1974)는 유명한 비행사요 또한 과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프랑스의 생리학자요 노벨상을 수상한 알렉산더 케렐과 공동으로 연구하여 "케렐- 린드버그 펌프" 라고 하는 인공심장을 만들었고 또한 1927년 뉴욕과 파리사이의 대서양을 무착륙 단독비행에 처음으로 성공한 비행사로 그는 미국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습니다. 린드버그는 그 당시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할 때의 일을 회고하기를 "내가 만든 이 기계들이 하늘을 날기 전 만해도 매우 위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낡으면서 내가 만든 비행기는 보잘 것이 없으며 무신론자로 끝까지 남는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였습니다. 나는 그 동안 과학을 숭배하였고, 그 과학으로 하늘을 나는 비행기와 인간의 생명을 지속시키는 인공심장을 만들었지만 나의 비행기는 위대한 하나님의 창조물인 광대한 우주의 한 부분을 날고 있으며 그 하나님의 손안에 내생명과 내가 만든 너무나 연약한 이 비행기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가장 큰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 하였다 합니다.

우상을 보고 분해하고 철학자들과 변론 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한 바울 사도에게 최고의 면류관인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줄 믿습니다. 우리도 영적인 경주 장에서 사명 감당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두가 되어 생명의 면류관 받는 모두가 됩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