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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장 소중한 것은 영혼입니다.(마 8: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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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덕만 목사

요즘 어린이들 사이에는 “빨간 마스크”라는 이야기가 유행이라고 합니다.
생김새: 하얀색 레인코트를 입고, 큰 마스크를 쓰고, 긴 머리를 하고 다닌다.
주요행동: 밤에 만나면 “나 이뻐?”라고 묻는다.
유의사항: 예쁘다고 하면 귀까지 찢어진 입을 보여 주지만, 못 생겼다고 하면 식칼을 들고 쫓아온다.

파란 마스크: 특징 100M를 3초에 달림. 보이는 생물은 질문 없이 무조건 죽임.
노란 마스크도 있습니다.
진주는 이야기를 듣고 자기 방에서 잠을 자지 못하고 우리 방에 같이 잠을 자는 일들이 몇 일간 있었습니다.

오늘은 귀신들이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의 거친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시고 건너가신 곳이 가다라 지방이었습니다. 다른 성경에서는 거라사 지방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거라사 지방에는 무덤 사이에 귀신들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귀신들린 사람을 직접 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귀신들려 미친 사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들은 무덤 사이에 살았습니다. 그들은 심히 사나왔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그들을 여러번 고랑과 쇠사슬로 묶었지만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힘은 대단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들을 피해서 그 길로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소리를 지르며 돌로 자기들의 몸까지 상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버려진 사람들이었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귀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인격을 망가뜨리고 가정을 파괴하고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고, 자기 자신을 학대하도록 만들고 사람들과 더불어 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귀신은 사단의 졸개인데 귀신의 목적은 죽이고 멸망시키고 도적질하는 것이 주된 목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한목자와 도적을 비교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사단은 지금도 존재합니다. 귀신은 지금도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서 두루 다니고 있습니다. 현대인 크리스천 가운데는 귀신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과학문명이 발달한 시대에 무슨 귀신 시나라 까먹는 소리하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세상의 메스컴이나 사람들은 잘못된 귀신관을 가지고 귀신의 세계를 두각 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성경에서 귀신에 대해서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귀신이 사라졌다 소멸되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귀신은 여전히 존재하면서 사람들을 괴롭히고 가정을 파괴하고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귀신은 사단의 졸개로서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의 것들을 빼앗으려 합니다. 오늘 본문에 거라사 지방에 불쌍한 두 사람도 이 귀신에게 사로 잡혀 모든 것을 빼앗겼고 불행한 시간들을 무덤 속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귀신들린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아니한 이 사람들에게 찾아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들을 찾아 가는 데는 방해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전주에 생각했던 말씀을 연관해서 좀 생각하면 예수님이 거라사 지방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돌풍이 있었고 이 돌풍으로 배가 가라앉을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예수님이 귀신들린 이들을 만나시는 것을 방해하는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힘든 과정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거라사 지방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거라사 지방에 오셔서 하신 일은 이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신 일 밖에 없습니다. 이들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거라사 지방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들을 자유케 하여 가정으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은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위해서 바다를 건너서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헤매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00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계산상으로 보면 손해입니다. 99마리의 양과 한 마리의 양은 분명 99마리의 양이 값어치가 더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 많은 것 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더 소중한 것입니다.

어떤 나라에 지혜로운 재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외교적인 관계로 팔레스타인을 방문하였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와서 왕에게 전도를 합니다. “왕이시여!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왕도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으십시오.”라고 전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왕이 “나는 예수를 믿을 수 없다. 그렇게 능력이 많은 분이라면 말 한마디로 천지를 개벽시킬 것이지 뭐 하러 이 땅에 오셨단 말이냐? 난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만약에 당신이 이 말에 대답하면 내가 예수를 믿겠노라.” 약속했습니다.
재상은 왕에게 “하루의 여유를 주십시오.” 말하고 당대에 최고의 조각가를 초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로 최고의 목각 인형을 만들되 왕의 아들인 왕자와 똑같이 목각 인형을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재상은 왕을 배에 태우고 지중의 연한을 뱃놀이를 하였습니다. 왕은 정사를 논하고 인생을 논하면서 배 놀이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멀리 절벽에 왕자가 서 있더니 갑자기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왕자는 물에 첨벙 떨어져 들어갔습니다. 왕은 깜짝 놀라 “아니 왕자가 물에 빠졌다.” 하면서 물 속으로 직접 들어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재상이 만류합니다. “왕이여 모든 백성이 당신만 바라보고 있는데 왕이 직접 들어가시다니요? 신하들을 시키거나 군사들을 시켜서 왕자를 구원하게 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왕은 “지금 왕이고 나라고 내게 무슨 상관이냐 내 아들이 죽게 되었는데”그러면서 왕이 직접 물에 뛰어 들려할 때 재상은 자초지정의 이야기를 하면서 “왕이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직접 물로 뛰어 들려고 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이 땅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왕도 아들로 생각하고 나도 아들로 생각하시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와 상관없는 일로 생각하면 99마리의 양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한 마리의 양이 나라면 생각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잃어버린 양이라면 계산은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따라해 보겠습니다. “잃어버린 양이 나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거라사 지방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가셨던 것처럼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복음의 말씀이 나의 말씀으로 받아드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을 찾아 가셨을 때 귀신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본문 29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마 8:29)

귀신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한 것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압니다. 귀신들은 진짜와 가짜를 압니다. 귀신은 귀신같이 알아봅니다.
행 19:11-15절에 보면 바울이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랬더니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사람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라고 외쳤습니다.
그때 악귀가 대답합니다.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행 19:15)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귀신도 예수님을 압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그러나 귀신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알았지만 대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마 8:32)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귀신은 떠나가는 것입니다. “가라” 명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귀신을 쫓아 낼 때는 사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 나가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닙니다. 명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막9:25)

주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그들에게 귀신을 쫓아 낼 권세를 주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막 6:7)

마가복음 16장 1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 16:17)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하면 귀신들은 쫓겨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아니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취사선택하지 마십시오. 모든 말씀은 우리들에게 주신 분명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면 귀신들이 쫓겨 갈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귀신들은 돼지 떼에게 들어갔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는 귀신들이 돼지 떼 2,000마리에게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돼지 한 마리의 값이 얼마입니까? 한 마리에 50만원 잡으면 50만 X 2,000마리하면 10억입니다. 30만원 잡으면 6억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싼 돼지 떼가 비탈길을 향하여 곤두박질쳐서 바다에 들어가 몰살당하였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아깝습니까? 얼마나 큰 손해를 보았습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은 돼지 떼에게 귀신을 쫓으셨을까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본문인줄 믿습니다. 한 사람이 돼지 떼 1,000마리보다 더 값지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값이 얼마일까요? 사람의 값은 천하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

생명은 돈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 밖에 없는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돈과 여러분의 생명을 바꾸겠습니까? 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나는 가장 소중한 존재이다.”

그런데 거라사 지방의 사람들은 가장 소중한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거라사 지방에서 떠나도록 간구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이 떠나기를 간구하였습니까? 더 많은 손해를 입을까봐 그렇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내게 이익인가? 손해 인가?를 따졌습니다. 계산기를 두둘겼습니다. 그리고 사람보다는 물질을 택하였습니다. 그들은 귀신들린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돼지 떼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관심이 있었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율법을 다 지키었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인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눅 18:22-23)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택하기 보다는 물질을 택하였습니다.

손익계산에 민감한 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내게 이익인가 손해 인가를 따집니다. 그래서 이것이 나에게 손해일 경우는 아무리 가치 있는 일일지라도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손해 볼 일이라면 예수님도 떠나가도록 간구합니다. 

여러분 생명을 살리는 길에는 손해가 있습니다. 헌금하는 것 손해처럼 보입니다. 구제하는 것 손해처럼 보입니다. 선교하는 것 손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해야 합니다. 가치 있는 일이라면 손해를 본다할지라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물질이고 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가치 있는 일을 택하실 수 있는 택하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에게 관심을 갖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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