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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손 내밀라 (눅 6: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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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정도열 목사

요  절  6:9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편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는 병을 고칠 수 없다는 당시 안식일 규칙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한편 손 마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명하여 병든 손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엿보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날 한 손 마른 자를 따로 불러서 조용히 고쳐 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셨습니다. 그 사람을 공개적으로 세워 놓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만인에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예수님은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안식일의 근본정신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주일성수의 근본정신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네 손을 내밀라’ 명하심으로 한 손 마른 자를 고쳐 주신 예수님께 병든 손을 내밀어 병든 몸과 마음이 고침 받고 영혼의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리새인들은 이미 여러 번 예수님과 부딪혔습니다. 그때마다 진리의 말씀 앞에 그들이 여지없이 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 주셨을 때에 바리새인들은 속으로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참람하다. 어찌하여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눅 5:21)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신학적으로 잘못되었으며, 신성모독죄를 범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명하심으로 땅에서 죄 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24).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들이 멸시하던 세리 마태를 제자로 삼으시고, 상종치도 않던 창녀들과 세리들과 함께 어울려 잔치를 즐기셨습니다. 그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제자들을 비방하여 말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30) 세리와 죄인들은 지옥의 땔감으로 정죄하고 소외시키고 왕따를 시켜야 하는데 왜 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어울려 질서를 어지럽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그들의 병든 마음을 고쳐 주러온 의사임을 밝히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1,32)

  뿐만 아닙니다. 우리는 매주 이틀씩이나 금식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금식을 하지 않고 먹고 즐기기만 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낡은 가죽부대와 새 포도주의 비유로 기독교는 유대교와 하나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유대교의 전통과 규례들은 낡은 가죽부대처럼 쓸모가 없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몹시 상했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이삭을 비벼 먹는 것이 발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또 비난했습니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고 친구들에게 나눠준 사건을 예로 들면서 제자들이 잘못이 없음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성경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한 마디도 반박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마다 다 진리의 말씀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마음에 독이 잔뜩 올라 있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제 또 다른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오른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히브리복음서에 의하면 이 사람은 돌을 다듬는 석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른 손이 말라서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예수님이 회당에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회당에 나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간청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이 손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석공이었습니다. 이 손에 힘을 주사 부끄러운 거지노릇을 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사람은 오른 손이 말라서 정상적인 직업을 가지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없었던 것은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거지처럼 구걸하면서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요즘처럼 실업률이 높았고, 신체 건강한 사람들도 하루 두 끼 먹기 힘들었다고 하니까요. 아무튼 이 사람은 오른쪽 손이 말라서 그 인생이 병들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청년이었다면 얼마나 불행했겠습니까? 공대를 졸업했다고 하더라도 면접시험에서 떨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또 천신만고 끝에 취직을 했다고 하더라도 데이트 신청을 해 오는 아가씨도 없었을 것입니다. 누가 이런 사람과 결혼하려고 하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오른쪽 손을 보이지 않으려고 숨기고 다녔을 것입니다. 친구들이 오랜만에 만나서 악수하려 오른 쪽 손을 내밀어도 이 사람은 왼손을 내밀어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 사람은 한없는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깊은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안식일을 꼬박꼬박 지키며 회당에 나왔습니다. 안식일만큼이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위로를 받고 또 히브리복음서에서와 같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고침을 받기 위해서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큰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한손 마른 인생 문제로 괴로워하던 그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메마른 땅에 내리는 단비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어떤 사람들이 와 있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 그들은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서기관은 바벨론 포로 이후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성경을 해석하는 자로 백성들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헬라의 세속문화로부터 유대교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생겨난 경건주의 운동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날이 갈수록 형식과 전통에 사로잡혀 위선자들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안식일의 규례에 관한 문제로 예수님과 첨예한 대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한 손 마른 자의 인생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한 손 마른 자를 예수님을 송사할 미끼로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았습니다. 여기서 엿보았다는 말은 미완료형으로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동안에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들은 비난거리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안식일에 대한 잘못된 규례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서는 안 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마 12:10). 당시 안식일 규례에 의하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이 39종류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안식일에는 병을 고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사고가 나서 생명이 위급할 때에도 응급처치만 하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엄격한 유대 랍비들은 안식일에 병문안도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런 율법적인 눈으로 볼 때 한손 마른 사람의 경우는 생명이 위급한 질병도 아니었습니다. 당일 고쳐 주나 이튿날 고쳐주나 별로 상관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병자를 고쳐 주신다면 예수님은 정면으로 안식일 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안식일을 고의로 어기는 자는 돌로 쳐죽이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엿새 동안은 일하고 제칠일은 너희에게 성일이니 여호와께 특별한 안식일이라 무릇 이날에 일하는 자를 죽일지니”(출 35:2)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출 31:14) 그러므로 예수님을 송사할 구실을 확보할 절호의 기회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눈으로 볼 때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예수는 위험천만한 청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어떻게 도전하셨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예수님은 저희 생각을 아셨습니다. 자기를 고소할 조건을 얻기 위해서 엿보는 그들의 악한 생각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안식일 성수에 대해서 그들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는 것을 아시고 정면으로 도전하셨습니다. 한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나오게 하여 세워놓으셨습니다. 그들의 숨은 생각을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조용히 엿보고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영락없이 걸려들었다고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공개 질문을 던지셨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여기에서 물으셨다(에페로타오)는 단어는 보통 '질문하다', '요구하다'는 뜻보다 더 강한 표현으로 '심문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내면을 꿰뚫어 보시고 그들의 위선과 편견을 적나라하게 심문하듯이 질문하셨습니다. 이 질문은 그들의 어두운 내면을 빛 가운데 드러내는 고통스러운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형식과 위선의 허울을 쓰고 사람의 진정한 아픔과 필요를 거들떠보지 않는 그들의 비정함을 문책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쳐 주셨을 때도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핍박하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예수님은 선한 일을 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하지 않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그 일을 방관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생명을 죽이는 일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예수님은 안식일이라고 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며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한 손 마른 자를 고쳐 주시고, 그를 모든 불행에서 구해 주는 것이 선한 일이고,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이것이 안식일의 근본정신에 합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안식일의 근본정신이 무엇입니까? 창세기에 보면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쉬신 날입니다(창 2:2,3; 출 20:10,11). 이날을 복주시고 우리 인간에게 쉼을 주셨습니다. 이날에 우리 인간은 안식을 누리며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 드리는 날로 정해 주셨습니다. 또 신명기에 보면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고 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데서 하나님께서 구속해 주셨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켜서 아들이나 딸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심지어 가축까지도 다 안식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첫째는 창조주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날이요, 둘째는 종들과 가축들까지도 쉬게 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날임을 말해 줍니다. 안식일에는 주인이나 자식이나, 남종이나 여종이다 다 하나님 앞에 동등한 자로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식일의 근본정신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육체의 노동을 쉬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며 이웃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이런 안식일에 대한 근본정신은 우리가 지키는 주일성수 정신에도 이어집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은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입니다. 주일은 어떤 날입니까? 이날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날입니다. 이날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단의 권세를 멸하시고 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신 날입니다. 만유의 주권을 회복하신 새 창조의 날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하시고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신 날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안식일의 참 주인이십니다. 우리 인생들에게 참 안식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참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일에는 육체의 노동을 쉬면서 이 예수님 안에서 참 안식을 누리며,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 된 지체들이 서로 돌아보며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의 중심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찬양, 그리고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는 사랑의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안식일을 지키는 자에게 어떤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까?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사 58:13,14) 안식일은 즐거운 날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날입니다. 존귀한 날입니다. 안식일을 존귀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존귀한 자로 세워 주십니다. 안식일을 경홀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께서 경홀히 여기십니다. 안식일에 자기 길로 행치 않고, 오락을 즐기지 않고,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얻습니다. 땅의 높은 곳에 올려 주십니다. 안식일을 구별하여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겨울연가의 여주인공 탤런트 최지우씨의 부모는 믿음이 독실한 크리스천입니다. 엄격한 십일조 생활을 물론이고 새벽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 등 빠짐없이 참석합니다. 딸이 연예인이 된 이후로는 더욱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불규칙한 생활을 하는 딸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딸이 불성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며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서울로 올라가 딸의 뒷바라지를 하게 되었습니다. 최지우씨가 조금만 신앙생활에 흐트러짐을 보이면 당장에 연예인 생활을 그만두라고 말할 정도로 그 부모는 신앙생활을 우선으로 여깁니다. 최지우씨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벽 예배에 어김없이 나가는 부모님을 볼 때마다 신앙 생활에도, 연기생활에도 더욱 열심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도 몇 차례 따라나섰지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어요. 비록 부모님과 함께 새벽제단을 쌓지는 못하지만 주일 성수는 꼭 하려고 해씁니다.” 부모가 주일을 존귀히 여기는 생활을 해야 자녀들이 주일을 존귀히 여기는 신앙을 배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성공과 출세보다도 그 자녀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가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양육하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올바른 태도입니까? 그러한 교육이 이루어지는 첫 관문이 주일에 대한 우리의 신앙적인 태도에 달려있습니다. 또 예배 시간에 졸지 않고 몸과 마음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말씀을 경청하고,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를 높여 주십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잃어버리고 병을 고치는가 안 고치는가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깨우쳐 주시고 그들의 내면에 숨은 죄악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때 주님의 말씀 앞에서 회개하고 그들의 죄를 자백하고 돌이켰다면 좋은 예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더욱 더 마음을 완악하게 했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저희가 잠잠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부끄러운 죄악들이 생각나고 양심에 가책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앞에 자신들의 죄악을 드러내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더욱 완악하게 하고 예수님을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1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한 편 손 마른 자를 고쳐 주시자 저들은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님을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했습니다. 분기가 가득했다는 말은 이성을 잃고 고집대고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한 손 마른 자는 어떻게 고쳐 주셨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 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쳐주실 때 각 사람과 그 상황에 필요한 대로 다양한 방법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에게는 침으로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주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또 귀먹은 귀신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양 손가락을 귀에 꽂고 그 귀를 낫게 해 주셨습니다. 열두 살 먹은 소녀가 병들어 죽었을 때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며 달리다쿰 ‘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오른 손이 마른 사람에게는 그 손을 내 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 병든 손을 내 밀도록 하여 고쳐 주셨을까요? 그의 병든 손은 그 사람의 가장 수치스러운 치부입니다.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그 손을 감추고 싶었을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어떤 자매님은 이가 아주 성성하게 난 분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잘 웃지도 않았습니다. 웃으면 자기의 못생긴 이가 드러나기 때문이었습니다. 간혹 웃어도 손으로 입을 가리고 얼굴을 돌리고 웃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많은 곳에 가기를 싫어하고, 자기 문제를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내 놓기를 꺼려하였습니다. 또 심한 열등의식에 시달리다가 결국 치료를 받지 못하고 떠나버렸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에게는 자기의 약점을 숨기고자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자기의 치부를 가리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치부를 가리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마음이 오그라들고 심령이 병들기 마련입니다. 또 심한 자의식에 시달리며 어둡고 절망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으로 자기의 가자 수치스러운 손을 많은 사람들의 보는 앞에 내놓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또 회당에 예배드리러 온 동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그라진 손을 내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한 손 마른 문제는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는 치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병든 손을 내밀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는 그에게 순종하는 믿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반드시 고쳐 주신다는 믿음으로 순종할 때만이 병든 손을 밀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 손을 내밀라는 말씀은 믿음의 손, 순종의 손을 내밀라는 말씀입니다.

  그 병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오른 손 마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의 손, 순종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얼마나 부끄럽고 챙피했겠습니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 보이려고 할 때 얼마나 낯이 뜨겁고 힘들었겠습니까? 손을 내밀려고 하는 그 순간 얼굴이 붉어지고 심한 자의식으로 숨이 막힐 것만 같았습니다. 이때의 심정은 우리가 난생 처음으로 형제자매들 앞에서 인생 소감을 발표할 때의 심정과 비슷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에게 이야기하기 꺼리는 어두운 부분이 있습니다. 각 가정마다 남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치부가 있습니다. 집이 너무 가난하여 그 가난으로 받은 상처와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또 집에 내려오는 고질적인 질병으로 인해서 괴로워하는 분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서 두 집 살림을 하는 경우라든지, 부모님들이 사이가 안 좋아서 가정이 평안할 날이 없는 집안도 있습니다. 이런 가정 문제로 인해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고통 가운데 있지만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합니다. 너무 창피하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또 개인적으로도 남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신체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마가 별로 넓지도 않는데 너무 넓다고 생각해서 불행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은 겉은 멀쩡하지만 속병을 앓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또 은밀히 지은 죄악으로 인해서 슬퍼하고 절망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릴 때 남의 가게에서 과자를 훔치다가 들켜서 수모를 겪은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동전 10원짜리를 망치로 두들겨 펴서 100원짜리로 사용하다가 들켜서 혼난 경우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늘 가게 주인이 자기를 좇아와 죽이기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시달리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모든 문제들은 불완전하고 연약한 인간으로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자기만이 가진 문제인 것처럼 생각하고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고 은폐시키려 합니다. 이로 인해서 마음이 닫히고 진실한 친구를 사귈 수 없게 됩니다. 또 사람들을 경계하고, 스스로 자기를 소외시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믿음으로 병든 손을 내밀었습니다. 순종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 사람은 믿음으로 오그라진 손을 힘껏 내밀었습니다. 믿음의 손을 내민 것입니다. 그랬을 때 손이 쭉 펴지고 회복되었습니다. 즉시 마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회복되었다는 말은 '이전의 상태로 다시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말라비틀어진 손이 원 상태로 회복되었습니다. 왼쪽 손과 똑같이 건강한 손이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이 네 손을 내밀 라 하실 때 즉시 그 병든 손을 내밀었습니다. 순종했습니다. 이치를 따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찾아온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말대로 순종해서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었더니 그의 문둥병 이 깨끗해진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치부를 주님 앞에 내밀 때 주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의 병든 몸과 마음도 치료해 주십니다. 저는 8월 학생수양회에서 7명의 형제자매들의 진실한 인생 소감을 들으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분들은 믿음으로 자기의 수치스러운 집안 문제와 자신의 죄악을 주님 앞에 다 내놓았습니다. 형제자매들 앞에 낱낱이 고백했습니다. 그리하였을 때 그 영혼을 자유케 하시고 기쁨을 충만케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거운 인생의 짐을 내려놓게 하시고 그 영혼을 깨끗이 치료해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는 원치 않는데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남들이 겪지 않는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 어릴 때 저지른 불장난 때문에 일생 동안 한숨을 쉬며 사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얼마나 부끄러운 일을 많이 행하게 됩니까?  개인적으로도 우리가 진실하게 오그라진 손을 주님 앞에 내밀고 치유함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에는 순종이 따릅니다. 믿음과 순종은 한 수레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네 병든 손을 내밀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순종의 손, 믿음의 손을 내밀어 병든 몸과 마음이 온전히 회복되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참 안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모든 짐을 내려놓고 참 안식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병든 손, 병든 마음을 내밀어 치유함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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