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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노의 이유(롬 1: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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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유재명 목사 (안산빛나교회)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했습니다. 그 복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죄인을 의인케 하며 세상에 속했던 사람을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게 하는 마귀의 자녀였던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하나님의 의가 보인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복음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나를 보면 더 이상의 죄인이 아닌 용서받은 나를 보게 됩니다. 그 복음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나를 보면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닌 구원받아 하늘에 속한 자가 되어 있는 나를 보게 됩니다. 그 복음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나를 보면 영광스럽게도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있는 나를 봅니다. 오늘 말씀이 무엇입니까?
복음 안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죄 안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진노하시는 하나님

사랑과 용서 그리고 은혜의 하나님인데 왜 진노를 하시는 하나님이고 그렇다면 왜 진노를 하셔야만 했을까요? 남편을 배신하는 아내가 있다면 아내를 사랑하는 만큼 남편은 아마도 진노를 할 것이고 사춘기 시절에 아이들이 성장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깊은 타락의 수렁에 빠져있어 이것을 알게 된 부모의 심정은 너무도 사랑하는 자식이니 만큼 죄를 향하여 분노를 하게 될 것입니다. 더더욱 자식을 이렇게 망가트린 사회적 구조에 대해서도 진노를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데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데 어찌 보고만 있겠습니까? 수수방관이나 무관심은 사랑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세계를 지으실 때 인간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로 하여금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즉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중심으로 한 질서로 운영되게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말씀 1:20절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들 속에서 작용하도록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그 만드신 만물들 속에서 자신이 보여지고 하나님의 자신의 뜻대로 운영됨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선악과 이후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려 하나님의 창조원리와 질서를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거스리기 시작한 인간들은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켜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알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이야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죄인이라 합니다. 적당이 죄인이 아니라 철저한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했습니다. 이방인도 유대인도 모두가 죄인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구원의 시작이 됩니다. 물속에 빠져 있음은 느낀다면 살아 있는 것이요 불길 속에 있음을 느낀다면 이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상태임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죽은 것입니다.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죽은 것이요 죽은 것 같으니 살아 있는 것이 있듯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죄인이고 그리고 죄안에서 죽어 있음을 망각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의 소지는 있으나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의와 다르듯 하나님의 진노 또한 인간의 진노와는 다릅니다. 인간들의 진노는 진노의 중심에 자신이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
에는 죄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 분노 속에 인간을 사랑하심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인간들의 분노는 언제나 부분에 반응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분노는 전체에 반응하는 분노입니다.
사람들은 부분을 보기 때문에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체를 보시기 때문에 회칠한 무덤들이라고 분노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완벽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분노는 실수가 있습니다. 분을 내는데 시간이 지나면 이게 아닌데 하는 것들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18절을 보면 완벽하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은 누구인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옵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게 하는 불의를 진리를 막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성경은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하나는 모든 경건치 않음과 또 하나는 불의한 것입니다.
모든 경건치 않는 것은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이야기 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철저하게 자기 소견에 옳은 데로 사는 삶입니다.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켜 버린 죄의 삶이니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입니다. 또 하나는 불의입니다. 불경건을 뛰어 넘어 행동하는 범죄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음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 대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진리가 진리 되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은 불의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입니다.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는 것은 하늘의 방법으로입니다. 사람의 생각이나 사람의 방법이 아닙니다. 불의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시지만 그러나 진노가운데 기다리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런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인간은 만홀이 여깁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가볍게 여깁니다. 그러면서 더더욱 진창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잊지 마십시오. 진노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기다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반드시 모든 경건치 않는 것과 불의를 향하여 행동하실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무섭긴 하지만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복음 안에서 자유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의무가 아니라 특권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는 핑계할 수 없다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은 저희에게 보이셨고 하나님 안에서 살 수 있는 선택의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에게 보여졌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것이며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말은 신학적으로 [계시]라 말을 합니다. 계시는 바로 하나님자신을 나타내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자신에 대해 계시하지 않으면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도 만날 수도 없습니다. 계시에는 성경을 중심으로 한 특별계시와 삶속에서 느끼게 되는 일반계시가 있습니다. 교회에 오신지 얼마 안 되는 성도의 고백입니다. 8년을 쉬었다 교회에 오셨는데 8년을 쉬는 동안 하나님이 가만히 놓아두실리 없겠지요. 때로는 실패로 때로는 기쁨으로 때로는 고독으로 하나님이 놓아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간섭하시니 그분이 이렇게 이야길 했다 합니다. 이제 하나님이 나 좀 놓아 두셨으면 좋겠다해서 “하나님, 나 좀 놓아주세요” 하고 기도를 했다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합니다. “이제 놓아줄까?” 꿈에서 깬 그분은 다음주일에 하나님의 사랑에 눈물을 흘리며 교회에 등록을 다시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을 아는 자로 그리고 아는 자의 삶을 이어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성경은 이야길 합니다. 절대로 핑계할 수 없다 합니다. 지옥에 간 부자가 핑계할 수 없었던 것처럼 절대로 핑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셔야 생명이 있습니다. 빛이 있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거부한 사람들의 결과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안 됩니다. 하나님은 앎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입니다. 귀신도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진노아래 밟힌 귀신에게 구원의 기회는 완전히 박탈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기만 하는 사람들의 삶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매사에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세상의 가치를 올려놓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자신의 삶을 결정 짖는 기준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명예나 물질 그리고 의지입니다. 참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알기만 하는 사람은 ‘감사치 않는 사람들’입니다. 감사야 말로 삶속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감사는 환경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복음 안에서 믿는 믿음입니다. 세상은 처음부터 그 생각이 허망하였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그 생각이 허망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의 목적은 영원입니까 아니면 허망한 것인 이 땅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만 가지고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으로는 밀려오는 허망한 생각들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허망한 것을 좇다보면 마음이 미련해집니다. 그리고 어두워집니다. 이렇게 미련해지고 어두워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며 금수와 버러지 형상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렇게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고작 한다는 것이 돼지 머리 앞에서 절을 하는 것을 말입니다.
첨단과학으로 건물이나 월드컵 경기장을 짓고 사회의 리더들이 한다는 것이 돼지머리에 절을 하는 것입니다. 허망한 생각으로 마음들이 어두워져 끊임없이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허망한 생각이 결국 쾌락을 숭배하게 하고 더 많은 탐욕으로 인간을 몰아넣어 스스로 죄초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위기 앞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몇 평도 안 되는 어둡고 칙칙한 점집에 가서 머리를 조아립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서 요동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에 담아 보십시오.
너는 나와 살아야 한다고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너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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