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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별처럼 빛나는 우리의 구원 (빌 2: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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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금성 목사

지난 주간 추석 명절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즐거운 명절을 지내셨습니까? 고향 다녀오는 길은 편안하셨습니까? 올해는 날씨가 흐려서 추석 대보름달을 구경하기 힘들었습니다. 중부 지방에서는 구름 사이로 보름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도 고향 다녀오는 길에 차창 너머로 보름달을 보았습니다. 8 월 대보름은 유난히 밝은 것 같습니다. 보름달이 비취면 밤이지만 훤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별처럼 빛나는 우리의 구원’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 빛이 되어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고 했습니다. 크리스천은 세상의 빛입니다. 어두운 세상을 빛이 되어 밝혀야 합니다. 크리스천이 빛을 잃으면 세상에서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어제 저녁에 KBS에서 특집 방송을 했습니다. ‘선교 120 주년 한국교회는 위기인가?’ 라는 제목입니다. 주로 한국교회의 위기의 징후들을 다루었습니다. 불투명한 재정 운영, 목사직 세습, 대형교회 성장 제일주의 등을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그래서 여의도에는 기독교인들이 항의 집회가 있었습니다. 어제 오천 여명이나 모였다고 합니다. 오늘 오후에 또 여의도순복음교회 교인들까지 동원되어 더 크게 데모를 한다고 합니다. 언론이 기독교를 탄압한다며 KBS 시청료 거부 운동까지 벌이고 있습니다.

저는 공영방송에서 기독교의 문제점을 지적해 준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 프로그램을 만든 강성훈 PD도 크리스천입니다. 한국교회는 확실히 위기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선한 눈으로만 보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미래에 먹구름입니다.

세상이 교회의 잘못을 지적해 줄 때, 오히려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을 기독교 탄압이라고 항의 데모할 때가 아닙니다. 부끄럽게 생각하고 오히려 회개해야 합니다.

물론 드러나지 않게 숨은 헌신과 봉사도 많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전부 잘못된 것만은 아닙니다.

멋진교회의 목회 원칙 일곱 가지는 모두 한국교회가 개혁해야할 과제들입니다. 민주적인 행정, 소그룹,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배, 익명의 헌신, 투명한 재정, 시간과 재물로 봉사하는 청지기적 영성, 지역사회 속에 개방된 교회. 이 일곱 가지는 모두 한국교회의 약점들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하고 있어야 하는데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멋진교회는 한국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인도하는 교회이기를 소망합니다. 멋진교회는 세상의 등불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울의 유언과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죽음을 예감하고 쓴 글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죽음을 암시하는 구절은 17 절입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바울은 자신을 관제를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관제는 짐승 제사를 드릴 때 마지막 순서입니다. 제물 위에 포도주를 쏟아 붓는 것입니다. 이 관제 비유는 포도주와 같은 붉은 피가 뿌려지는 그림이 그려집니다. 초대교회 때에 이 관제라는 말은 곧 순교를 의미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판결을 앞두고 있습니다. 네로 황제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이것은 지금 바울의 처지에서 사형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바울의 말씀은 절박한 가운데 마지막 남길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려면 어떻게 요약하는 것이 좋을까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핵심을 파악하는 요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문장 가운데 동사를 찾는 것입니다.

본문 12절부터 18절 사이에 중요한 동사 세 개가 있습니다. 이 세 개의 동사는 모두 권면 형태입니다.

첫째는 12 절 마지막에 이루라. 좀 더 정확한 번역은 ‘이루어가라’입니다. 즉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14 절부터 16 절까지의 행하라. 이런 것은 하지 말고, 이런 것을 하라. 즉 원망과 시비는 하지 말고, 빛을 발하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17절부터 18절까지의 ‘기뻐하라’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순교하면서도 기뻐하듯이, 빌립보 교인들도 함께 기뻐하자고 권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들입니다. 구원, 빛, 기쁨. 바울은 이 세 가지가 빌립보교회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언과 같이 마지막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우리 멋진교회가 그대로 받아들여 정말 멋진교회를 이루어가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본문 12절과 13절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2-13>

12 절과 13 절은 헬라어 원문을 보면 한 문장입니다. 우리 성경은 14 절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13 절에서 끊어야 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라. 구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개인 구원입니다. 또 하나는 사회적인 구원입니다. 한국교회는 선교 100 년 동안 개인 구원을 더 많이 강조하면서 성장했습니다. 요즘에 사회 구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12 절에 나오는 구원은 개인 구원이기보다 공동체의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안녕을 이루어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렵고 떨림으로 하라고 합니다. 두렵고 떨림이란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면 이 두려움을 느낍니다.

모세가 양을 돌보다가 호렙산에서 가시덤불에 꺼지지 않는 불을 보았습니다. 신기하게 생각하고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발에서 신발을 벗으라고 명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렸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그 앞에서 우리는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지금도 강단에 오르면 두렵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덜덜 떨었습니다. 지금도 이곳에 오르면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거룩하게 구별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 거룩한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9 장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전 9:26-27>

바울은 날마다 지옥 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바울은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천국 가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남들은 인도해 놓고 정작 자기 자신은 버림이 될까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말로만 거룩한 사람이 될까봐서입니다. 입으로만 남들을 가르치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도 지키지 못할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설교하는 것은 언제나 두려운 일입니다. 목사가 윤리적으로 잠시 실수하면 말씀의 권위가 떨어집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그들이 하는 것을 따라하다가 흉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그런 일을 한다고 핀잔을 듣습니다.
그러니 조심해야 합니다. 두렵고 떨림 가운데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구원을 이루어간다는 말 속에는 구원에 인간의 행동이 필요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 구원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진다고 들어왔습니다. 구원을 이루라는 이 명령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구원과 부딪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해할까봐 13 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일하십니다. 그 일은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 능력을 주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소망을 두고 살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 스스로 구원을 향하여 살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다 완성해 놓으셨습니다.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은 사람의 몫입니다. 이 사람의 몫을 성화라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능력 주시고, 소망 주셔서, 구원을 이루어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구원을 위한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어진 구원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자들은 이 구원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노력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 번째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원망과 시비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빛들을 나타내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입니다.

본문 14절부터 16절 말씀입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빌 2:14-16>

원망과 시비는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원망이란 불만스러워 수군거리는 것입니다.

이 말은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가는 동안 그 길이 험하고 어렵다고 불만에 가득 찼습니다. 수군거리며 지도자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도력에 시비를 걸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구원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두셨습니다. 그런데 그 길에서 원망을 하면 그 구원의 길은 소멸됩니다. 원망은 공동체의 결속을 깨뜨립니다.

지금 빌립보교회는 공동체가 깨질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이 문제는 시급하게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입니다.

원망은 어떻게 시작됩니까? 전체를 보지 못하는 좁은 시야에서 생깁니다. 전체의 유익보다는 개인의 유익을 먼저 따지기 때문입니다. 참고 기다려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약삭빠르고 계산적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교회 이것저것을 바꾸고 싶습니까? 불평하지 말고 의논하십시오. 지도자의 고집 때문에 의논이 안 됩니까?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해보십시오.

원망과 시비는 공동체의 독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렵고 떨림으로 원망과 시비를 자제해야 합니다. 그 같은 죄를 저지르면 멸망 받을지 모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은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선교의 횃불을 밝혀야 합니다.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원망과 시비가 있으면 안 됩니다. 교회가 선교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화평해야 합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세상 가운데 빛들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 빛을 밝히라고 했습니다. 곧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밝힌다는 말은 횃불을 꽉 움켜잡고 앞으로 내밀어 빛을 밝히는 동작을 그리는 말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동작이 있습니다. 먼저 꽉 움켜잡는 것입니다. 이것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도 복음을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앞으로 내미는 동작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말씀을 앞으로 내미는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즉 교회는 타락한 흑암의 세계에 태양같이 찬란하게 나타나 생명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밤하늘을 밝히는 별처럼 빛나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하면 이 일은 바울의 면류관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순교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는 것입니다.

본문 17절부터 18절 말씀입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빌 2:17-18>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 값을 치른 제사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제물이셨습니다.
바울도 그런 모습으로 자신의 순교를 제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관제로 드린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순교는 빌립보교회의 믿음과 봉사의 제사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 앞에서 바울은 기쁨을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기꺼이 희생하여도 교회를 세워 올리는 기쁨을 누리겠다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바울 혼자 누리는 기쁨이 아닙니다. 너희 무리와 함께, 즉 빌립보교회와 함께 누리는 기쁨입니다.

바울이 죽더라도 교회는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과 함께 기쁘게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장차 바울이 사형 집행을 당해 슬퍼하게 될 빌립보교회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순교를 보고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순교를 두려워하거나 원망하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도리어 크리스천의 죽음은 구원의 확신 속에서 기뻐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죽음은 개인의 죽음이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의 역사입니다. 교회는 지도자를 잃어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장례를 축제로 승화합니다. 죽음은 믿음이 완성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봉사의 열매를 맺는 시간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교회는 구원이 제일 중요합니다. 나 혼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구원받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구원이란 공동체의 화평입니다.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을 위해서 교회에는 원망과 시비가 없어야 합니다. 복음의 횃불을 들고 나가 어두운 세상을 밝힙시다.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기쁨은 우리 영성의 클라이맥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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