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치유하시는 주님 (마 15:29-31)

  • 잡초 잡초
  • 479
  • 0

첨부 1


- 설교 : 이영기 목사

김진호감독님께서 쓰신 “교회는 치료하는 곳입니다.” 라는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교회생활을 건강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생활을 깊이 해보고, 잘해보려고 하는데도, 그런 기대보다 실망을 느끼거나 환멸을 느끼면서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이 때때로, 어느 교회든 있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교회 오면서 사랑을 받을 줄 알았는데, 와보니 의외로 이미 다니는 분들끼리만 똘똘 뭉치고, 다른 사람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주지 않기 때문에, 그만 실망과 상처를 받고 떠나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좀 정직하게 살아가는 줄 알았는데, 사는 것 보니 안 믿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기에 실망하고 떠난답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는 그래도 이해하고 용서가 있으리라 믿었는데, 교회에서도 서로 미워하고 노골적으로 싸우는 것을 보고 역시 실망해서 떠난답니다.
그러면서 김진호감독님은 에베소서 4장 25-32절을 본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교회는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께서 3년간 계시면서 성도들을 영적으로 단단한 훈련을 시킨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에베소교회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25절,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짓을 저리고, 각각 자기 이웃과 더불어 참된 말을 하십시오.” 그런 것을 보면, 에베소교회에 거짓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26절,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그런 것을 보면, 성깔들이 있어서 화를 잘 내고, 그 노여움을 쉽게 풀지 못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28절, “도둑질 하는 사람은 다시는 도둑질 하지 말고, 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 그리하여 오히려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게 하십시오.” 그런 것을 보면, 도둑질 하는 사람도 있는가 봅니다.
29절,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 하십시오.” 그런 것을 보면, 말을 아무렇게나, 혹은 자기 감정 대로 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30절,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구속의 날을 위하여 인 치심을 받았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성령의 뜻이 아니라, 자기 욕심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도 있었나 봅니다.
그렇게 에베소교회는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거짓말 하는 자, 혈기 부리는 자, 심지어 도둑질 하는 자, 나쁜 말을 하는 자, 성령을 슬프게 하는 자도 있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교회에 대한 실망은, 문제없고, 착한 사람만 교회에 모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온통 사랑이 가득한 천국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교회는 천국이 아닙니다. 교회는 완전한 사람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병원과 같습니다. 교회는 그래서 치료하는 곳입니다. 교회가 병원이라는 말은 죄인들이 모이고, 교만한 자도 모이고, 혈기 있는 자도 모이고, 술과 담배와 놀음에 중독된 자도 모여서,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치료받는 장소가 바로 이 땅에 세워진 교회라고 김진호감독님은 그 글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천국이 아니라 병원입니다. 그렇기에 불평할 수 없습니다. 실망할 수 없습니다. 병원에서, 웬 환자가 이렇게 모였냐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겁니다. 다만, 병원에서 병든 자들이 치료받고 건강해져야 하듯이, 교회도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신적으로 병든 사람들이 모여서, 은혜 받고, 성령 받아 날마다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야 교회의 본문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가복음 2장 17절에서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그러게 병든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수많은 병자를 고치신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도, 많은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 지체를 잃은 사람, 눈 먼 사람, 말 못하는 사람, 그 밖에 아픈 사람들이 많이 예수님께 나아왔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고, 지체 장애인이 성한 몸이 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걸어 다니고, 눈 먼 사람이 보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장 32-34절에도 보면,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사람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온 동네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는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사역 상당한 부분에 대한 언급은 병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활동에서도 병자를 고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사야 1장 5-6절에서는, “어찌하여 너희는 더 맞을 일만 하느냐? 어찌하여 여전히 배반을 일삼느냐? 머리는 온통 상처투성이고, 속은 온통 골병이 들었으며,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성한 데가 없이, 상처 난 곳과 매 맞은 곳과 또 새로 맞아 생긴 상천뿐인데도, 그것을 짜내지도 못하고, 싸매지도 못하고, 상처가 가라앉게 기름을 바르지도 못하였구나.”
온통 병들었음에도 하나님께 나아와 고침 받지 못하는 그들에 대해 오히려 하나님께서 안타까워하고 계시는 겁니다.

물론 치유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몸의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것이 떠나게 해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한다 하셨습니다.
이런 경우는 치유되지 않는 경우가 아니라. 주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23절,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위장과 잦은 병을 생각해서 포도주를 조금씩 쓰십시오.” 사도 바울께서 디모데에게 보내신 편지 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께서 디모데의 병을 고치지 못하셨다는 겁니다. 때로는 바울 사도의 손수건만 가져다가 병자의 몸에 올려놓아도 그 병이 낫기도 했는데 말입니다.
구약에서 유명한 선지자 엘리사가 있습니다. 그는 요단강의 물을 쳐서 강을 좌우로 갈라지게 하고 건넜습니다. 좋지 않은 물을 좋은 물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두 아들을 데리고 사는 한 여인의 집에 그릇마다 기름을 채우기도 했습니다. 수넴여인의 아들이 숨지자 그 아들을 다시 살려내기도 했습니다. 나병에 걸린 나아만 장군을 고쳐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열왕기하 13장 14절에 죽을병이 들었다고 하였고, 20절에 그가 죽었다고 그래서 장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다 엘리야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병든 자를 고치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기도 했지만 저들도 병들어 있었고 저들도 끝내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사도 바울이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까? 사도 바울이 구원 받지 못한 사람입니까? 그렇다고 디모데가 믿음 없는 사람입니까? 디모데가 구원 받지 못한 사람입니까? 그렇다고 엘리사가 믿음 없는 사람입니까? 엘리사가 구원 받지 못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도, 엘리사도 다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누구보다도 뛰어난 참으로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병들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치유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 하는 것과 우리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겁니다. 치유되어야만 하나님의 은혜고 치유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치유되든 안 되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7장 11절 이하에 보면 열명의 나병환자가 예수에 의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병 고침 받은 것이 곧 구원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는가 하면, 믿음이 있는 사람의 병을 고쳐주시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 그 사람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 날이 안식일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들이 “오늘은 안식일이니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옳지 않소.” 하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나를 낫게 해 주신 분이 나더러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하였소.” 유대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그대에게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요?” 거기 13절에는, “그런데 병 나은 사람은 자기를 고쳐 주신분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병 고침 받은 후에도 병 고쳐 주신 분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사람에게 믿음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곳에서 성경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믿음대로 될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물론 살펴 본대로 다는 아닙니다만 대부분이 믿음대로 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백부장의 종을 고치실 때도 백부장에게 “가거라. 네가 믿음대로 될 것이다.”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풍랑을 잔잔케 하실 때는 “왜들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하고 제자들의 믿음이 적은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열 두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것이다 믿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서 고침 받았을 때도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해 “기운을 내어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9장 22절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바로 그때에 그 여자가 나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눈 먼 두 사람을 고치실 때,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물으셨고, 그들이 “예. 주님!”하고 대답하자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 외에도 다 열거 할 수 없지만 그렇게 믿음을 말씀하시고 병을 고쳐주신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내 병이 또는 누구의 병이 고침 되지 못 한 것은 믿음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 건데 믿음이 없어서 병 고침을 받지 못했으니 구원도 못 받는 거 아닌가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산 위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변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그 산에서 그냥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 아래로 내려가셨습니다. 산 아래. 거기에 한 귀신들린 아이가 있었고 예수님의 아홉 명 제자가 그 아이를 고치려 했으나 고치지 못했습니다.
아이에 대해 물으시는 예수님께, 그 아이의 아버지는 “하실 수 있으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하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그러자 그 아이 아버지는 큰 소리로 외쳐 말했습니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아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안 되고. 왜 되는지를 보게 됩니다.
우선, 왜 안 되었습니까?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까?
1)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구의 믿음입니까? 바로 아이 아버지의 믿음 입니다. 아이 아버지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역사는 주님을 믿는 믿음을 따라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인 나사렛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별로 능력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거였습니다.
예수께서 병자 고치시며 “네 믿음대로 되어라”하고 말씀하실 때 그 믿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이심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내 병이 고침 받게 될 줄 믿습니다.”고 하는 내 믿음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하기도 하잖아요. “누구는 참 믿음이 좋아서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는 식으로 말하잖아요. 이때의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자기의 믿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주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마다 뭐가 커지느냐 하면 신앙의 교만만 커집니다. 그래서 “내 믿음”을 자랑 합니다.
보세요.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외칩니다. “내 믿음 없는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아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아버지에게 믿음이 생겨서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믿음이 생기도록 고쳐주신 것입니다. 예수 당신이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이심을 믿게 하시기 위해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네 믿음대로 되어라”고 말씀하실 때 그 되어진 일들을 눈여겨보십시오. 모두가 다 “예수님은 능히 하실 수 있다.”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병들었다기에 고치러 가시던 예수님. 그 때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통보를 받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이제 끝났구나!” 생각했을 겁니다. 그 때 회당장 야이로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럴 때 무엇을 믿으라는 겁니까? “이 아이가 살아날 줄 믿습니다.” 그겁니까? 솔직히 죽은 사람이 살아 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못 믿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살아날 줄 믿습니다.” 하는 내 믿음으로 그 아이가 살아나겠습니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믿으라는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겁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 딸을 고쳐 주기를 간청했을 때는 예수님이 고칠 수 있는 분이라는 걸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유대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않고, 또 예수님을 가까이 했다가는 그 당시 종교와 사회 지도자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고, 심지어 회당장의 자리에서 떨려 날 수 있는데도,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설령 그 딸이 죽었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라는 겁니다. 병든 자 고칠 수 있듯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으라는 겁니다.
사도행전 3장. 선전 미문에 앉은 못 걷는 사람 베드로가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평소에는 그냥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마치 주술 같이 되었습니다. 마치 드라큘라 영화에서 십자가와 마늘을 내밀면 드라큘라가 도망하거나 접근하지 못하기에 십자가와 마늘을 가지고 다니거나 내미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아닙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이 말에 있는 것 아닙니다. 정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 곧 구원자이심을 믿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안 되는 겁니다.
2) 또 그 아이를 못 고친 이유가 뭡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마가복음 9장 29절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이런 부류는 기도로 쫓아내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쫓아낼 수 없다.”
이럴 때도 우리는 오해 합니다. 그래서 내세우는 것이 “내 기도”입니다. “내가 열심히 기도하니…….” 이것은 내 기도 입니다. “아무개의 기도는 능력이 있다.” 이럴 때도 아무개의 기도입니다. 이것은 기도 그 자체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해야하고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 오는 통로입니다.
그렇기에 기도 역시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믿음으로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외에는”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는”하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아니면 기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요한삼서 2절에, “사랑하는 이여, 나는 그대의 영혼이 평안함같이 그대에게 모든 일 잘 되고 그대가 건강하기를 빕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면 영혼이 잘 되는 겁니까? 어떻게 하면 영혼이 평안할 수 있습니까? 영혼이 잘 되는 것 같이 영혼이 평안함 같이 모든 일이 잘 되고 건강해진다는데 말입니다.
거기 3, 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도들 몇이 와서 그대가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 그대의 진실성을 증인해 주는 것을 듣고 나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 보다 더 기쁜 일이 나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잘되는 것, 영혼이 평안하게 되는 것은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길이십니다. 그 분이 곧 구원의 길이며 살아나게 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곧 우리를 죄와 죽음과 고통에서 자유롭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생명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를 절망과 죽음에서 살려 내십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 그분이 말입니다.
예수에게서 뭐가 나온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예수님께 기도했더니 예수께서 약을 주시더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살아나게 하는 길이요, 죄와 죽음과 고통에서 자유롭게 하시는 분이요, 절망과 죽음에 우리를 살려주시는 그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믿음은 적극적입니다.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입니다. 열두 해 혈루증 앓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소경 바디매오가 소리쳤습니다. 눈 먼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 따라 실로암 못에 가서 씻었습니다.
“주님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주님께 나아가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곧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허물 때문에 대신 찔림을 받으신 예수.
우리의 약함 때문에 대신 상처를 믿으신 예수.
우리가 평화를 누리도록 대신 징계를 받으신 예수.
우리의 병이 낫도록 대신 매를 맞으신 예수.
그분, 그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네 눈을 씻으라”고 하십니다.
“오그라진 손을 내 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라고요?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됩니다!
이미 예수님은 우리의 병이 낫도록 대신 매를 맞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으면 고침 받게 됩니다.
우리는 건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의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를 고쳐 주십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믿으십니다.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 기도하십시다. 절망이 고침으로 소망이 됩니다. 불평이 고침으로 감사 됩니다. 가난 부요함으로, 질병이 건강으로 고침 받게 됩니다.
찬송가 528장을 부르고, “내 병을 고쳐 주옵소서.” 기도 하십시다.
우리 교회는 날마다, 순간마다, 치유하시는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인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십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