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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노의 결국 (롬 1: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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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유재명 목사

신앙생활에 있어 또 하나의 축복은 주님이 나를 만나주신 강력한 경험을 간직한 경우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주님을 만나보셨습니까? 저는 지금 주님을 아느냐가 아니라 주님을 만났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주님을 보았느냐가 아니라 주님을 만났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주님을 들었느냐가 아니라 주님을 만났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먼저 너무도 크고 귀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 그리고 긍휼과 구원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이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셨던 하나님이 아간이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심판하셨던 하나님이 언제까지나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거나 언제까지나 사람에게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적 경험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의미입니까?
롬1장은 하나님을 진노하시는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사랑의 하나님만이 아니요 더 이상 용서의 하나님만이 아니요 더 이상 은혜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진노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은 때로 물질적으로 때론 건강으로 때로는 자녀의 문제로 우리를 간섭하시곤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떠나는 요나에게 풍랑과 함께 찾아가셨던 하나님이 우리를 놓아 버리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아직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놓아버리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손을 거두워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진노의 하나님이 진노의 방법으로 ‘유기’ 내버려 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떠난 하나님의 포기입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계속된 죄인을 따라가면서 징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된 죄인에게 간섭을 거두시고 “이제 니 맘대로 해라” 하나님이 놓아 버리신 것입니다. 24절에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셨다” 했으며 26절에는“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다” 했습니다. 오늘본문1장 28절에는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셨으니”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저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부끄러운 욕심에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신 것입니다. 진노의 결국은 하나님의 포기입니다. 진노의 결국 앞에 놓여버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첫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을 담는 그릇입니다. 인간의 가슴속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절대공간이 있습니다. 물고기가 물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요15장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안에 내가 저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그 마음에 하나님을 품고 살 수 있음은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 그 하나님이 그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간섭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죄성과 욕심과 자꾸만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심과 나의 원함이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슴에 품어 보십시오. 내가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안에 구원의 주님이 계신 것입니다. 이때부터 구원의 백성들은 내 생각 내 마음대로 해서는 평안이 없습니다. 내가 힘들어도 내가 억울해도 내가 손해를 보아도 내 안에 계신 주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내게 임한 주의 말씀 따라 해야 평안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까?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한번 살고 싶은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이유가 바로 내 마음대로 해보고 싶다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도 씻어라 일어나라 밥 먹어라 얼른 니 방에 가서 공부해라라는 부모의 간섭이 싫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간섭이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고 사춘기 소년 소녀들은 가출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기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면 행복할까요?그것은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사춘기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울타리를 떠나 가출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것입니다. 삶속에서도 유혹을 받습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고 내가 원하는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교회에 직분에 매이지 않고 좀 자유 했으면 합니다. 그래서 지금쯤이면 그런 마음들이 있습니다. “내년에는 아무것도 안해야지”입니다 과연 그리되면 자신에게 자기통제능력이 있을까요? 과연 그리되면 자신에게 자기 절제 능력이 있을까요?

사람의 마음은 언덕 비탈길 위에 놓여있는 수레와 같다 합니다. 언덕위에 수레를 올려놓았을 때 위에서 잡아당기는 힘이 없으면 밑으로 굴러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균형을 유지하려면 계속위에서 잡아당기는 힘에 매여 있어야 합니다. 만약 매인 것이 풀려진다면 위에서 놓아버려진다면 수레는 자기를 조절하지 못하고 곤두박질친다는 것입니다. 결국 버려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언덕위에 있는 수레처럼 하나님께 매여 있어야만 합니다. 신앙인은 처음부터 언덕위에 있는 수레처럼 교회에 사명에 매여 있어야만 합니다. 수많은 갈등 속에서도 교사를 해보면 그나마 교사라는 사명이 나를 지켜 준 것을 알게 됩니다. 수많은 바람 속에서도 자녀를 꼭 붙들고 산 엄마들의 고백은 내가 내 아이들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나를 지켜주었다는 고백을 합니다. 신앙도 삶도 무엇엔가 매여 있다는 것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이는 마치 끈에 달린 연이 높은 창공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끈이 잘린 연은 곧 중심을 잃고 곤두박질치고 맙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습니까? 우선은 내 마음대로 믿고 내 마음대로 선하거나 악해 질 수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인생의 깊은 경험을 통해서 고백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인생은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내 기분 내 감정까지도 내 마음대로 조절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무엇인가 내 마음대로 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잠16:9절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 할 찌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루의 계획, 한 달, 일 년의 계획을 내가 세우기는 하지만 후에 보면 내 마음대로 내 계획대로 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불 들린 사람들이자 매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담고 사는 것이 큰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그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상실한 마음대로라는 말은 망가진 마음이요 깨어진 마음이니 하나님이 없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담겨진 마음은 바로 하나님의 생명과 빛을 담고 사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고 빛이 있음은 썩지 않고 쇠하지 않습니다. 성장이 있고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상실한 마음들은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 것들은 생명이 없습니다.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죽은 것이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꽃꽂이와 같습니다. 며칠은 아름답습니다. 끊임없이 바꾸어 주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은 오늘 좋아보여도 부작용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이 담겨진 마음은 하나님의 생명을 담고 사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삶속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 인내와 자비와 양선 그리고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참 생명이신 하나님이 없는 마음들은 썩은 마음입니다. 상실한 마음들입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도덕적 판단이 마비 된 상태를 말합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옳은지 철저하게 무너져 버렸습니다. 생명의 열매대신 썩어 있는 인간의 마음에서 나는 냄새를 보십시오 28절에서 31절까지 보면 21가지의 썩은 냄새들이 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21가지의 죄의 냄새들을 보면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 “자신 안에서 나는 죄의 냄새”입니다.

모든 불의는 하나님의 의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불신앙에서 나타나는 죄 성입니다. 이는 곧 사람에게서 선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추악함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즐기는 마음입니다. 탐욕은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입니다. 악의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악한 마음을 말합니다. 관계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죄악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요한일서 4장7절에서 8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포기한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사랑이 아닙니다. 시기와 살인과 분쟁 그리고 사기와 악독이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시기는 남을 정죄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남의 번영과 남의 잘되는 것을 못 보아주는 못된 죄성들이 있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오거나 잠을 못 이룹니다.
시기가 얼마나 무서운지 압니까?

기록에 보면 옛날 어떤 임금이 라이벌 의식이 있는 두 장관을 불러서 말을 합니다. “무엇이든 청하라 먼저 청하는 사람에게 마땅히 줄 것이요 다음에 청하는 사람에게는 먼저 청한 것의 갑절을 주리라” 합니다. 그런데 두 장관이 서로 말을 안 합니다. 먼저 저 놈이 청해야 내가 나중에 갑절을 받는다는 욕심과 시기 때문에 먼저 청하지 않습니다. 임금은 두 사람에게 기회를 더 주어 내일까지 정해서 오라합니다. 다음 날 역시 두 장관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임금의 호통에 한 장관이 이야기 합니다. “내가 먼저 청하기는 하겠지만 저 놈이 갑절을 받으면 약이 올라 못 견디겠습니다.” 하면서 한 가지 엉뚱한 청을 하는데 “임금님! 제 왼쪽 눈을 뽑아 주십시요”라고 청을 한 것입니다. 내가 한쪽 눈을 뽑으면 저놈은 갑절이니 두 눈이 아닙니까? 이렇게 인간의 시기는 무섭습니다.

시기하는 마음에는 죄의 썩은 냄새가 진동합니다. 시기는 결국 살인을 부릅니다. 사람을 죽이는데 까지 갑니다.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여 죽였듯이 말입니다. 또한 분쟁이 있습니다. 분쟁은 교회공동체와 가정공동체에는 적입니다. 마귀의 전공이 바로 분쟁하게 하는 것입니다. 분쟁은 분열을 낳고 결국 공동체를 와해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있는 곳에는 평안과 일치가 있으나 마귀가 있는 곳에는 분열과 분쟁이 있을 뿐입니다. 다음엔 사기와 악독입니다. 또한 입에서 나는 죄의 속성들이 있습니다. 수군수군 하는 것과 비방하는 것들입니다. 말을 만들어 냅니다. 공개적으로 비방합니다. 또한 자기 영혼을 망가뜨리는 죄의 냄새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와 능욕하는 자, 교만한 자, 자랑하는 자, 악을 도모하는 자, 그리고 부모를 거역하는 자들은 결국 자기 영혼을 망가뜨리는 죄인들입니다. 마지막으로 공동체를 파괴하는 죄가 있는데 우매한 자, 배약 하는 자,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들입니다.
문제는 이런 죄성들이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도 있다는 데 있습니다. 왜입니까? 은혜에서 멀어지면 원래 사람들의 근본은 죄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존재를 하나님이 은혜로 덮어버리신 것입니다. 은혜에서 멀어지면 안 믿는 사람들과 같이 되고 오히려 더 심하게 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단단히 붙들려 있어야 합니다.

셋째: 자기들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오인하는 자들입니다.

32절을 보면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합니다.
알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알기는 알지만 아는 데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죄성’대로 상실한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내 생각이 나를 이끌고 다닙니다. 그래서 마음은 진리를 좋아하지만 선택은 꼭 악을 선택합니다.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사람들은 에덴동산의 실수를 재현하고 삽니다. ‘정녕 죽으리라’ 라는 하나님의 단언하심이 있어도 저들은 설마합니다. 행여 죽을까 합니다. 점점 죄 속으로 들어갑니다. 요즘 성도들은 설마하며 죄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갑니다. 지옥이 있다 해도 하나님이 싫어한다 해도 쉽사리 행여 하며 하나님을 만홀히 여깁니다. 더 큰 아픔은 죄의 기준들이 무너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선악과를 자기만 먹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먹자는 것과 같습니다. 죄의 기준들은 무너져 가고 양심이 파선된 사람들은 납치, 살인, 테러 등을 서슴없이 해댑니다. 선악과를 먹고도 오히려 큰 소리를 치는 꼴입니다. 철저한 이기심 앞에 망가져 가고 있습니다.
죄를 정당화 합니다. 다 그래...나만 먹었나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마음에 하나님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을 마음에서 기뻐하십니까? 하나님의 원하심 앞에 하나님의 말씀앞에 때론 충돌이 일어 날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고백 할 수 있음은 축복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느 쪽으로 이끌리고 있습니까? 생명의 하나님의 말씀들은 내 안에서 열매들을 맺게 할 것입니다. 삶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자로 맺어야 하는 열매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외에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알고도 죄에 끌려 삽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세상을 그리고 죄를 이기는 힘이 됩니다.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알면서도 이기지 못하는 인간의 본성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알면 아는대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감동을 주시면 감동을 주시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적어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인지 압니다. 구원 받는 백성임에도 아직도 죄의 쓴 뿌리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기회가 주어지고 회개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죄를 죄로 보고 죄가 생각나는 순간 겸손하게 무릎을 꿇을 수 있다면 축복입니다. 그래서 가장 큰 축복은 거룩함과 깨끗함입니다. 모든 죄는 마음에 삶에 하나님두기를 싫어하는데서 시작합니다. 모든 죄는 마음에 삶에 하나님두기를 좋아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 되어야 합니다.

사람 안에 있는 죄의 쓴 뿌리는 내 힘으로 꺾을 수 없습니다. 내 힘으로는 죄 하나 이길 힘이 없습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은혜로 채우는 것입니다. 예수로 채우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이기려 하지 말고 내안에 계신 예수님이 이기게 하십시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은혜를 사모하고 마음으로 무장되기를 소원합니다. 죄를 적당히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죄는 죄입니다.
가장 큰 능력은 죄를 이기는 것이요 가장 큰 능력은 거룩함과 깨끗함입니다. 사람의 암은 언덕위에 수레와 같다 했습니다. 하나님께 붙들려 있어야 합니다. 말씀에 붙들려 있어야 합니다. 사명에 붙들려 사는 것은 행복입니다. 하나님을 놓아버리지 마십시오. 놓으면 파선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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