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더 나은 의(4) (마 5:33-37)

  • 잡초 잡초
  • 242
  • 0

첨부 1


- 설교 : 노강국 목사

오늘은 종교개혁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마틴 루터 수도사가 그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성경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95개조의 질문을 작성하여 비텐베르크 성당의 문에 붙였습니다. 이 일을 종교개혁의 시작으로 평가하여 오늘을 종교개혁일로 삼은 것입니다. 오늘 종교개혁일을 맞이하여 따로이 본문을 택하지 않고, 계속해서 생각해보는 마태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이 지녀야 할 우리 신앙의 바꿔야 할 요소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개혁이라 함은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부터 진지하게 생각하는 데에서 출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매우 유대적인 색채가 강한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6장에도 마태복음의 산상 수훈과 같은 내용의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이 “맹세”에 관한 내용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마태복음보다 유대적인 색채가 아주 약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마태복음은 유대 크리스천들을 위하여 씌어진 복음서이고, 누가복음은 이방인 크리스천들을 위해 씌어진 복음서라고 말들을 많이 합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어떤 부분이 한 곳에서는 빠져있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으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상당히 유대적인 내용일 것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맹세하는 일에 대한 가르침” 더 나아가서 “말하는 일에 관한 가르침”은 이방인들보다는 유대인들에게 더 심각하게 여겨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이해하고자 함에 있어서 상당히 유대적인 접근을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맹세”에 대한 유대인의 이해 : 맹세와 유대인의 관계
2. “맹세의 도구로서의 말”에 대한 유대인의 입장

1. “맹세”에 대한 유대인의 이해 : 맹세와 유대인의 관계

이스라엘 민족은 사실 “맹세의 백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경전이라고 하는 성경의 이름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구약, 신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 “약(約)”이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계약의 의미인 것입니다. 계약이란 “꼭 지키겠다”는 약속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약속을 이행하겠다고 하는 서약의 모습이 필연적으로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서약을 자기 입장에서 다짐하는 모습을 우리는 “맹세”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맹세의 문제는 사실 엄격하고 또 중요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특히 이 서약의 대상이 하나님일 경우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십계명 중에서도 이러한 엄격성이 잘못 이용되지 않도록 하는 계명이 있는 것입니다. 3계명,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출 20:7)는 계명은 바로 이러한 성격을 반영하는 계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인용한 구약의 말씀은 레 19:12의 말씀입니다.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지 말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라.”

그리고 맹세와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맹세란 그 성격상 자기보다 더 크거나 위대한 존재를 두고 할 때에 그 의미와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히 6:13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며”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맹세하곤 하였던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두고 맹세하면 이는 우상을 섬기는 것으로 여기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 맹세한다는 형식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나가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시간과 역사가 흘러감에 따라 이 맹세는 형식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게 되는 것으로 여기게 될까 두려워 여호와의 이름이외의 것을 빙자하여 맹세하는 방법을 강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보좌”라는 의미로 “하늘”, 그리고 “하나님이 발을 딛고 서 계시는 발등상”이라는 의미로 “땅”을 두고 맹세하고자 하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집이라고 여겨지는 “예루살렘”을 맹세의 조건으로 두고 맹세를 하고자 하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들먹거리는 것이 어색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기 머리를 두고 맹세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예수님 시대에 보여졌던 맹세에 대한 일반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반 현실에 대해 예수님은 두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부정적인(Negative) 접근입니다. 여기서 “도무지”라는 말은 헬라어로 “홀로스”라는 말인데 이는 “일반적으로 말해서”(generally speaking), 혹은 “실제로는”(actually)이란 의미의 단어입니다. 즉,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은 “맹세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하심으로 또 하나의 율법을 만들려고 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의 성실한 관계를 지니는 데 있어서,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이나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이용하려고 하지 말라는 단순한 의미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맹세”라는 표현이나 제스쳐(gesture) 없이도 그저 단순하게 성실함 그 자체의 모습과 자세를 지니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우선 이러한 맹세에 대한 오해를 버려야 하겠습니다. 즉 우리의 삶에서 때로는 요구되는 서약 같은 것을 예수님께서 금지하셨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서약에 있어서 엄숙함을 깊이 해야 함을 예수님은 요구하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례식이나  임직식 혹은 취임식할 때 일종의 서약을 합니다. 이러한 서약을 예수님이 금하신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2. “맹세의 도구로서의 말”에 대한 유대인의 입장

또 하나는 37절의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긍정적인 접근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말의 중요성입니다. 이는 번복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예”라고 대답하였다가 곧 “아니라”고 번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행동과 입장에 대한 건전한 일관성을 지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이미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하며 또 이런 점에서 말을 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한 후에 합당한 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십시다, 고후 1:18-20,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예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이 말씀을 다르게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해놓고는 ‘아니라’ 하는 것이 아니였노라. 예수 그리스도는 ‘예’하고는 ‘아니라’하고 번복하지 아니하였느니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을 비롯한 우리 동양권에서는 말(언어)에 대한 일종의 거부감이 있습니다. 이는 말이 필요 없다거나 혹은 말의 명료함을 거부하는 흐리멍텅한 모습이나 모호한 것을 좋아한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이러한 동양 사람들의 언어에 대한 거부감은 말이 가져다주는 한계를 알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언어가 가져다주는 한계를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언어로 표현된 내용을 인식하는데 참으로 어려움을 가지고 오게 마련인 것입니다.

이러한 말의 사용에 있어서 동양과 서양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의 경우는 어떤 일을 설명할 때에 많은 말을 통해서 설명하고 이해를 시킵니다. 하지만 동양 사람들의 경우는 그렇게 많은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간에 의사소통이 잘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렇게 말에 대한 입장이 서양과 동양이 많이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한국 부부는 자기 남편이나 부인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라는 말을 잘 하지 않는 편입니다. 그렇다고 자기 남편이나 부인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느닷없이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면 이는 뭔가 잘못된 일이 있음을 은폐하려고 하는 경우도 됩니다. 하지만 서양 사람들의 경우는 날마다 “I love you”를 하지 않으면 이상하고 어색하다고 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바로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차이인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의 경우,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자기가 한 말이 바르게 전달되게 하기 위해 더 많은 말로 설명하고자 한다면, 동양 사람들의 경우는 언어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한 마디의 말을 하기 전에 깊이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 말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인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말이 가져다주는 단순성과 명료성을 간직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말을 할 때 정확한 말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서의 언어는 “예-아니”로 표현될 수 있는 단순함과 명료성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함” 그 자체는 설명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약 5:12,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하는 것은 ‘그렇다’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이는 말의 오용이나 남용은 거짓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특히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말”이란 곧 “행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행동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곧 “하나님의 행동(일, 역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암시해주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로서 이루어지는 이 “맹세”가 문제가 되는 경우는 곧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말”에 대한 문제를 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적용을 야고보는 “죄”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결국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 있어서의 하나님 앞에서 지녀야 할 성실과 진실성의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신다는 것을 우리는 먼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가림의 자세를 원하시지 않고, 못하면 “못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고 진실한 자세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우리의 삶의 현실에 적용하고자 할 경우, 우리가 지닐 수 있는 자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과장되고 허황된 큰소리치는 자세를 버려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주로 자기 자신을 인정받고자 할 경우, 자기 자신을 믿게 하고자 할 경우에 취하는 자세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이러한 모습 다음에 바로 맹세하는 모습으로 나오게 되는 경우를 잘 압니다. “내 말대로 안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라고 호언장담하는 경우로 치닫게 되는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경우의 맹세를 금지시킨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이렇게 과장되고 허황되며 큰소리치는 자세를 버려야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사람을 따라가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로 “사기꾼도 문제지만, 사기를 당하는 사람도 문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기를 치는 사람이나 사기를 당하는 사람이나 모두 욕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 자신을 과장되게 말하거나, 과장되게 말하는 사람의 말에 현혹되는 일을 피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일관된 자세와 모습을 갖도록 하되, 자신의 잘못을 깨달으면 지체 없이 바꿀 수 있는 용기를 함께 지녀야 하겠습니다. 우리 한국 속담에 “변소가기 전과 갔다 온 후의 말이 다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급할 때에 약속한 것과 급한 것이 지난 후에 그 약속한 바를 무시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어떤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순간의 이익이나 어떤 위기감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번복하고 기회주의적인 자세로 처신하는 것은 삶에 있어서 참으로 위험한 자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일관성 역시 객관적인 타당성이 있는 것이어야지 일종의 무지의 소신이면 참으로 어려워집니다. 흔히 하는 말로 “무식한 자의 소신”이란 것만큼 사람을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일도 드뭅니다. 그러므로 일관성을 지니더라도 그 일관된 자세가 늘 객관성이 있고 상식적인 것인가를 잘 판단할 수 있는 지혜와 그것이 잘못된 것일 경우에는 스스로 고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자세와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셋째로, 말을 바르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훈련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내 생각을 밑바탕에 깔고 듣기 때문에 상대방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훈련을 잘 하기 위해서 도움이 되는 방법(tool)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공부입니다. 성경공부를 하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내 생각을 밑바탕에 깔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좀 더 바르게 잘 알게 되어야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각에 맞추려고 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극복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또 그렇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의 말을 바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옛날 중국의 공자 선생에게 어떤 왕이 물었답니다. “선생님, 만일 선생님이 이 나라의 임금이라면 선생님은 이 나라를 어떤 나라로 만드시겠습니까?” 이에 대해 공자는 “나는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을 정확하게 그리고 바르게 하는 백성들이 되도록 하고 싶소이다”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위대한 스승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공자 선생이 바라는 훌륭한 나라의 모습이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부강하고 평안한 나라의 모습이 아니라, 모든 백성이 자기가 하는 말을 바르고 정확하게 할 수 있는 그러한 나라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한번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아야 할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로 모든 개신교회가 지키는 주일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개신교회는 카톨릭 교회가 예전(Ritual)을 중시하는데 비해 말씀을 더 중시합니다. 그래서 카톨릭 교회보다 설교나 성경연구가 더 발달하고 더 활발하게 진행됩니다. 이러한 설교나 성경공부는 사실 말로 이루어지는 행위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 말의 중요성을 더욱 체감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언어생활을 바르게 간직해 나가는 모습이 우리에게 필요한 종교개혁의 한 모습이요 일환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사실 말을 바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렇게 하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달아야 하고,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조건이 붙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 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시면서 주신 가르침 중에는 이렇게 말을 바르게 하는 성실한 모습도 있음을 깨닫고 이를 위해 더욱 노력하고 정진할 수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지금부터 약 600여 년 전, 종교개혁의 사건을 허락하여 주신 일을 기억하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일찍이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의한 일을 할 때마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을 꾸짖으시고 회개케 하신 하나님께서 중세 시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잘못을 저지르던 카톨릭 교회를 개혁하시기 위하여 말씀의 종들을 통하여 이 귀한 일을 하신 줄 압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삶을 살았던 유대인들을 꾸짖고,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희들이 말하는 모든 말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그러한 말들이 될 수 있도록 그래서 저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전해지고 이루어지게 되는 귀한 모습들이 저희들의 삶의 현실에서 늘 새롭게 반복되어 나타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과 동행하시는 성령께서 저희들의 입술에 합당한 언어로 채워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