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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치료자 예수 그리스도 (막 5: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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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양인 목사

모혈루증 앓는 여자

이 시간 저는 예수님께서 열 두 해 혈루증 앓던 여자를 고쳐주신 본문을 상고함으로써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때는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 가셔서 군대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신 직후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그 때 회당장 야이로가 와서 예수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 가시는데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었습니다.

그 큰  무리 속에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혈루증은 불규칙적으로 하혈을 하는 병으로서 환자는 극도의 빈혈에 시달렸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 병에 걸린 사람은 부정했습니다. 또 그와 접촉하는 물건이나 사람이 다 부정해 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병에 걸리면 늘 사람들과 격리되어 고독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여자는 이 병을 한 두 해도 아니고 무려 열 두 해를 앓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혈루증을 고칠 만큼 의술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치료법은 얼토당토않은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여자는 많은 의원을 찾아다녔으나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재산만 다 허비했을 뿐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병세가 더 중해졌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들은 여자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가 병에 걸려 고생해 본적이 없는 사람은 병자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병자에게는 이중적인 고통이 따릅니다. 하나는 병으로 인해서 육체로 겪는 고통이고, 다른 하나는 고독과 몰이해로 인해서 마음으로 겪는 고통입니다. 그 절망적인 형편에 처해 있을 때, 이 여자는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들었을 때 이 여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분이 계시다니. 예수님만 만나면 나도 살 수 있겠구나. 나도 희망이 있구나. 이 지긋지긋한 병을 떨쳐버리고 건강하게 살 수 있겠구나!’ 절망으로 가득 찼던 이 여자의 마음속에 한 줄기 소망의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 여자는 그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큰 무리 속을 헤치고 나갈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의 소문”이 주는 이 같은 충격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얼마나 사람을 바쁘게 만드는 일이 많은지 모릅니다. 어른으로부터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한가한 사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할 일도 많고, 볼 것도 많고, 즐길 것도 많아서 모두들 바쁩니다. 그런데 그 바쁜 일을 다 제쳐놓고 이 황금 같은 시간에 교회에 나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주님을 만나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열 두 해 혈루증 앓던 여자가 경험한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고 소망의 빛을 보게 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심령에 신선한 충격을 느끼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빛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하신 말씀과 같이, 예수의 소문을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9절로 11절에는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생명의 주님이 오셨건만 알아보지 못하다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 한 부류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심령에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내 보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는 즉시 일어나서 예수님 앞으로 나아옵니다. 이들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로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요 1:12).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고 말씀합니다.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닌 주님의 공로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主)는 왕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곧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실 때 그 사람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됩니다.

죄 가운데 살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그 사람의 영혼 속에는 상상할 수 없으리만치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먼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이 살아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그 영이 죽은 상태에 있습니다. 영이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합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다고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께 대하여 전혀 무관심합니다.

우리는 불신 이웃과 만나서 얼마든지 재미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자녀 교육 문제, 취미 등 다방면에 걸쳐서 허심탄회하게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쪽에서 하나님에 관해서 말을 꺼내면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습니다. 더 이상 대화가 지속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입니다. 문 닫히는 소리가 “쾅!” 하고 들리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생기는 것은 그 사람의 영이 죽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영(灵)이 살아난 사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고 믿습니다. 화초가 빛을 향하여 자라듯이, 그 영혼이 빛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자라갑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그 영혼이 하나님을 사모합니다. 어린아이가 젖을 찾듯이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갈구합니다.




영의 소생에 따르는 축복들

그러나 죽었던 영이 살아남으로써 생겨난 변화는 단지 영적인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잘 되면 그 영적 생명력이 우리의 육체마저 강건하게 만들어 줍니다. 모든 병이 세균에 의해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서 생기는 병이 더 심각합니다. 세균에 의한 병은 항생제로 고칠 수 있지만, 마음이 상해서 생겨난 병은 약으로 고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에는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잠 18:14)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고 하였습니다.

불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가장 먼저 받는 은총은 죄 사함입니다. 사람에게 죽음이 생겨난 것은 죄 때문이었습니다. 타락하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친밀한 사귐이 있었습니다.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는 그야말로 생명이 충만한 곳이 에덴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먹지 말라 하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명을 거역한 것이 바로 죄입니다. 범죄하고 나자 그들은 자기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치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밝은 빛을 피하여 어두움 속에 몸을 숨겼습니다.

범죄한 아담에게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7)…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

이와 같이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습니다. 더욱이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사망의 세력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모든 것이 다 범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 줄 실감할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죄가 병의 원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병든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 병이 생겨난 원인이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듯이, 질병도 마찬가지로 누구나 걸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열 두 해 혈루증 앓던 여자는 예수의 소문을 들었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도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성경에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롬 10:14)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실 때 전도의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전도는 미련한 방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복음은 전도의 방법을  통해서 전파되어 왔습니다.

전도가 이처럼 중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전도는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 내가 믿는 주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 때 전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 어느 나라의 법이든 증인의 증언은 법적 효력이 있는 증거로 인정합니다. 반면에 거짓 증언을 하면 위증죄로 처벌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그것은 각자가 자유로이 결정할 것이지만 그로 인한 책임 역시 각자가 져야 합니다. 열 두 해 혈루증 앓던 이 여자는 복음을 들었을 때 단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며,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때, 이 여자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혈루증도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감히 예수님 앞에 나아갈 용기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 여자는 부정한 병인 혈루증에 걸린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뒤로 물러설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이 여자가 생각해 낸 방법은 예수님의 뒤로 다가가서 몰래 그의 옷에 손을 대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고 믿고 실천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여자는 즉시로 예수님이 계신 곳을 수소문해서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때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그 집으로 걸어가시는 중이었습니다.

이 여자는 오랫동안 혈루증을 앓았기 때문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빈혈로 현기증이 났습니다. 쇠약한 몸으로 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예수님 곁으로 다가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죽을힘을 다해 사람들을 뚫고 주님 곁에 다가가서 그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열심은 신앙의 속성

속담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열심은 신앙의 속성입니다. 열심이 없는 신앙이란 불 꺼진 화로와 같습니다. 형식은 있으나 내용이 없습니다. 사진 속의 화로는 아무런 온기도 전해 줄 수 없듯이, 형식적인 신앙으로는 주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신앙 연조는 오래되었지만 체험이 없고 능력이 없습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와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고 말씀합니다.

기도 응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2)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13)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고 하셨습니다. “7)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고 하셨습니다.

미지근한 상태로 앉아 있는데 은혜가 임하는 경우는 절대로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자만에 빠져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하여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고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혈루증 앓던 이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행동을 뒤로 미루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은 빈혈이 심해서 어지러우니 쉬어야겠다. 오늘은 날이 궂으니 날이 개면 예수님을 찾아가야지. 오늘은 아무개가 찾아온다고 했으니 갈 수 없군. 오늘은 마침 장날이니 먼저 쓸 것을 사야지. 이 여자가 예수님을 만나러 가지 못하는 핑계를 대려면 얼마든지 댈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 여자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합리화했다면 주님을 만나 병 고침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의 이야기가 복음서에 실리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믿은 바를 곧바로 실천했습니다. 이 여자가 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예수님 뒤로 다가가서 믿음으로 주님의 옷에 손을 대는 순간,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말랐습니다. 여자 스스로가 자기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았습니다. 순식간에 날아갈듯이 몸이 가쁜해졌습니다. 온 몸에 생명의 기운이 솟구쳤습니다. “내 병이 나았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사랑하는 성도님들, 믿음의 행위에는 반드시 은혜로운 응답이 임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이와 같은 여자의 믿음을 주님께서 외면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주님께서 지체치 않고 응답하셨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부어주신 예수님

30절에 보니,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여자가 주님의 옷에 손을 댄 것은 일방적인 믿음의 행위로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갔습니다. 그 사실을 예수님 스스로도 아셨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믿는 자와 예수님 사이에 상호작용을 일으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할 때 주님께서는 즉시로 반응을 보이십니다.

그런가하면,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것은 곧 예수님의 몸에서 능력을 뽑아내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생명을 병자에게 나누어 주신 것과 같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와 같은 일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슷한 일을 행할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면, 헌혈을 할 때 우리는 자기의 생명을 일부 나누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 피가 생명이기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하셨습니다.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는 땀이 피처럼 되기까지 힘을 다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일은 소일 삼아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을 송두리째 붓는 희생을 요구합니다.

이는 우리가 주의 몸된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신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주의 일을 할 때 우리는 나에게서 무언가가 흘러나왔다는 느낌을 가질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관객에게 감동을 주려면 배우가 자신의 혼신을 다 해서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냥 형식적으로 연기해서는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배우는 연극이 끝나면 기진맥진해 진다고 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행복한 이유는, 생명을 희생한 진실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에서 능력이 나간 줄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즉시로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무리를 둘러보시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믿음의 고백

그 시간에 예수님의 옷에 접촉한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곁에 있던 제자들은 물론이었을 것이고 그 외에도 여러 사람이 주님의 옷을 스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주님에게서 아무런 능력도 나가지 않았고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법칙입니다. 똑같이 손을 대었더라도 믿음으로 손을 댄 것과 믿음이 없이 손을 댄 것의 차이점은 하늘과 땅처럼 큽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믿음의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셨던 것입니다. 여자는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므로 두려웠습니다. 더 이상 모른 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떨며 와서 주님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고했습니다. 이 여자는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까 안절부절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의 귀에 들려온 주님의 음성은 너무나 부드럽고 자상했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려고 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큰 믿음을 가진 여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여자의 혈루증을 고쳐주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영혼의 구원까지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먼저 이 여자에게서 직접 고백을 듣기를 원하셨습니다. 구원 받는 믿음은 진실한 고백을 전제로 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와 추악한 죄를 자백할 때 죄 사함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일서 1장 9절에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도 고백을 요구합니다. 로마서 10장 9절로 10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해변에서 열 한 제자들과 함께 둘러앉아서 조반을 나누는 자리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시몬은 대답하기를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시몬은 사랑의 고백을 통해서 지난날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자책감을 다 씻어내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여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의 육신 뿐 아니라 영혼까지 치료해 주셨습니다. 질병에서 뿐 아니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전인적인 구원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혈루증 앓던 여자와 같이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가 열 두 해 혈루증 앓던 여자와 같은 믿음을 갖고 주님께 나아가기만 한다면 그 여자가 체험했듯이 우리도 위대한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하고 있으십니까? 치료의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병 낫기를 위해 간구하십시오. 마음의 상처로 인해 고통하는 분들이 있으십니까? 주님께 나아가 여러분의 마음을 토로함으로써 무한한 평강과 위로를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몸과 마음이 건강을 누리려면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 마음에 차고 넘칠 때, 우리를 얽매었던 죄와 사망과 질병과 저주가 제거되고 그 대신 의와 생명과 건강과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나오신 성도님 마다 열 두 해 혈루증 앓던 여자와 같이 큰 믿음을 갖고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아무개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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