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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행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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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한규 목사

< 선교 한국을 꿈꾸십시오 >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하는 민족이 있습니다. 어떤 민족을 사용합니까?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고, 교회의 성장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지고, 젊은이들이 신학교로 몰려들고, 기도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고, 기독교가 사회의 주도적 종교가 되고, 교육수준과 경제수준이 높은 민족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셨습니다.

그런 점을 볼 때 1990년까지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쓰시는 민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 이후에 교회성장이 정체되면서 점차 그런 기대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왜 교회 성장이 정체되었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축복을 받고도 그 축복을 나누는데 인색했기 때문입니다.

1945년, 우리 한국기독교인은 80% 이상이 평안남북도에 몰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그곳의 교회가 초토화되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북한 땅의 교회를 깨뜨리셨습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선교적인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이 부흥할 때 양반을 따지는 남한에서는 기독교가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6.25때 수많은 북한 사람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첫 번째로 했던 일이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중심으로 성실하고 억척같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대략 2-3년 만에 그 지역의 상권을 장악하고 주변에 커다란 돌집들, 즉 교회를 쌓아 올렸습니다.

그러자 그 지역 토박이들이 놀라며 이유를 찾다가 북한 사람들의 성공 뒤에는 옛날 표현으로 ‘예수 귀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복음이 남쪽에도 깊숙이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북한을 깨뜨려 남한을 복음화 시켰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선교의 사명을 외면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을 통해 흩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유랑하는 민족이 되기보다 기쁘게 선교하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받은 축복을 선교를 위해 사용하지 않으면 그 축복 받은 만큼 고난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교가 없는 축복은 미완성의 축복일 뿐입니다.

한국 개화기 때 선교사들은 우리나라의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이름 조선은 영어로 chosen, 즉 ‘선택받은 사람(선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처럼 선민이 된다는 것은 축복이지만 그만큼 선교의 의무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선택받은 민족은 선교하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선교의 중심적 국가가 될 가능성은 어느 민족보다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한국 사람은 황인이니까 흑인과 백인 사이에서 인종적인 거부감이 적고, 세계 인구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동양인을 전도하기 좋습니다.

둘째, 한국 사람은 먹성이 좋습니다. 원체 가난하게 살아서 웬만하면 다 먹습니다. 뿌리부터 칡뿌리, 연근뿌리, 도라지 뿌리, 인삼 뿌리, 마 뿌리까지 먹고, 잎사귀로 올라가서 고추이파리, 고구마 순, 호박이파리, 깻잎파리까지 먹습니다. 게다가 보신탕에서 번데기까지 먹으니까 어느 나라 가든지 먹는 문화에 비교적 잘 적응합니다. 잘 먹어야 친구가 되기 쉽습니다.

셋째, 우리나라는 더울 때는 무척 덥고 추울 때는 무척 추우니까 어떤 기후 조건에도 다 적응할 수 있는 강인한 체력이 있어서 어디든지 못갈 데가 없습니다.

넷째, 한국 사람은 평화애호민족입니다. 역사상 수많은 침략을 받았어도 한번도 침략을 한 적이 없으니까 그 역사적 사실만 대면 금방 선교지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섯째, 한국 사람은 영력이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꾸준히 새벽기도 하는 민족은 우리 민족밖에 없고, 고난을 많이 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말씀의 감동도 있습니다.

여섯째, 한국 사람은 다른 나라에 비해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이 신학교에 갑니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나라를 선교의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할 만한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세계 250여 나라에 24,000 종족이 있는데 그중 복음을 듣지 못한 종족은 10,000종족이 넘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복음으로 이끌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선교 때문입니다.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델이 나옵니다. 바로 안디옥 교회인데, 안디옥 교회는 어떤 교회였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었을까요?

1.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교회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으로 흩어진 성도들이 로마의 제 3도시인 안디옥에 세운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 말씀을 보면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붙었는데, 그 말은 사람들이 그들의 믿음을 인정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그처럼 인정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청일전쟁 후, 일본은 일본의 뜻을 거역하는 수구세력의 핵심을 민비로 보고, 국모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난자해서 불로 태워 죽이는 을미사변을 일으킵니다. 그 후 고종 황제는 불안하여 잠을 못 이룰 때마다 종종 언더우드 선교사를 불러서 편히 주무셨는데 고종은 주님을 영접하지는 않았어도 가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신하도 믿을 사람이 없고, 오직 야소인(예수 믿는 사람) 밖에는 믿을 사람이 없다.”

믿는 사람은 믿음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기 전에 먼저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왜 이단이 생깁니까? 사람이 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교만하지 않도록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사가 되기 전에 학자가 되고, 학자가 되기 전에 성도가 되고, 성도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인은 ‘사람이 된 교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아니! 저런 사람이 교회에 다녀?”라는 말을 듣는 주인공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가 명백히 잘못한 행동을 하고 욕을 먹으면서 그 욕먹는 것을 십자가라고 생각하고 욕먹는 행동을 더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항상 칭찬 받는 교인이 되기에 힘써야 합니다.

2. 벽이 없는 사랑이 넘치는 교회

본문 1절에 나오는 안디옥 교회의 리더들의 명단을 보면 안디옥 교회는 벽이 없는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이란 인물이 나옵니다. 여기서 니게르란 니그로(Negro)란 말로 ‘흑인 시므온’이란 말입니다. 이 ‘흑인 시므온’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구레네 시몬’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리고 ‘구레네 사람 루기오’란 인물이 나오는데 구레네가 아프리카 북부도시이기 때문에 역시 흑인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 명단을 보면 안디옥 교회는 인종적인 벽이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1절을 보면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이란 이름이 나오는데 그는 헤롯 왕과 같은 젖을 먹고 자란 동생으로 당시 최고의 상류층 인물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상류층과 하류층의 계층간의 벽도 없었습니다.

출신지역도 다양합니다. 바나나는 구브로 출신이고, 시므온과 루기오는 아프리카 출신이고, 마나엔은 팔레스타인 출신이고, 바울은 터키 다소 출신인 것을 볼 때 안디옥 교회는 지역적인 벽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지도자들은 나이가 많은 순서대로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나바가 나이가 제일 많고 사울이 제일 젊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세대간의 벽도 없었습니다.

나이순서가 아니라면 바나바가 담임목사이기 때문에 제일 앞에 나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왕실 귀족인 마나엔보다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인 시므온과 루기오가 앞서 언급된 것은 시므온과 루기오가 얼마나 탁월한 사람들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모이면 배가 산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안디옥 교회는 그런 불화가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안디옥 교회는 ‘큰 가슴과 큰마음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지금 급격히 국경이 없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가 세계적인 인물을 키우고 내일을 준비하려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월드 비전과 큰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교단의 벽도 낮춰야 합니다. 자기 교단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교단의 벽을 높게 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요즘은 벽이 높은 것을 자부심의 표시로 보지 않고 두려움의 표시로 봅니다. 자꾸 벽을 높게 쌓는 것은 개방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오염될까봐 그렇게 한다는데 그 말은 내가 가진 것이 별것 아니라는 왜소한 태도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의 비웃음을 받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옛날에는 타 교단 목사님을 자기 강단에 세우지 않았고, 다른 목사님 말씀도 못 듣게 하고 담임목사님 말씀만 들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방송과 정보통신이 발달해서 아무리 다른 목사님 말씀을 못 듣게 해도 소용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태도를 이상하게 봅니다. 차라리 마음껏 더 들으라고 개방해야 부작용도 적습니다. 모든 교회는 이단만 아니라면 서로 기쁘게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외형이 큰 교회가 아니라 마음이 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3. 은혜가 넘치는 교회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 구절을 보면 안디옥 교회는 섬김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섬김이 없으면 신앙도 자라지 않고 축복도 받지 못합니다. 교회생활을 가장 잘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많이 섬겨주려고 하고, 적게 칭찬받으려고 하면 교회생활을 최고로 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안디옥 교회는 금식과 기도가 넘치는 성령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2절 말씀에서 그들이 금식하고 기도할 때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자 3절 말씀에서 그들은 또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금식의 보다 큰 의미가 있습니다. 금식은 나의 입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만이 금식이 아니라 나의 눈과 귀와 마음과 생각에 나쁜 것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도 금식입니다.

가끔 눈으로 이상한 장면이 보입니다. 그 보는 금식을 잘해야 합니다. 가끔 귀로 이상한 소리가 들립니다. 이단의 소리도 들리고, 점쟁이의 소리도 들리고, 상처 주는 소리도 들립니다. 그런 소리를 절제해서 듣는 금식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쁜 일에 손을 대는 손 금식과 엉뚱한 곳으로 가는 발 금식도 잘해야 하고, 무엇보다 잘못된 마음을 가지는 마음 금식을 잘해야 합니다.

금식한 후에 옛날처럼 여전히 싸우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갈등을 좋아하고, 자랑을 좋아하면 그것은 금식을 한 것이 아니라 굶식을 한 것입니다. 먹는 것을 금하는 것은 하나의 예표입니다. 먹는 것을 금하는 훈련을 통해서 나쁜 것을 금하는 진정한 금식으로 연결될 때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 있게 되고, 급속히 치유와 회복과 문제해결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4.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교회

본문 2절에서 왜 안디옥 교인들을 금식하며 기도했을까요? 혹시 이런 기도를 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 교회가 자꾸 부흥되고 있습니다. 이제 본당도 넓혀야 하고, 교육관도 필요하고,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채워주세요.” 그러나 성령님은 예배당 크게 짓는 그런 응답이 아니라,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선교사로 파송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제일 이루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선교'임을 깨닫게 됩니다. 선교는 예수님의 최후의 명령이었고, 지상명령이었습니다. 교회가 세워진 목적은 선교 때문이고, 성도가 구원받은 목적도 선교 때문입니다.

그처럼 선교가 중요해도 교회의 핵심 기둥인 바나바와 바울이 떠나면 교회가 크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3절 말씀을 보면 안디옥 교회는 한 마디도 불평하지 않고 다시 금식하고 기도한 후에 결국 성령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도 안정된 교회의 목사로 지내다가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성령님의 뜻에 순종했기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름을 떨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너의 소중한 것을 선교를 위해 떠나보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인간적으로는 여러 가지 변명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 조금 더 안정이 된 후에 하겠습니다. 우리도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교회 수리도 하고, 사야 할 것도 많습니다. 그런 일은 좀더 여유 있는 교회와 여유 있는 사람에게 시키세요. 저희들의 형편을 이해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그런 변명을 포기하고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큰 축복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축복과 기적은 순종의 역사입니다. 사람들은 실력이 있고, 재력이 있고, 인맥이 있어야 성공하는 줄 알지만 진짜 성공 요인은 바로 순종입니다. 특히 순종하기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순종한 만큼 반드시 큰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5. 소중한 것을 드릴 줄 아는 교회

당시 안디옥 교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성령님의 뜻을 따라 그들이 가진 최상의 두 사람을 선교에 내어드렸습니다. 오늘날 목회에 경험이 없는 사람, 목회에 희망이 없는 사람, 목회에 실패한 사람이 선교를 나가는 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목회에 경험이 많고, 목회에 성공한 사람이 선교를 나가는 것이 진짜 성경적인 선교입니다. 선교는 가장 유능한 사람, 가장 훈련된 사람, 우리 중에 없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사람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선교를 위해서는 최상의 것을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쓰고 남은 시간과 물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선교에 시간과 물질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은퇴한 후에 열심히 헌신하겠다고 하지 말고 지금 건강하고 다른 할 일도 많을 때에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큰 손해를 감수한 헌신을 기뻐하시고 그 헌신을 축복의 재료로 삼으실 것입니다.

행복의 제일 요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헌신입니다. 불행한 가정을 보십시오. 무엇이 없습니까? 틀림없이 헌신이 없습니다. 결혼은 헌신입니다. 받으려고 결혼하면 받지도 못하고 상처만 남습니다. 그러나 헌신하려고 결혼하면 오히려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사람에게 헌신이 없으면 행복도 없습니다. 왜 자녀들에게 많은 것을 줄 때 손해 본다고 생각하지 않고 더 행복합니까? 그 말은 행복은 헌신에 있다는 말입니다. 헌신의 대상, 사랑의 대상이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선교를 외면하면 결코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선교의 가장 큰 장애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나친 우리 의식’입니다. “우리 교회도 필요한 것이 많은데 남까지 돕느냐? 우리 주변에도 전도 대상자가 많은데 꼭 외국에 나가 선교해야 하느냐?” 만약 안디옥 교회가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사도 바울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나라에 복음 전파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이웃도 살펴야 하지만 동시에 선교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마음이 커야 하나님의 축복도 커집니다. 선교하지 않으면 핍박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를 흩으신 것처럼, 우리가 선교하지 않으면 환난과 핍박이 닥쳐서 우리의 소중한 것을 다 앗아가 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내 것을 빼앗기는 자가 되지 말고 미리 선용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빼앗기는 삶의 고통에서 면제될 것입니다.

< 열심히 선교해서 축복 받으십시오 >

전도서 11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계산적인 생각이 없이 상류에서 식물을 던지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계산을 초월해서 반드시 축복의 열매가 돌아오게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선교하면 겉으로 계산하면 교회에는 유익이 전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계산을 초월해 선교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축복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어떤 장로님 말에 의하면 선교에 헌신하니까 끊임없이 드려도 하나님이 더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예쁜 짓을 하면 더 사랑 받고, 더 축복 받게 될 것입니다.

지난번 황수 선교사님 교회에 방문했을 때 우리 여선교회에서 회비를 내고, 김을 팔고, 떡을 팔아 모아두었던 재정을 몇 천 원만 남기고 몽땅 선교사님에게 드렸습니다. 김재호 선교사님이 오셨을 때도 여선교회에서 모든 재정을 톡톡 다 털어서 선교사님에게 드렸습니다. 그처럼 선교사님을 위해서는 다 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때 여선교회 회원들도 기뻐했고, 저도 기뻐했고, 하나님도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선교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시입니다. 진짜 은혜를 받으면 당연히 그 은혜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또한 선교는 축복의 기준입니다. 선교하는 교회가 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절대로 없고, 선교하는 성도가 복을 받지 못한 경우도 절대로 없습니다.

이제는 성장하면 선교하겠다고 하지 말고, 선교하면 성장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안정되면 선교하겠다고 하지 말고 선교하면 안정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항상 안디옥 교회 성도들처럼 열심히 선교에 동참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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