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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 (삼상 2:27-36, 롬 8:5-11, 요 2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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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오동 목사

1. 우리가 흔히 쓰는 말 가운데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아브라함이 나이 많고 그의 아내 사라도 아이를 생산할 수 있는 나이가 지나서 대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노부부는 다메섹 엘리에셀이라는 사람을 후사로 정할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들을 약속해 주셨고 때가 되어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능히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어떤 노력으로도 자기 구원을 성취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모든 노력은 절대 절망적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고 한 말씀은 모든 인간들의 절망적 외침을 대변한 말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독생자를 우리 죄인을 위한 화목 제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대로 거기서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사람의 절망이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중세기 때 기독교는 그 부패와 타락이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교회는 교직자들을 위하여 교인들을 갈취하는 소굴과도 같았습니다. 영적으로도 그랬지만 육적으로도 당시 교인들은 교회 때문에 오히려 고통이 더 가중되었습니다. 교회가 존재해야할 이유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정말 출구가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 속과도 같았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마르틴 루터를 위시한 종교 개혁자들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죽어가던 교회가 새로운 생명을 얻고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종교 개혁이라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건입니다.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 된 대표적 사례입니다.

사무엘이 태어날 당시 이스라엘은 사사시대 말기였습니다. 그 당시의 신앙상태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이 어떠하였느냐 하는 것을 사사기에 한마디로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각기 자기 좋을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좋을 대로 행하는 것이 신앙의 타락 현상입니다.
바로 이런 칠흑 같은 현실에서 새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준비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이루시기 원하실 때 반드시 사람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그가 바로 사무엘입니다.

아이 사무엘이 아직 어려서 사역에 나서기 전 이스라엘의 종교상태는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그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 엘리의 아들들을 통하여 표출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엘리의 아들들과 사무엘을 극적으로 대조시켜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아 살아져야할 집단과 하나님께 인정받아 쓰임 받아야 할 사람을 마치 빛과 어둠같이 대조시켜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쪽이 인간의 종말이라고 하면 다른 한쪽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새 시대를 열어나가십니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 죄인들에 대하여는 엄위 하십니다. 회개하는 사람을 무한히 용서해 주시나 끝까지 강팍한 사람들에게 대하여서는 무섭도록 엄위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같이 혼란한 우리 현실에서 새 시대를 열어나가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 사무엘처럼 쓰임 받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그러면 엘리 가정의 죄가 무엇입니까? 27절에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전해진 엘리의 죄라고 하는 거울에 우리 모습을 비추어봅시다.

(1) 엘리 가정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30절에 "나를 경멸히 여긴다"고 하는 말씀은 이미 그들 마음에도 생활에도 하나님이 계실 자리가 없어진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부재(不在)!"-이런 개인이나 이런 사회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속시대를 어떤 신학자는 바로 다름 아닌 "하나님 부재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말할 것도 없이 이미 하나님을 그들의 삶에서 추방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믿는 우리는 어떠합니까? 오늘 한국 교회는 과연 그 가운데 하나님을 모시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모신 교회들이 그렇게 시끄러울 수가 있겠습니까? 소위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서 온갖 부정과 부패에 앞선 사람들이 과연 그들 마음과 생활에 하나님을 모시고 삽니까?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면 하나님께 경멸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그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부디 하나님을 가장 존중히 여기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엘리 가정의 죄는 예배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29절에 "내 제물과 예물을 밟았다"고 했습니다. 삼상 1장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께 제사드릴 제물을 제대로 익기도 전에 갈고리로 찔러 그 가운데 좋은 것으로 자기들 배를 채우고 살을 찌웠습니다. 원래 제물이라는 것은 이미 하나님 것입니다. 그런데 저 아들들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취했습니다. 하나님은 온데 간데 없고 오직 있는 것이라고는 자기 자신 뿐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였습니다".

오늘 교회는 어떠합니까?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합니까? 과연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반대로 하나님마저도 오로지 나를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아닙니까?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이 모든 일에 성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예배를 제대로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도 존중히 여겨 주십니다.

(3) 엘리 가문의 죄 가운데 또 한가지는 진리부재의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2에 "엘리의 아들들은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말씀도 알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과 그 진리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인생과 신앙의 반석을 버렸으니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무너지되  그 무너짐이 심하다"고 했습니다.

원래 제사에 있어서 제사장에게 돌아가는 몫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편 뒷다리와 흔든 가슴부분입니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진리에 대한 지식이 없으므로 앞다리 뒷다리 따질 것 없이 자기 좋은 것을 골라 먹어버렸습니다.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가 아니라 "나 좋을 대로" 행한다면 그것이 바로 진리 부재요 진리 무시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좋을 대로 행하는 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는 죄악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했습니다.

(4) 엘리 가정의 죄는 신앙교육 부재의 죄입니다. 29절에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엘리는 부모로서 당연히 자기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잘 해야 했습니다. 또 엘리는 제사장으로서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제사장의 자녀답게 살도록 교육을 철저하게 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하나님보다 자기 아들이 먼저였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교육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자기들 좋을 대로 살도록 방치했습니다.

부모 여러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신앙 교육을 등한히 하고 자녀들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둔다면, 또는 불신자들이 좋아하는 대로 따라하면서 신앙 교육을 하지 않는다면 그 마지막이 어떠할 것인가를 엘리 가정을 보시고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자녀들을 단지 육체적으로 양육만 하라고 맡긴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세상 교육이나 잘 시키라고 맡긴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보다 앞서서 신앙 교육 제대로 시키라고 믿는 여러분에게 자녀들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신앙 교육을 제대로 시키는 그것이 곧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일입니다.

3. 그러면 본분과 사명을 망각한 엘리 가정에 대하여 하나님이 내리신 벌이 무엇입니까?

(1) 대가 끊어지게 됩니다. 31절에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과연 엘리 일가족은 하루에 다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기 때문에 화를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시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 같아서 때를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음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겨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불에 태워버린다"고 했습니다. 열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 풍성한 열매는 바로 대를 잘 이어가며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10계명에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푼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열매가 어떠합니까? 엘리 일가족에 자기들에게 주신 직임을 잘 감당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은 그 은총을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그가 사무엘입니다. 이스라엘 선민이 사명을 다 감당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은 새 이스라엘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 가문에 주신 복을 빼앗기지 않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소망이 없게 되었습니다. 단테의 신곡에는 지옥문에 쓰여진 글을 소개해 줍니다. 여러분은 저 지옥문에는 무슨 글귀가 기록되어 있으리라고 생각되어집니까? "이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일체의 희망을 버릴지어다". 지옥은 소망이 없는 곳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나라 형편이 매우 어렵지 않습니까? 그러나 정말 어렵다는 것은 물량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우리들의 장래가 암담하다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확실한 소망만 있다면 오늘의 어려움이야 얼마든지 견뎌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그것이 우리의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소망이 어디에서 옵니까? 성경에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구한 말, 그리고 일제 때의 그 어려운 시절에도 당시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와 소망의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 어둠을 극복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복음을 외면합니다. 교회마저도 소망의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선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불행입니다.

엘리의 가정에는 어디를 둘러보아도 소망이라고는 없었습니다. 그 가정에 선언된 하나님의 말씀은 절망,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멸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소망이 살아졌습니다. 그리고 단테는 그것이 바로 지옥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사람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엘리 가정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것은 그 가정의 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끝에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그가 사무엘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제 일로 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일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존중히 여겨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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