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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주일] 우러러 보시는 예수님!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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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장빈 목사

오늘의 주인공 이름은 <삭개오>입니다. 그는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합니다. 그랬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리들의 장이니 사회적으로도 출세한 사람이요, 또한 부자니 백성들 가운데서도 상당한 재력가였던 셈입니다. 해서 로마의 총독마저도, 유대 땅에서는 세리들의 장을 무시하지 못했습니다. 저들의 도움 없이는 당장 세금 징수부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로마 총독을 위시한 권력자들은 세리장과 가까이 지내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삭개오, 그는 로마의 권력자들과 매우 가까운 그 당시 실세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인생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데 있었습니다. 부족한 것도 없고, 남부러울 것도 없는 인생 같은데, 어인 일인지 그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못난 유대인 동포들이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는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였습니다. 내 안의 내가 나를 가리켜 자꾸만 죄인이라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너는 왜 동포를 배신하느냐고 질책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랬습니다. 그에겐 남모르는 고통과 번민이 있었습니다. 이 죄책감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자연히 그는 나 아닌 누군가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마침 유대인들 모두가 기다리는 분이 계셨습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셨지요. 해서 삭개오도 메시야 그 분이 내 인생에 개입해 오시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놀라운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라는 분이 오셨는데, 그분이 곧 그리스도이시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분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어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의 제자 가운데 세리 출신도 있다 했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날부터, 삭개오는 예수님을 사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던 동기는 죄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함이었습니다.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해서 만나려던 것 아니었습니다.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해서 만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지금보다 더 잘 살기 위해서 만나러 가겠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내 마음 속에 꽉 들어찬 이 죄의식, 곧 무엇으로도 해결할 길 없는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광 가족 여러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신 여러분께 질문 하나 드리고 갑니다.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2004년 한 해, 행복하셨습니까? 이 시간, 내 마음속을 한번 찬찬히 들여다보시지요. 혹 행복한 척 위장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혹 오늘의 주인공 삭개오처럼, 겉보기엔 멀쩡한데 속으론 아무런 행복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삶은 아니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어서 예수님을 깊이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 어서 죄 사함의 은총을 받아 누리시며, 해서 세상은 줄 수 없는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추수감사주일에 나누는 넉넉한 인사!

<주 안에서 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요? 마침 예수님이 자기 동네를 지나신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가슴이 뛰고 마음이 설레기 시작합니다.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을 만날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무어라 말씀드릴까 상상에 상상을 거듭합니다. 하지만 꿈과 현실 사이엔 엄청난 괴리가 있었습니다. 정작 예수님을 뵈러 나간 그는 키가 너무 작았습니다. 게다가 예수님 주변엔 무슨 사람이 그리도 많은지, 도무지 예수님의 얼굴조차 뵙기 어려웠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수도 없는 일, 해서 그는 예수님이 가시는 방향으로 미리 달려가, 어느 뽕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거기서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라도 바라볼 요량이었습니다. 체면도 자존심도 예수님을 뵙고 싶다는 그의 마음을 꺾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자, 드디어 예수님 일행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큰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저 멀리 그냥 지나치실 줄 알았던 예수님이 자기가 올라있는 뽕나무 아래로 걸어오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삭개오를 우러러 보시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5절을 보실까요?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우리의 상식과 통념이 깨지는 순간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우러러보아야지요, 예수님이 삭개오를 우러러보시다니요. 그러나 분명 주님은 삭개오를 우러러 쳐다보아 주셨습니다.

그 순간, 삭개오의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습니다. 무어라 인사라도 여쭈어야 할 터인데, 아니 어서 뽕나무에서 내려서서 주님 앞에 넙죽 엎드려 절이라도 올려야 할 터인데, 어인 일인지 도무지 내 몸인데도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습니다. 그렇게 바짝 긴장한 채 삭개오는 나무 위에서 나무 아래에 서계신 주님만을 내려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순간이 삭개오에겐 너무나 소중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예수님이 자기를 보아주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 나만을 지목하여 우러러보아 주시며, 나에게만 집중해 주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눈과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예수님과 삭개오의 마음이 통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말도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눈만 보고도 예수님은 삭개오의 모든 것을 알아주셨던 것입니다. 눈으로 그의 마음을 모두 읽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짜 마음이 통하는 사이엔 그렇게 많은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눈만 보아도 그의 마음을 다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 내 눈만 보셔도 내 마음을 다 아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눈만 보여 드려도 우리 주님 내 마음까지 다 헤아려 주십니다.

문제는 이렇게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일, 먼저 눈과 눈이 마주쳐야 한다는 점입니다. 서로가 눈과 눈을 마주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어인 일인지 우린 함께 살면서도 눈과 눈을 마주볼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한 가족이면서 눈과 눈을 우러러보며 그 마음까지 읽어드릴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통하질 않지요, 통하지 않으니 답답하지요, 답답하니 사고치지요, 그러니 행복이 깨지고 마는 거지요.

왜 그런가? 가장 중요한 원인은 눈과 눈을 마주볼 겨를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서로 우러러볼 수 있기 위해선, 서로가 서로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바쁘다는 핑계로 그 짧은 시간조차 내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심지어 어찌나 바쁜 척 하는지, 우리 주님이 내 눈 한번 찬찬히 들여다보실 짬도 내어 드리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주님 아닌 대상만을 열심히 바라보며 삽니다. 그러니 주님과도 통하지 않고, 주님이 사랑하시는 당신과도 통하지 않고, 통하지 않으니 행복하지도 않고, 그렇게 악순환만 계속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한 말씀드리고 갑니다. 하루에 한번씩 사랑하는 이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부모님 여러분, 하루에 한번씩 자녀의 눈 속을 찬찬히 들여다 봐 주시기 바랍니다. 놀랍게도 마음까지 보일 것입니다. 긴 시간이 필요한 것 아닙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어쩌면 찰나의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눈과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의 시간이 하루의 행복을 보장해 줄 것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간곡하게 부탁드리기는, 하루에 한번 이상, 내 눈을 주님께 보여드리시기 바랍니다. 뽕나무까지 올라갔던 삭개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모하시며, 주님이 내 눈을 들여다보시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시선으로, 오직 주님만 집중하여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내 눈과 주님의 눈이 마주치는 그 짧은 시간이 내 인생의 행복을 보장해 줄 것입니다. 여기서 연습한번 할까요? 옆의 분의 눈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인사하십니다.

<주 안에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런데요,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저 황홀한 채, 그냥 거기 뽕나무 위에 계속 앉아 있습니다. 해서 예수님이 한 말씀 하십니다. 역시 5절인데요,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그 순간 삭개오는 다시 한번 놀랍니다. <아니, 예수님이 내 이름을 불러주시다니,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어서 내려서야지, 와아, 이 바보야 얼른 내려가, 아니, 내 이름을 알고 계셨다니, 아니야, 바보야, 어서 내려가, 어? 어떻게 나를 알고 계시지? 바보, 어?>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쩔쩔 매는 삭개오, 주님 앞에 서니 영락없이 어린아이 같습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는 더욱 결정적인 말씀을 듣습니다. 그의 인생이 완전히 거듭나는 순간입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할렐루야! 아멘! 여러분, 이 음성 듣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서 속히 내려오라 하신 예수님께서, 거두절미하고 주신 한 말씀, 오늘 내 집에 오신다는 겁니다. 내 집에서 하루를 묵어가신다는 겁니다. 이 죄인의 집에서 말입니다. 세리장의 집에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한 마디로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한 마디로 삭개오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거리에서 지나쳐도 인사조차 나누지 않는 것은 기본이요, 심지어 거지들조차도 세리의 돈은 받지 않고 내던졌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니 돈은 많은데 전혀 행복하질 못했던 것이지요. 그런 세리장의 집에 우리 주님이 오신다니, 그것 자체로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요,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집에 오신다니...

예화 / 어제 우리 교회에서 그리 멀지 않은 모 호텔에서 어느 유명 배우의 사진전이 열렸다고 합니다. 그는 최근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배우인데요, 일본어로 <욘사마>라 부른다지요. 우리 식 이름은 배용준, 네 배용준 선생이 그 주인공인데요, 그런데, 그가 이 사진전에 모습을 보인다는 소문이 나자 일본에서 그를 사랑하는 팬들이 대거 입국했다고 하지요, 비행기 표가 매진되고 호텔이 만원사례를 이루는 등, 가히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고 하는데요, 감사한 것은, 그가 최근에 혼자 일본에서 벌어드린 돈이 수억 원대에 이른다고 하니, 가히 걸어 다니는 중소기업이라고나 할까요? 대한민국의 대표 브랜드라고 할까요? 어쨌든 문화의 힘을 느끼게 해 주는 사례임에는 틀림없다 하겠습니다.

그런데요, 재미있는 또 하나의 현상은 일본 내 팬클럽 회원들이 욘사마의 이름으로 엄청난 일들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일본에서 발생한 대규모 지진 때도 가장 먼저 구제의 손길을 내민 단체가 욘사마 배용준 선생의 팬클럽이었다고 하고요, 그런가 하면 배용준 선생이 출연하는 드라마의 촬영지인 한국의 모 도시에 일본 팬클럽 회원들이 대거 입국하여, 그 도시의 거리거리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갔다고도 합니다.

더욱 재미있는 현상의 하나는 이런 인기 배우가 들러 간 음식점이나 촬영 장소, 혹은 특정한 장소 역시 각광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왜?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그 분이 다녀가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그 분이 다녀가신 그 곳이 명소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정말 그렇습니다. 내 집에 누가 다녀가시느냐에 따라 내 집의 위상과 격이 달라지는 것 맞습니다. 만약 왕이나 대통령이 우리 집에 한번 다녀가셨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날 이후 우리 집은 동네 최고의 명소가 될 것입니다. 이전의 집과 완전히 다른 집이 되는 것이지요.

정말 그렇습니다. 누구를 내 집에 모시느냐에 따라 내 집의 모든 것이 달라지는 법, 정말 감사한 것은, 예수님이 다녀가신 집에 주어지는 축복은 엄청나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확인할까요? / 19:9 / (읽기) / 두 가지 축복이군요. 첫째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둘째는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할렐루야! 이젠 삭개오도 우리와 한 형제자매라는 겁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한 자손이라는 겁니다. 하여 이 집에 오늘 구원이 임하였다는 겁니다. 여러분, 구원의 기본 단위는 집이요 가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이번 감사절기에 집집마다 예수님 모시고 이 축복의 말씀 다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러면 눈과 눈이 마주친 첫 만남에서부터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는 축복의 말씀을 듣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삭개오가 했던 일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나도 그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건지, 말씀을 통해 두 가지로 정리하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였다.

19:6 / (읽기) / 그렇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면 즉시 뽕나무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뽕나무 위에 앉아 있어서는 더 이상 구원의 역사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급히 내려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 있으니, 즐거워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즐겁게 내려서라는 겁니다. 겁먹지도 말 것이며, 부담스러워하지도 말 것이며, 오직 즐겁게 내려서라는 겁니다.

삭개오가 그랬습니다. 그는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왜? 오늘 주님이 우리 집에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집에서 하루를 묵어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랬습니다. 주님이 내 집에 오신다는 그 한 마디 말씀이 삭개오를 즐겁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전의 모든 염려와 불안과 죄책감이 그 말씀 한 마디에 다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해서 그는 즐거워하며 급히 내려와 주님을 영접합니다.

거기 영접이란 단어가 있군요, 한자로 써 보실까요? 영접(迎接)이란 단어, 맞이할 영자에 사귈 접자를 쓰지요. 영접이란 당신을 맞아 들여 깊이 사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영접하기 위해선 먼저 내 마음의 문과 내 집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문을 열지 않고선 영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주님 영접하기를 거부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혹 영접하긴 해도 마지못해 영접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문을 열어도 억지로 열고, 대접을 해도 억지로 하는 경우이지요. 마음의 문이 제대로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런 정도의 영접으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집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해야 하는 첫 번째 일, 그것은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즐겁게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더욱 즐겁게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욘사마>의 이름으로도 저토록 즐거워하며 영접하며 살거늘,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우리는 그보다는 더 즐겁게 살고, 그보다는 더 넉넉하게 영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입니다. 즐겁게 영접하는 가정이 잘 되는 가정입니다. 인사하며 다짐하기!

<즐겁게 영접하여 날마다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2. 소유의 절반을 내어주고, 토색한 것은 사배나 갚았다.

19:8 / (읽기) / 거기 중간에 <주겠사오며>라는 단어와 <갚겠나이다>라는 단어에 표시하시지요.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리요 죄인이었던 삭개오가 마음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더니, 입을 열어 먼저 고백하는 말, <주여 보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나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세리장이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다니,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정말 가능한 일인가?

네, 가능한 일입니다. 일단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면 예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주님이 나를 우러러보아 주실 때부터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가난한 자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통하고 나자, 내가 주님이 원하시는 그 일을 도와 드리고 싶어졌습니다. <그래, 내가 주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나에게 이토록 큰 즐거움을 주신 분, 내 주님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까?> <그렇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지, 그럼 내가 돈을 좀 내 놓자!>

사랑하는 여러분, 자본주의 사회에선 내 소유의 절반을 구제 헌금으로 내어놓는 사람을 바보, 천치, 얼간이라 부를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도 남음이 있는 인생이 복 받은 인생 아닙니까? 다 가지고도 불행할 바엔, 절반을 나누어 주고 행복한 쪽이 더 낫지 않습니까? 여러분, 내 재산의 절반으로 구제하고도 여전히 넉넉한 부자가 진짜 부자인줄로 믿습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을 가리켜 <거부>라 부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안에서 모두 거부되시기 바랍니다. 절반을 뚝 떼어 구제하고도 여전히 부자인 진짜 거부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믿음의 거부가 되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깨끗한 부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소망 담아 덕담을 나누십니다. 감사절에 나누는 덕담!

<주 안에서 거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삭개오 마음에 걱정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동안 알아도 모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넘어온 일이지만,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니, 그런 채로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백성들의 것을 토색한 것은 없을까? 나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은 없을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토색이란 단어, 내 힘을 가지고 억지로 빼앗는 경우를 가리키는데요, 해서 삭개오가 다시 주님께 고합니다. <주님,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존경하는 여러분, 갚아야 할 것을 갚을 수 있는 인생이 복 받은 인생인 줄로 믿습니다. 갚아야 할 것을 제 때 갚지 못하는 인생, 빚만 가득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긴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이 감사절에 갚을 것은 갚으시기 바랍니다. 우선 하나님께 갚아드려야 할 것들, 이 해가 가기 전에 다 갚아드리시기 바랍니다. 내가 금년을 시작하며 서원했던 것들, 그리고 금년 한해를 살면서 받아 누렸던 모든 은혜들, 해서 먼저 내 아버지 하나님께 서원과 은혜를 갚아 드리시기 바랍니다.

또한 금년 한 해 살면서 내가 누군가의 것을 토색한 것이 있거든, 그것 역시 꼭 갚으시기 바랍니다. 물질 만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마음의 빚도 갚으셔야 합니다. 본의 아니게 라도 상처를 준 일이 생각나거든, 그것까지 다 갚아야 합니다. 왜? 갚아야 할 것을 갚지 않은 인생, 절대로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말씀 마당을 닫겠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세리장 삭개오는 두 마디 고백을 하게 됩니다. 8절인데요, 서술어만 주목해 보실까요? <주겠사오며 갚겠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줄 수 있는 인생, 그리고 갚을 수 있는 인생이 행복한 인생인 줄 믿습니다. 넉넉하게 주는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절반을 주고도 여전히 부자이시기를 축원합니다. 또한 늘 갚아드리는 인생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늘 갚고 또 갚아도 고갈되지 않는 은혜로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삭개오와 예수님의 명대사, 명장면을 직접 확인하면서, 이 말씀, 우리에게 주시는 감사절 선물로 나누겠습니다. / 19:8-9 / (읽기) / 이 말씀 그대로 다 이루어지시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우리 주신 말씀 명상하면서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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