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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칼을 쳐서 보습으로 (사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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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곽주환 목사

달력이 있다. 태양에 맞춘 양력을 우리가 주로 사용한다. 그리고 달에 맞춘 달력이 있는데 음력이라고 한다. 양력으로는 오늘이 11월 28일이지만, 음력으로는 10월 17일이다. 교회에도 달력이 있다. 예수님의 태어나심과 부활을 중심 축으로 한 달력을 교회력이라고 부른다. 양력은 1월 1일에 새로운 해가 시작되고, 음력은 음력 정월 초하루에 시작되지만 교회력에 의하면 강림절, 혹은 대림절이라고 불리우는 강림절 첫 번째 주가 교회력의 새로운 출발이다. 강림절은 네 주를 지나는데 성탄절 전 4주를 지나고 12월 25일 성탄절을 맞이하게 된다.

강림절은 기다리는 절기이다. 성탄절을 기다릴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실 것을 기다리는 절기이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교회의 역할은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기억하고 두 번째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믿음의 공동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마굿간에 태어나신 첫 번째 크리스마스의 사건을 기억하고, 다시 이 땅에 오실 두 번째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신앙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초대교회에는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마라나타”를 고백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러면, 우리는 왜 그토록 주님을 기다리는가? 주님을 기다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다. 이 땅의 역사는 칼을 만들고 창을 만드는 전쟁의 역사이다. 사람을 죽이는 역사가 계속되어 왔다. 지금도 이러한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앞으로도 이러한 전쟁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어린이들이 무엇을 하며 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6세에서 20세까지 아이들 중 41퍼센트가 게임기를 갖고 있다. 60펴센트가 컴퓨터를 가지고 있으며 99펴센트가 집에 텔레비전이 있다. 8세에서 14세 어린이들의 87퍼센트가 비디오 게임을 하루에 평균 1.4시간 게임을 한다. 이들이 갖고 노는 게임에는 두 가지 슬로우건이 있다고 한다. “범세계적으로 살인하고, 내면의 야수성을 풀어 놓아라. 너는 대량 파괴를 수행하고 있다. 거리에서의 살인이 주요행동 방침이다.”
현대 문명이 만들어 놓은 게임기는 이렇게 전쟁의 역사가 계속되도록 훈련시키고 있다. 들은 데로 나오고, 보는 데로 나오고, 먹는 데로 나오게 되어 있다. 이렇게 길들여진 자녀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참으로 염려스럽다. 계속해서 이 땅의 역사는 칼을 만들고, 창을 만드는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 칼과 창은 곧 죽음의 도구이다. 사람을 죽이는 도구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칼과 창을 만드는 역사를 바꾸기 위하여 오셨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든다. 보습은 쟁기 같은 것으로 땅을 갈아서 흙은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낫은 기역자로 생긴 풀을 베는 농기구이다. 보습과 칼은 농사 짓기 위하여 사용되는 도구이다. 사람을 먹여 살리기 위한 도구가 바로 보습과 칼이다. 사람을 살리는 도구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되는 칼과 창을 녹여서 사람을 먹여 살리는 도구인 보습과 낫으로 바꾸신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통하여 이 땅에 먹고 살 길이 열렸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서 말씀을 전하셨다. 수 많은 무리들이 모여서 말씀을 듣는데 식사할 시간이 되었다. 예수님이 이 들에게 무엇을 먹여야할까? 생각하시면서 빌립에게 묻기를 어디서 떡을 사다가 먹일 수 없겠느냐? 그러자 빌립이 이백 데나리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질문한 이유는 그를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빌립은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답을 한다. 그 때에 안드레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갖고 온다. 이렇게 작은 것으로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나이까? 예수님은 그들을 앉히라 말씀하시고 기도하시자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자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다. 예수를 임금으로 세우면 우리는 먹는 문제가 해결이 된다. 우리는 얼마든지 강대국이 될 수 있다. 그 후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따라다닌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나를 따라다니는 이유는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너희는 썩어질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결코 배고프지 않는 생명의 떡을 먹으라.”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이 세상의 역사는 칼과 창을 만들어 빼앗아 먹는 것을 차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칼을 쳐서 보습으로, 창을 쳐서 낫으로 만들기 위하여 오셨다. 빼앗아 먹고 사는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의 떡으로 오셨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런데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칼을 갖고서 보습으로 변화시키시고, 창을 갖고서 낫으로 변화시키셨다. 여기에 귀한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주님이 이루시는 생명의 역사는 갑자기 새로운 것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으로 선용하셔서 하나님은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사람을 죽이는 칼이 생명을 살리는 보습으로 변화되고, 사람을 죽이는 창이 생명을 살리는 낫으로 변화시키신다.

요셉을 보라. 요셉이 형제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는다. 형들로부터 맞아 죽을 뻔 하였다. 웅덩이에 갇히게 되어 죽을 위기도 넘겼다. 그러다가 애굽에 팔려 간다. 그 때의 나이 열 일곱 살이다. 정말로 요셉은 파란 만장한 인생을 산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기 까지 한다. 그의 인생은 감옥에서 썩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버리지 아니하셨다. 요셉을 총리대신으로 세우신다. 요셉의 가족들이 모두 내려와 배고픔의 위기를 넘긴다. 결국 요셉이 형들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형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도다. 얼마나 위대한 고백인가? 형들은 요셉을 칼과 창으로 죽이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역사이다. 그러나 요셉이 애굽에 팔려와 총리대신이 되었기에 애굽의 백성을 살리게 되었다. 생명의 도구로 하나님이 세우셨다.

이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악조건도 선용하신다. 칼과 창과 같이 무서운 인생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나면, 주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우리의 인생은 생명을 살리는 보습과 낫처럼 사용된다. 얼마나 감사한가?

일본에 오히라 미쓰요는 청소년기 시절을 매우 문란하게 지냈다. 몸에는 문신이 가득하여 사람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사법고시에 합격을 하였다. 사법고시에 합격한 그녀에게 양부가 말했다고 한다. “문신을 지우는 게 어떠냐?” 변호사라는 직함의 사회적 입장을 생각해서 그렇게 권유했다. 그녀는 그때 고개를 가로 저었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일들을 전부 지워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시치미를 떼고 사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아요. 과거에 내가 저지른 일들은 그대로 평생 짐 지고 가야죠. 그걸 등에 진 내가 이 세상에 도움이 될 일은 없을까,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지우지 않고 있었어요.”

주님에게 붙잡히면 어떤 않 좋은 조건도 좋은 방향으로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악조건도 선용하신다. 조금 깨어져 금이 가고 오래되고 못 생긴 물 항아리 하나가 있었다. 그 항아리의 주인은 다른 온전한 것들과 함께 그 깨어진 항아리를 물을 길어오는데 사용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그 주인은 깨어진 물 항아리를 버리지 않고 온전한 물 항아리와 똑같이 아끼며 사용했다. 깨어진 물 항아리는 늘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내가 온전치 못하여 주인님에게 폐를 끼치는구나. 나로 인해 그 귀하게 귀한 물이 새어버리는데도 나를 아직도 버리지 않으시다니….' 어느 날, 너무 미안하다고 느낀 깨어진 물 항아리가 주인께 물었다. "주인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고 새로운 온전한 항아리를 구하지 않으시나요. 저는 별로 소용 가치가 없는 물건인데요." 주인은 그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물 항아리를 지고 계속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길을 지나면서 조용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얘야, 우리가 걸어온 길을 보아라." 그제야 물 항아리는 그들이 늘 물을 길어 집으로 걸어오던 길을 보았다. 길가에는 예쁜 꽃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듯 싱싱하게 피어 있었다. "주인님, 어떻게 이 산골 길가에 이렇게 예쁜 꽃들이 피어있을까요?" 주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메마른 산 길가에서 너의 깨어진 틈으로 새어나온 물을 먹고 자란 꽃들이란다."

내 자신을 볼 때에 실패해서 깨어진 것 같고, 몸이 약해서 부숴진 것 같고, 많은 허물이 있어서 보잘것 없어 보이지만 주님은 우리를 선용하신다. 나의 깨어진 틈을 이용하여 길가에 꽃이 피게 하신다. 나의 부족함은 주님은 선용하신다. 생명을 살리는 도구로 사용하신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대학과 교회의 큰 차이가 있다. 대학에는 수능 시험을 잘 봐서 실력이 비슷한 학생들이 모이게 되어 있다. 회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교회는 다르다. 교회에 들어올 때에 어떤 시험도 없다. 어떤 자격 조건도 없다.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려져 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조건도 선용하시기 때문이다.

구약의 율법을 보라. 제물로 바칠 수 없는 것이 있었고, 먹지 못할 음식이 있었다. 율법에 의하면 분명히 등급이 매겨져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불량품 사절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어떤 불량품도 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칼을 쳐서 보습으로, 창을 쳐서 낫으로 만드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어떤 악조건도 선용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우리 교회는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 선용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고쳐야할 점이 있다. 새로운 성도들, 새로운 회원, 새로운 믿음의 식구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하자. 새로운 얼굴들이 편안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서로 돕자. 하나님은 어떤 면으로 우리를 선용하신다. 이렇고 저렇고 뒤에서 말하면서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주지 말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서로 돕자.

우리 교회는 내년부터 베다니 교회로 이름이 바뀐다. 여러모로 업그레이드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먼저 우리 스스로가 새로운 얼굴이 적응하는데 어렵지 않도록 잘 도와 줘야 한다. 속회에서 기관에서 각 사역팀에서 따뜻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돕자.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협력하자.

주님은 허물 많고 쓸데없는 나를 세우신다. 주님은 어떤 악조건도 선용하신다. 칼을 쳐서 보습으로, 창을 쳐서 낫으로 바꾸신다. 얼마나 감사한가? 내가 처한 악조건 때문에 절망하지 말고, 내가 주님의 손에 붙잡히면 지금의 악조건을 선용하시리라는 확신을 갖고 어떤 고통도 극복하는 믿음의 대장부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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