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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세에 성도들이 힘써야 할 일 (벧전 4:7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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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양인 목사 (목양제일교회)

2004년도를 시작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흘러 금년도 한 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세월이 날아간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실감이 납니다. 한 해를 무슨 일을 하면서  보냈는지, 마지막 한 달을 남겨둔 시점에서 침착하게 점검해 봄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 달 남은 기간을 선용해서 유종의 미를 거두었으면 합니다.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다니엘의 예언이 성취된 시대라는 점에서 역사상 매우 특별한 때입니다. 다니엘서 12장 4절에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고 했는데, 이 예언이 오늘 우리 시대에 성취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역사상 오늘날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고 지식이 발달한 시대가 언제 있었습니까? 우리는 현 문명을 즐기는 차원에 머물 것이 아니라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간파해야 합니다. 오늘 저는 “말세에 성도들이 힘써야 할 일”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함으로 피차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이 시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도는 말씀하기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란 곧 역사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그 때가 가까웠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 시대의 성격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인류가 대홍수로 멸망당했던 그 때와 지금을 비교해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홍수 심판이 가까워오는 것도 모르고 세상 재미에 푹 빠져서 살았습니다. 홍수에 대비해서 거대한 방주를 짓는 노아를 보고 비웃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역사의 마지막 때에도 노아의 때와 비슷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7)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

노아 당시의 사람들이 몰두한 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네 가지는 현대인들의 최대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을 죄악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이 같은 것에만 몰두하는 것이 죄악입니다. 그들은 다가올 심판의 경고를 무시하고 안일과 번영을 즐겼습니다. 얼마나 안일에 빠졌었든지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무서운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도 노아의 때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물질적인 번영에 도취되어 자기들의 영혼에 관해서 무관심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 눈에 보이지도 아니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고 반문합니다. 저들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미련한 자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인들의 삶을 보면서 노아 시대의 사람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소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멸망이 코앞에 이른 줄도 모르고 여전히 극한 방탕에 밤을 지새웠습니다. 대홍수의 심판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만 구원받았듯이, 소돔의 멸망 가운데서는 롯의 가족만 구원받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던 자들만 멸망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사정은 말세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만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지금이 말세라는 사실을 여러 가지로 일깨워 줍니다. 우선, 사람들의 정신적인 타락상을 들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죄를 짓더라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동성연애를 죄로 규정하는데, 요즘은 자신이 그런 사실을 밝히면 소수자의 인권을 위해 공헌한 용기 있는 인물로 대접받습니다. 동성연애자들이 거리에서 시위를 하기도 합니다.

성매매 금지법을 공표하자 여기저기서 반발이 심합니다. 심지어는 생존권을 짓밟지 말라고 데모합니다. 성매매를 위한 국민의 자유를 박탈하지 말라고 항의하는 국회의원도 있습니다. 다들 제 정신이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자유를 존중한다고 말하지만, 그 누구도 우리 사회에서 성행하는 사업 중 하나가 인신 매매업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뿐 입니까? 생명의 존엄성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한 해 동안 우리나라에서 낙태 당하는 태아의 수가 150만에서 200만이나 된다고 합니다. 더구나 미혼모에게서 태어났거나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버림받는 아이들의 수가 한 해에 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현실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갈수록 더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세에 사람들의 실상을 이같이 예언했습니다.

“1)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2)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

여기 언급한 악덕 가운데 현대인들에게 낯 설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같은 악덕을  예사롭게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지금이 마지막 때라는 증거입니다.

신앙의 세계에도 말세의 징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세상에 마음 빼앗겨서 믿음생활을 등한히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5절에 나오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는 불신자들을 말함이 아니라 신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들입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하신 주님의 말씀과 같이, 요즘은 철저하게 신본주의로 살아가는 신자들이 점점 줄고 있습니다. 그 대신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는 신자들이 늘어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런 것이 마지막 때의 징조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4)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11)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마 24:)라고 하셨는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거짓 선지자들과 적그리스도들이 나와서 활동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기독교계가 매우 혼잡합니다.

사이비와 이단들이 우후죽순처럼 나와서 복음의 진리를 혼잡케 하며 신자들을 미혹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 자들을 추종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말세의 징조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빈발하는 것도 말세의 징조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7)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우리는 방안에 앉아서도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말세의 징조를 파악하기 용이한 것은 성도들에게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사건 소식들을 대할 때마다 무심코 넘길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에 비추어 봄으로써 이 시대를 올바로 분별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지금이 마지막 때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그 다음 할 일은 자명합니다. 먼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비가 연일 내려서 강물이 불어나는 것을 보았으면 둑이 무너지기 전에 피난 갈 준비를 해야지, 저러다가 괜찮겠지 하고 방심하면 낭패를 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8)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29)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2)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막 13장)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개나리가 피고 진달래가 피면 봄이 되었음을 알고, 신록이 짙어지면 여름에 접어든 것을 압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시대의 징조들을 보거든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알고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군대에 가면 밤낮으로 보초를 세웁니다. 밤중에 다들 잠자도 보초는 정신을 차리고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살펴야 합니다. 만일 보초가 졸고 자다가 적군이 침투하는 날이면 큰불상사가 날 것입니다. 세상 재미에 빠져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무 준비 없이 잠자는 자들과 같습니다. 밤에 도적같이 주님께서 갑작스레 강림하실 때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데살로니가전서 5장 3절에는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깨어 정신을 차리고 있는 자들에게는 어느 시에 주님께서 강림하실지라도 갑작스레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42)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43)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깨어 있는 성도들은 근신해야 합니다. 근신한다 함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대는 광고와 선전의 시대입니다. 상품 가격에서 광고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점차 높아갑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어느 것 하나 광고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광고는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겨서 광고하는 상품을 사게끔 만드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현대의 사조는 자기의 욕망을 억누르지 말고 마음껏 발산하라고 말합니다. 예의범절을 지킬 것 무어 있느냐, 그저 하고픈 대로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행하는 것을 옳다고 말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씀에 뿌리박지 못한 사람들은 신앙과 세상 풍조 사이에서 방황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신자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깨어서 근신합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면 매사에 삼가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자신을 지키지 못하면 이 세상 사조에 동조하고 탁류에 흘러 떠내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고 했습니다.

술 취한 사람은 밤낮의 구별이 없습니다. 대낮에도 술에 취하면 캄캄한 밤중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등한히 하고 세상일에 몰두하는 것은 비유컨대 술에 취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 신자는 세상에 취해서 지금이 어느 때인지 곧 주님의 강림이 임박한 때인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혹시라도 무엇에 취한 상태에 있지는 아니한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멀리하도록 만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같은 것들에 미련을 두지 말고 단호하게 내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할 뿐 아니라 기도해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졸며 자다가 주님을 버리고 도망치는 패배를 당했습니다. 그 누구도 기도하지 않으면서 시험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기도는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표시입니다. 또한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받게 되어 영적 분별력을 갖게 됩니다.

반면에 기도하지 않는 것은 영적으로 잠잔다는 표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긴 상태를 말합니다. 영적 생명력이 공급되지 않으므로 자연히 그 심령이 곤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기도하고픈 소원을 주실 때 지체 말고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바쁜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마지막 때가 가까움을 볼수록 주님을 섬기는 데 더욱 힘쓰십시오. 힘쓰고 애쓰지 않는데 저절로 믿음을 지켜나갈 수는 없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다고 해서 값싼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는 희생을 하셨습니다. 도저히 지불할 수 없는 비싼 값을 치른 구원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선물로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무한히 값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생명을 버려 이루신 구원을 하찮게 여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열심히 사랑해야 합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움을 볼수록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열심히 믿음으로 살라고 하면 쉽게 이해할 것 같은데,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니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나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에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이처럼 사랑이 없이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많은 재물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한번은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했습니다. 이에 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소문난 한 여자가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이 이 광경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는 마음에 이르기를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생각을 하시고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고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시몬이 대답하기를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기를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여자에게 이르시기를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눅 7:).

우리 마음에 주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거짓 믿음에 불과합니다. 날 위해 생명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없이 다만 구원 얻기 위한 방편으로 믿는다면 그런 믿음은 결코 그 사람을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귀신들의 믿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귀신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믿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는커녕 대적합니다.

참된 믿음은 주님께 대한 사랑을 수반합니다. 비록 우리가 부족하고 허물이 많지만 그래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고백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을 기쁘게 받아주심을 아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지난날의 실수로 인해 의기소침해 있는 베드로에게 “네가 여전히 나를 믿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가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지난날의 실수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깨끗하게 치유되었으며, “내 양을 치라”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표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지만 이웃은 사랑하지 않겠다는 말은 성립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손등과 손바닥의 관계와 같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형제의 허물이 허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위대함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1)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사랑의 동기로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섬김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큰집과 같아서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할 일은 상전처럼 대접받는 일이 아니라 종처럼 섬기는 일입니다. 그야말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봉사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런 봉사를 좋아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주님의 섬김의 자세를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는데 우리가 어찌 교만한 마음을 품고 형제들의 발을 씻겨주지 못하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주님을 믿는 우리가 섬김의 삶을 힘쓰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해야 합니다.

집에서 보면 어머니가 아이들을 대접합니다. 또는 언니가 동생들을 대접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숙한 성도들이 어린 성도들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어린 성도들도 점점 성숙해서 봉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봉사의 자리에 설 때 믿음이 자라납니다. 봉사할 때 하나님께서 필요한 은사와 감당할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봉사하는 사람이 봉사를 받는 사람보다 기쁜 법입니다. 기쁨은 봉사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봉사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상급을 주십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2)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봉사할 때, 우리의 봉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만일 봉사하고 내가 칭찬을 다 받으면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급이 없을 것입니다. 나는 감추어지고 오직 하나님만이 드러나도록 봉사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봉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것이요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여러분의 발걸음을 교회로 향하게 하셔서 “말세에 성도들이 힘써야 할 일”에 대하여 듣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계시록에 보면, 일곱 교회에 보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가 나옵니다. 일곱 개의 편지는 하나같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구절로 끝맺습니다. 이 시간 이 설교를 성령이 우리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은 곧 교회의 지체인 성도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들은 바 말씀을 마음에 새기셔서 이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시고,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하시며, 사랑으로 행하심으로 언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더라도 기쁨으로 맞이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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