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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둠 속의 빛 (창 1:1-5, 고후 4: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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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정호 목사 (영암교회)

기독교는 빛의 종교입니다. 세상에 있는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첫 장,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첫 말씀이 “빛이 있으라” 였습니다. 혼돈과 공허, 흑암이 가득한 세상에 밝은 빛, 온 누리를 비취는 환한 빛을 창조하심으로 창조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두운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영광의 빛을 비췸으로 구속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고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삶의 질서를 회복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삶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사는 목적을 되찾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삶을 드리기만 하면 그의 영광스런 빛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빛의 종교요 빛은 기독교의 성격을 잘 드러내 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의 탄생이나 주님의 사역을 빛으로 묘사하곤 합니다. 아기 예수를 팔에 안은 경건한 노인 시므온은 다음과 같이 찬송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눅 2:29- 32).

이사야는 주님의 사역을 어두움에 비취는 빛으로 예언했습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 4:15-16). 그리고 더 나아가 주님 자신도 우리 생각보다 자주 빛이나 등불을 설교의 소재로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하나님은 빛의 근원

인간은 지극히 나약한 존재이지만 한 사람의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스며들면 보석처럼 영롱한 인생으로 변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셔서, 빛을 낮이라고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 3절에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데 이 첫째 날의 빛은 넷째 날에 창조된 해와 달과 별에 의한 빛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혼돈과 공허한 상태에 빛을 부여하십니다. 넷째 날의 빛은 자연의 빛이지만, 첫째 날의 빛은 하나님의 본성, 생명, 사랑, 질서, 등의 보다 근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후에 이 세상을 거두실 때, 하나님은 해와 달과 별들의 빛을 먼저 거두십니다. 그러나 해가 필요 없는 빛은 천상에서 영원히 빛나게 됩니다. 이 빛의 역사는 매우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이 빛이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에덴  동산에서 죄를 짓고 떠난 인간은 이 빛의 영광을 잃고 말았습니다. 어둠과 혼돈과 공허가 다시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는 신약의 복음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데 특히 창세기 1장은 요한복음 1장과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1:4-5 "그(예수) 안에 생명이 있었나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오고 있는 것'으로서의 미래

오늘은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며, 그 오심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우리 삶을 정리하여 보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의 중요한 의미는 "빛이 있으라"고 저 태초의 어둠을 향해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빛을 비춰 주시는 신앙의 계절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대림절에 우리가 정말 기다리고 간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을 비추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는 진리의 빛을 비춰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셨던 그리스도 예수님의 얼굴에 문득 나타나 보이셨던 하나님의 영광, 세상 사람들이 눈으로는 볼래야 볼 수 없는 '고난 속에 있는 영광'을 볼 수 있는 눈을 한 번 더 열어 주시기를 간구하며 겸손히 기다리는 신앙의 계절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근대문명 이후로, 분명히 우리의 외부세계는 무척 밝아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둘러싼 주위의 빛들이 더 휘황찬란하게 밝아져 가는데도, 우리는 어쩐지 점점 속이 어두워져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피마자기름으로 등불을 밝히고 심지를 북돋우시면서 삯바느질 하시던 우리 할머니 시대, 석유기름 등잔이나 호롱불 아래서 공부하고 책을 읽던 가난한 시절의 사람들의 마음이 우리들 보다 더 어둡지 않았습니다. 밤이 되면 온 동네가 어두워졌어도 도리어 총총히 어둠을 뚫고 빛나는 저 우주공간 멀리를 내어다 보고 은하수 별들의 흐름을 보면서, 농부들은 밤의 논둑길을 걸어 다녔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비록 물질적으론 훨씬 현대인들보다 가난했을지라도 마음속을 비추는 '본래적 빛',‘이성의 빛', ‘양심의 빛', ‘영적인 빛’을 잃어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빛에는 여러 가지 차원의 다른 빛들이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신 후에 궁창을 비추는 발광체들 곧 우리가 말하는 물리적 빛을 지으시기 전에,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하고 빛을 맨 처음 지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빛은 해와 달과 별들이 우리 눈에서 다 꺼져 버린 뒤에도 남아 우리를 비취는 더 근원적인 빛인 것입니다.

우리 이 땅의 목숨이 다 끝나 죽음을 맞이할 때, 우리 앞에 홀연히 비춰 나오며 우리를 둘러싸는 빛이 있을 것인데 그 빛은 물리적 빛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저 다메섹 도상에서 본 빛도 그런 빛이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 얼굴이 해처럼 빛날 수 있었던 것도 그 빛 때문인 것입니다. 이 빛은 화폐가 지닌 물질구매력이 타면서 발산하는 그런 경제 에너지의 빛이 아닙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 후서 4: 6-10 말씀 속에서 이 빛, 이 엄청난 능력, 이 신비의 빛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빛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질그릇 속에 담겨져 있는 이 빛은,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당하는 역경, 환난, 그리고 박해 속에서 더욱 더 빛나는 빛이요, 체험되는 빛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석류껍질이 깨어지면서 진주처럼 빛나는 석류 속 알이 드러나 보이듯이 이 생명의 참 빛은 '고난과 환난' 속에서 지지 않고 우뚝 서서 도리어 하늘의 참 빛과 삶의 근원적이고 미래적 삶을 대망하는 모든 사람들의 눈에 보여 지는 빛입니다. 한줌의 진흙덩어리가 도공의 손에 들려 형태를 입은 후에 지피는 장작나무 불 속에서 수천도 열과 압력을 받은 후에라야 청자 백자로서 변화되는 이치와도 통하는 것입니다.

대림절이란, 우리들의 심령이 이 세상의 욕망과 탐심과 근심 염려에서 마음을 돌이켜 마음이 가난해져야 할 계절입니다. 우리가 만들어가고 형성해 가는 미래 못지않게 더 중요한 우리에게로 오고 있는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삶 속에 현존하는 생명의 신비 앞에 경외의 마음과 감사의 마음을 회복해야 할 계절입니다. 무엇보다도, 내 심령 속의 어두움을 쫓아내고 다시 한 번 더 주님이 밝혀 주시는 진리와 생명의 등불을 되찾아 불빛을 더 밝게 자기를 성찰하는 계절인 것입니다.

인디언 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해가 어둠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별이 해를 데리고 아주 컴컴한 굴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 굴에 해가 들어서자마자 어둠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역시 해에게 흑암을 보여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해가 있는 곳에 어둠은 없다

해가 있는 곳에 어둠은 전혀 없습니다. 해가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어둠은 물러가고 빛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해 자체에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그 햇빛이 가려지는 곳에 어둠이 깃들일 뿐입니다. 해가 지면 날이 어두워지고 밤이 오지만, 밤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일시적인 것입니다. 곧 또다시 아침이 오면 어둠은 물러가고 환한 낮이 되는 것입니다. 겨울에는 낮보다 밤이 더 길지만 그렇다고 어둠이 본질적인 것이고 빛이 부차적인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밤이 길어도 그것은 곧 낮에 의해서 물러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깜깜한 밤에도 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해는 반대편에서 계속 빛을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밤에 뜨는 달을 보면서 우리는 밤에도 해가 빛나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자연의 원리는 곧바로 영적인 원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5절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들어서 여러분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빛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요, 빛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것은 곧 이해가 됩니다. 따라서 그가 계신 곳에는 언제나 빛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 분이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에 빛이 충만하여 있는 것입니다. 다만 잠시 그 빛을 가리는 것들이 있어서 거기에 어둠이 깃들이지만, 그 어둠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가리는 것들이 치워지는 순간 곧 어둠은 물러가고 빛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어둠이 빛보다 우세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빛은 언제나 빛나고 있는 것이며, 결코 어둠은 영원할 수가 없습니다. 빛은 영원하지만 어둠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의 역사는 영원하지만 그것을 가리는 악의 어둠의 훼방은 일시적이며, 결국은 물러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을 우리의 세계관으로 삼을 때, 우리는 이 세계의 역사를 새롭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것을 우리의 인생관으로 삼을 때 우리 자신의 삶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빛이 없는 세상은 온갖 범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본래 빛으로 창조된 세상이기 때문에 빛을 받지 않으면 그 세상이 병들고 시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햇빛을 전혀 보지 못한 식물이 자라지 못하고 죽는 것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사람들도 햇빛을 오래 보지 못하면 우울증에 걸리게 됩니다. 겨울이 긴 캐나다 같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우울증에 많이 걸리게 되는 것이 바로 해가 짧기 때문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자주 햇볕에 벌거벗고 누워 햇볕을 쪼이는 것은 건강을 위해서입니다. 특히 북유럽의 경우 흐린 날이 많고 해가 짧기 때문에 개인 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썬팅을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병

육체적 건강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우리가 하나님의 빛을 받지 못하면 병들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오래 갈 때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랑 대신 미움으로 살게 되며, 감사와 기쁨 대신 짜증과 불평으로 가득 차게 되며, 화해와 관용과 용서 대신에 분쟁과 갈등으로 조용할 날이 없으며, 정의와 평화는 사라지고 불의와 부정부패가 판을 치며, 불평등과 착취와 억압이 일상화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빛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어둠 속에서는 빛의 열매인 선(善)과 의(義)와 진실(眞實)은 없고 악과 불의와 거짓만이 독버섯처럼 돋아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감사함과 기쁨과 사랑 대신 짜증과 불평과 원망으로 살아갈 때는 하나님의 빛이 필요한 때입니다. 서구 사람들이 위통을 벗고 햇볕을 쪼이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위선과 체면의 꺼풀들을 벗어 던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 그의 빛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면서 우리 속에 자리 잡았던 모든 어둠의 요소들을 몰아내실 것입니다.

상실감이 우울증의 출발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잃어져 가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재산, 명예, 건강, 젊음, 지위, 권세,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마음, 존경하는 마음 등. 그러나 진정 우리의 삶 속에서 빛을 잃지 않으면 우리가 살아갈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생명의 빛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어둠과 대결하시어 그 어둠의 세력들을 꺾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안에 우리가 거하게 되면, 우리 속에서 모든 어둠은 물러가고 빛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계절이 겨울이고 모든 나무들이 청청한 잎을 갖고 있지 못하지만, 봄이 오면 봄볕이 온 땅에 퍼지면서 겨우내 움츠렸던 생명들이 힘을 얻으면서 싹이 돋고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따뜻한 봄볕을 받는 모든 식물들은 생명의 활발한 역사를 시작하여 성장하며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봄볕을 받았는데도 싹도 나지 않고, 꽃도 피지 않는 나무는 죽었거나 병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사랑할 줄 모르며, 감사할 줄 모르며, 의롭게 행하지 못하며, 진실치 못하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햇빛이 비치면 반드시 거기에서 싹이 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으면 거기에 반드시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겨울도 은총의 계절이다

초가 자신을 태워 빛을 만드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시므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의 빛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이 빛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다 변화되어 새로운 삶을 이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새로운 생명을 얻은 우리에게는 어둠의 위협이나 시련이 문제가 아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긍정적인 요소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빛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밤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밤은 휴식의 시간이며, 재창조의 시간들이 되기에 밤이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어둠과 밤은 빛과 분리되었지만,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빛 안에 통합되어 부정적이고 악의 상징에서 긍정적이며 선한 것으로 그 이미지가 바뀐 것입니다.

겨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을 믿는 사람들에게 겨울은 오히려 휴식의 때이며, 새로운 창조를 위한 준비 기간이 되는 것입니다. 겨울이 혹독하게 추울수록 그 겨울이 지난봄에는 더욱 화사하게 꽃이 피게 마련입니다. 참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그 어둠과 밤, 그 겨울은 생명을 시들게 만드는 무섭고 혹독한 시련이며 독소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것을 지배하던 사탄이 물러감으로 이제는 더 이상 어둠은 두려움이 아니며, 겨울도 은총의 계절로 변화된 것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 사회가 경제 위기를 통하여 시련을 겪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볼 때 그것은 결코 부정적인 사실만은 아닙니다. 우리를 각성시키는 겨울의 계절이며, 자신의 무성하였던 잎을 떨구고 조용히 새로운 생명의 약동을 위하여 준비하는 추운 겨울이라고 생각하면, 이 겨울은 우리에게 오히려 유익한 것이며, 우리가 잘 참고 견디기만 한다면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빛의 열매를 맺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내어 주시므로 만들어 내신 빛으로 어두웠던 세상을 이제 환하게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어둠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며, 혼돈은 더 이상 무질서가 아니며,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위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비쳐진 그 찬란한 빛으로 말미암아, 어둠과 혼돈과 죽음은 모두가 생명의 빛 속으로 흡수되어 그 속에 지녔던 독소들은 빠져나가고 이제는 새로운 생명이 그 안에 깃들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 속에 들어온 빛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그 빛은 반사를 통하여 다른 사람을 비추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 속에 비추면 우리가 변하여 발광체가 되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빛을 발하라"는 말은 빛을 받아드리라는 말과 같습니다. 빛이 올 때 그 빛을 받으면 그 빛이 우리를 변화시켜 그 빛을 반사하게 되어 마치 우리 속에서 빛이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빛을 반사하라고 하지 않고 "빛을 발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 빛을 영접하면 그 빛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우리에게서 나간 빛이 또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다음 단계를 위한 충분한 빛

흔히 우리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나는 내년에 어떻게 될까? 지금부터 5년이나 10년 후에 나는 어디에 있을까?"라고 우리는 물어 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한두 시간 동안 혹은 내일 무엇을 해야 하는지와 같은 바로 다음 단계를 볼 수 있을 충분한 빛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삶의 묘는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것을 즐기고 어둠 속에 있는 것에 대하여는 불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곧 다가올 다음 단계를 비출 충분한 빛을 갖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간다면, 우리는 전 생애를 기쁨 가운데 살 수 있으며, 또 우리가 얼마나 멀리까지 가고 있는가를 보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작은 빛 속에서 기뻐하고 모든 그림자를 빼앗아 가는 강한 빛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현재의 순간을 사랑으로 채워 가리라" 구엔 반 투안 신부의 고백입니다. 깨어난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은 불만과 불평이 아닌, 감사와 기쁨입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만족하고, 내게 있는 것이 내게 필요한 충분한 것임을 알고 만족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빛, 볼 수 있는 그것을 즐기며 충분히 활용하는 가운데 더 멀리까지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지금이 내게 충분합니다. 지금 나의 영성이, 지금 나의 믿음이, 지금 나의 사랑이, 지금 나의 가족이, 지금 나의 일이 내게 가장 적합하고, 내게 가장 필요한 것으로 주어진 은혜입니다. 

이제 성탄절을 믿음과 사랑으로 준비하고 맞이하는 여러분 안에 이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기 바랍니다.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따라 나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빛 가운데 거하면서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체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빛의 열매인 선함과 정의와 진실함을 이룩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제 항상 빛 가운데 거하여 늘 승리하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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