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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평강 (빌 4:4~7, 습 3: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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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강석공 목사 (2004년12월12일 설교)
 
  올 한 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기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갈등과 대립의 요소들이 사라지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일 년을 돌이켜 볼 때 우리의 희망이라는 것이 참으로 부질없는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참 평화는 주님이 주실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참 평화를 찾을 수 없습니다. 또한 세상의 그 누구를 통해서도 참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만 우리는 참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다사다난했던 2004년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한 해를 마무리한답시고 바쁘게 움직이지만 우리는 이미 새해를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주님이 이 땅 위에 오신 성탄절 전 4 주간을 대림절이라고 부르며, 이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을 기점으로 해서 새해를 시작합니다. 이제 다시금 새해를 시작하면서 참 평화를 누리지 못했던 지난 날들을 되돌아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조용히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참 평화를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성탄절에 어떤 아이가 하나님께 보낸 편지에 쓴 글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성탄절이 좀 더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왜냐 하면 그 때까지 제가 착한 아이로 남아 있기가 힘들거든요...”

  오늘 봉독한 빌립보서의 말씀은 평화가 없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참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험하고 힘든 길보다 쉽고 평탄한 길을 바랍니다. 그리고 삶의 순간들이 편안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탐심과 욕심, 그리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이 그런 편안한 삶을 누리도록 그냥 놔 두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평화를 누리려고 몸부림쳐도 결코 누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참 평화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7절 말씀에 뭐라고 했습니까?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로서는 도저히 누릴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때 얼마든지 참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면’이라고 했는데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그 평강을 우리가 누릴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아주 분명하게 지시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렇습니다! 이것이 평화를 누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참 평화, 즉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기뻐하며,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고, 그 무엇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왜 평화가 사라졌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동산에서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평화가 사라졌습니다. 그들이 금지된 실과를 따 먹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포함한 모든 관계가 깨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향해서 ‘왜 그 실과를 먹었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하와를 향해서 ‘저 여자가 줘서 먹었다...’고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습니까? 동산에서 깨어진 그 관계들이 다시 회복될 때 우리는 비로소 참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때문에 먼저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려면 먼저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기 속에 불안과 공포, 두려움이 있으면 결코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참 기쁨이 없으면 또한 하나님의 평강도 누릴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편지를 가리켜서 기쁨의 편지라고도 합니다. 이 편지에는 기쁨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단어가 무려 열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그는 자신이 그랬듯이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일시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빌립보 감옥에서 많은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처박혔 있을 때에도 기도하고 찬미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로마 감옥에 갇혀서 시시각각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도 기뻐하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었을까요? 결코 이 세상의 즐거운 일 때문에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주님이 그의 삶 속에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에 그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세상이 주는 기쁨은 순간적이고 또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크고 완전한 기쁨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면서 비난을 받고 박해를 당할 수 있으며 심지어 죽음의 위협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면 그 모든 고난을 통해서 오히려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할 때 참 평화, 즉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려면 이웃과의 관계도 또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이웃을 너그럽게 대하고 그 잘못을 용서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베풀어야 할 관용이란 상당히 넓은 의미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까지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권리는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관용을 특정한 사람에게만 베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모든 사람이란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포함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심지어 우리를 핍박하는 원수까지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서 마음의 평안을 누리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으로 용서하시는 주님을 닮아서 원수까지 사랑할 수만 있다면 그 자체로 우리는 충분한 기쁨과 참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우리의 성숙한 모습을 진정으로 기뻐하실 것이며 더 큰 은혜와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한편 사도 바울은 우리가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로써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웠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것 같으면 우리의 모든 행위가 선악 간에 낱낱이 드러날 것 아닙니까? 주님이 오셔서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는다면 어떻게 이웃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이 이제 곧 다시 오실 것이라는 구호를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확신했기 때문에 기꺼이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종말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때문에 이웃의 잘못을 기꺼이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어진 삶의 시간이란 사랑하기에도 짧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우리는 참 평화, 즉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끝으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된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것 같으면 주님이 주시는 참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염려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대한 의심이 바로 염려가 아닙니까? 근심, 걱정, 염려는 신뢰의 결핍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염려는 우리가 세상으로 눈을 돌릴 때 생깁니다.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하며 근심, 걱정, 염려 따위를 모두 다 버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염려의 해결책으로 기도를 제시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참 기쁨과 참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에 반드시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감사하는 것은 모든 기도에 반드시 있어야 할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선하게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감사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했기 때문에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결코 두려워하거나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감사했기 때문에 그 사자 굴 속에서도 해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사자 굴 속에 던지도록 허락했던 다리오 왕은 궁궐에 있으면서도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는 기도에 감사가 빠질 것 같으면 그 기도는 기도를 빙자한 불평과 원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 봉착하여 그 해결 방법을 세상에서 찾으면 그것은 염려로 나타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찾으면 그것은 기도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나타납니다. 세상에서 해결 방법을 찾을 때 그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 해결 방법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을 때 우리는 형통하는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항상 기뻐하며,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푸는 성도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 주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다 잘 알고 계십니다. 그 주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주님 안에서 전적으로 주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들에게 주님이 평화를 주사 세상 염려, 근심, 걱정으로부터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대림절 세 번째 주일,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그 주님이 주시는 참 평화,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기 바랍니다. 대림절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현재 우리와 함께 계시며, 장차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기간 동안 평화의 왕으로 오신 그 주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자신을 돌아 보기 바랍니다.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우리도 구체적으로 실천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울러 모든 염려를 버리고 오직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깨어졌던 관계들이 주님 안에서 다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참 평화, 즉 하나님의 평강을 마음껏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 말씀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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