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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집시다.(고전 2: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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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충웅 목사 (2004. 12. 12 설교)

정말 시간이 이렇게 빠르게 지나갑니다. 아무도 붙잡아 둘 수도 없습니다. 작대기로 막고 눈을 부릅떠도 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시간 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이렇게 2004년은 저무나 봅니다. 오는 세월 가는 시간은 아무도 말리거나 막을 수가 없습니다. 항우장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면서 우리 정말 정직하게 한번쯤 생각해 봅시다. 나는 정말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인가를 말입니다.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 그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선한 마음을 먹으면 선한 사람이 됩니다. 악한 마음을 먹으면 악한 사람이 됩니다. 사랑의 마음을 먹으면 사랑의 사람입니다. 원망하는 마음을 먹으면 이상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바울 사도께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라 하셨습니다. 빌립보서에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죽기까지 복종 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늘 어릴 때부터 배웁니다. 부모에게 배웁니다. 착한 사람 되라. 정직한 사람이 되라. 남에게 베푸는 사람이 되라.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되라. 건강한 사고방식을 가지라. 아마 이런 말씀은 수 없이 많이 듣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으로부터도 또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그만큼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몸도 건강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건강해야 합니다. 마음이 병들면 위험합니다. 요즈음 마음이 병이 든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 사회에서 골치 아픈 사람입니다.

히틀러나 뭇소리니 같은 사람 한 사람이 이 사회를 얼마나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까?. 아히히만 같은 한 사람이 600만 유태인을 학살했습니다. 그러나 선한 한 사람은 이 사회를 아름다운 사회로 만듭니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은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라 합니다. 사실입니다. 정답입니다. 사람은 영적인 동물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우면 이 사회는 정말 유토피아가 될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다면 아마 길거리가 조용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끄러워서 도무지 사람 앞에 나타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수없이 되풀이 합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복수의 칼을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천사와 같습니다. 그러나 속은 너무 더러운 모습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야누스라는 신이 있습니다. 그 신은 앞뒤가 다른 얼굴입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겉과 속이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늘 외치는 것이 사랑입니다. 찬송가에도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자매 한자리에“ 합니다. 그리고 늘 우리는 형제자매라 합니다. 형제자매는 부모의 피를 이어받은 사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나쁜 환경이라도 끊을 수 없는 관계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같이 즐기며 같이 아파하는 사이인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사랑입니다. 누구나 사랑합니다. 원수도 사랑합니다. 우리 원수가 누구인지 잘 파악이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범위를 좁혀 봅시다. 나를 아주 미워하는 사람이라면 이해가 되시지요. 나를 욕하고 괴롭히는 사람이라면 이해가 되시지요. 그런 사람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우리의 긴 숙제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은 안 된다고 하지 맙시다. 노력해 봅시다. 그런데 부정적인 사람은 여간해서 고쳐지지 않습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는 말이 맞는 말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유전인지 모르겠습니다. 부모가 선한 사람은 자식도 그렇습니다. 부모가 덕이 많은 사람은 자식도 그래요. 부모가 까다로운 사람이면 자식도 대체로 그렇답니다. 병도 그렇답니다. 부모가 어떤 병력이 있느냐에 따라 자식도 그 병에 걸릴 위험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많은 훈련과 교육으로 가능하답니다. 그러니 먼저 자기가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인 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집시다.“ 라는 말씀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바울사도는 교회에 속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가 많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훌륭했습니다. 그만큼 성공한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교만했습니다. 자기가 믿는 유대교가 최고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은혜 받고 달라졌습니다. 전혀 이전의 사울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다 성령님이 하시는 역사입니다. 그가 여기서 이런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말입니다. 사람을 헬라어로 안드로포스라 합니다. 인간은 영(프뉴마) 과 육(프슈케) 이 대립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육은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영은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신 거기에 불어 넣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15절을 다시 읽어 봅시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여기 나타난 사람은 신령한 사람, 혹은 영적인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14절의 사람을 우리는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까요.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킹제임스 번역에는”자연인간“ 굳스피드는 ”물질적 인간“ 우리가 읽는 개역 성경에는 ”신령하지 못한 사람“ 이라고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영“ 과 ”마음“을 동일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영”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란 사실 형편없는 존재입니다. 더럽기 짝이 없는 존재입니다. 바울은 만물보다 거짓된 존재라 합니다. 아주 형편없는 그런 것이란 뜻입니다. 인간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거역한 배신자란 말입니다. 입으로 말하는 것이 모두 더러운 말만 합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 합니다. 어디 한 곳 성한 곳이 없다고 합니다.

이런 인간이 어디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인간은 정말 타락한 후예입니다. 인간은 쓰레기입니다. 그런데도 그러지 않다고 우기는 것이 정말 우스운 일입니다. 자기 존재를 알아야 합니다. 일찍 철학자는 “네 자신을 알라”는 말을 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했습니다. 정말 우린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한 많은 실망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정말 하나님을 떠난 실향민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7장 23-25절에는 “내 마음의 법”을 “나의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이라 합니다. 로마서1장28절과 골로새서 2장18절에서는 “마음”을 악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어떻게  바울은 “육적”인간과 “영적” 인간 사이의 차이를 그렇게 예리하게 구별 할 수 있게 되었는지요. 헬라 철학에는 그러한 차이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헬레니즘적 신비주의와  후일의 노스틱( 지식주의) 사상에는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육을 대치하였다는 사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이전이 시대의 문서에서 이 가설을 두둔할만한 증거가 없습니다. 바울은 영을 하나의 첨부된 사실로서 보고 있습니다. 비록 바울은 신자들이 진정으로 초자연적인 능력을 얻었다고 믿었지만 그들이 그 때문에 사죄의 가능성을 초월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일은 은하라는 뜻으로 해석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별 수 없이 죄인입니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것이 언제는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우리는 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격상실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신 것을 늘 감사합시다.

                  II. 예수님의 마음을 가집시다.

한 사람의 변화는 대단합니다. 바울의 변화는 기독교 신학의 체계를 이룬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것을 통해 대단한 역사를 이루시게 하십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는 정말 가슴이 뜨거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 변화가 기독교계에는 많습니다. 방탕하던 아우구스티누스가 변했습니다. 그는 한 때 방탕한 사람이었습니다. 수 없이 방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정원 벤취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말씀을 보라는 말이 들립니다. 주변을 보았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으라는 말을 듣긴 해도 책이 없습니다. 그는 이리저리 살펴봅니다. 그런데 그가 고향을 더나 올 때 어머니 모니카가 준 회중 성경을 늘 가슴에 품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급히 성경을 꺼 내 책을 편 것입니다. 그가 눈에 들어오는 말씀이 자기를 향해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오직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라는 것들입니다. 그는 거기서 꺼꾸러진 것입니다. 그는 위해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어그스틴의 참회록입니다. 그는 어머니의 젖을 먹으면서 젖꼭지를 너무 아프게 문 것도 회개 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위해한 성자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마음은 늘 바르게 가진 마음입니다. 정직한 마음입니다. 늘 마음이 따뜻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남을 나 보다 낫게 여겨야 합니다. 이것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살면서 끊임없이 자기와 싸웁니다. 그러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은 합니다. 그러나 그게 잘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시기와 질투가 이어집니다. 점점 각박해 집니다. 사랑이 식어집니다. 별것 아닌데도 큰 소리 칩니다.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정치판을 우리는 신문이나 잡지. 방송을 통해 압니다. 조금씩 양보하면 이 사회가 정말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자기의  주장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라 하십니다. 양보하는 마음입니다. 이해하는 마음입니다. 정말 남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모르는 그런 마음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마음입니다. 형식적 유대인은 유대인이 아니라 합니다. 유대인답게 사는 것이 진짜 유대인이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형식적인 신앙생화를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두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정말 우리는 하나님의 지시를 잘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기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늘 기뻐해야 합니다. 늘 감사해야 합니다. 늘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평생을 기도하고 신앙생활 잘 한다고 해고 잘 안되시지요. 그게 그렇게 쉬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탄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지 못하게 방해 합니다.

맺는 말;저는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세상은 정말 어렵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악하고 악합니다. 정말 이러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식은 부모를 닮습니다. 그것은 부모의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우리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런데 이를 방해하는 방해꾼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사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늘 정직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사라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도 불고하고 우리는 늘 변합니다.  이것이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을 늘 감사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감사합시다. 하나님의 축복을 늘 감사합시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대로 삽시다.

오늘도 변함없이 늘 진리 안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004년12월12일 -충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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