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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세의 훈련 - 소명과 시간 (행 7: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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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안환 목사 

17.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19. 그가 우리 족속에게 궤계를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20.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21. 버리운 후에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23.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24.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25.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26.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시키려 하여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하니
27.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28.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29.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30.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31.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32.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33.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34.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35.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 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36.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우리는 소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오해를 하는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오스기니스의 소명이라는 책에 보면 ?나의 삶의 유일한 청중이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를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즉 나를 부르신 분, 내 주인을 위해서 종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것이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소명은 그의 사역의 버팀목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소명이 분명하면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소명자는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나를 부르신 분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확신을 갖고 있으면 이 일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고 깨닫고 있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그릇되게 이해하는 사람들 때문에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갈 데가 없으니까, 할 일이 없으니까 가는 곳이 아닙니다. 오라는 곳이 많고, 해야할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겠기에 포기하고 오는 것이 올바른 소명을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젊어서 꼭 종교적인 무슨 직업을 가져야만 주의 종으로서 기회도 많고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이고, 늙은 다음에는 안 된다는 법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쓰시냐가 중요한 것이지 언제부터 쓰시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성숙과 확신을 가지고 사역에 임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분명한 부르심이 있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아야 합니다. 차라리 10년을 더 기다리더라도, 그래서 나이가 40이 되고, 50이 되고 60이 되더라도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일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꼭 젊은 나이에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명에 대한 그릇된 판단과 또 사람의 나이가 젊어야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 대해 성경은 엄격하게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릇된 소명의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모세가 받은 소명

첫째, 소명에 대한 그릇된 판단은 스데반의 연설인 오늘 본문을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22, 23절을 보면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라고 말합니다. 즉 모세가 40이 되었을 때 애굽의 학문에 통달을 했습니다. 풍부한 학문을 배우고 나자 모세는 생각했습니다.
‘자, 내가 나이를 40이나 먹었느니 이제는 차라리 내 동족이 중한 고역으로 인해 고생하는 데 가서 동족과 더불어 고생할지언정 애굽의 이 죄악적인 일락 가운데에 그냥 있을 것이 아니다’ 생각하고 왕자의 위치를 버리고 백성에게로 간 것입니다.
물론 모세가 가만히 있다고 해서 바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의 위치는 왕이 될 수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아무리 모세를 강에서 건져낸 공주가 하트셉수트라는 큰 권력을 가졌던 공주라고 해도 이스라엘의 아들인 모세를 왕으로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애굽인들은 피부색이 다릅니다. 단번에 공주는 이 아기가 이스라엘인 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애굽의 왕실이 외국인을 왕으로 세울 만큼 관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모세가 가만히 있었으면 왕이 되는 것인데 왕의 자리를 물리치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나갔다고 합니다. 듣기는 참 은혜가 됩니다마는 성경을 연구해 보면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4절을 보면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왕이 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애굽에서 권력자의 위치에는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권력을 얻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계속해서 모세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애굽에서 모세가 얻을 수 있는 권력을 “죄악의 낙”이라고 말합니다.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당하는 것을 좋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런 동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출발을 합니다. 이때가 40세쯤 되었을 때입니다. 이때 모세가 이런 마음을 가졌던 것은 우리가 본받을 일입니다. 자기가 가진 권력, 그것도 애굽에서 호령할 수 있는 권력을 동포를 위해 포기한다는 것은 지금 이 시대에도 쉽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의 영광과 명예와 물질을 버리고 나라와 민족과 세계를 위해 사는 사람들은 우리는 영웅이라고 부릅니다. 모세는 지금 그런 영웅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스데반은 모세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25절을 보면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즉, 내가 가만히 상황을 보니까 하나님이 나를 살리시고 바로의 공주의 품에서 크게 하시고, 나를 애굽의 학문에 능통하게 하신 것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너희를 구원한 구세주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빨리 눈치를 채서 나를 받아들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이 원통한 일을 당할 때 그는 이런 생각을 자신의 힘으로 애굽 사람을 죽여서 구원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무 실망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나를 준비하셨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빛을 비추어 주겠다’. 자기가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사람을 죽였으나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정받기보다는 살인자라는 칭호를 받게 됩니다. 모세가 그릇 소명을 이해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민족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은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이 마치 구세주가 되는 양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소명이 아니라 자신의 환경에서 모세는 스스로에게 소명을 부여한 것입니다. 모세는 마치 자기가 민중운동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모세는 40년의 미디안 광야 생활을 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완전히 실망하고 포기하는 기간이 바로 미디안 광야에서의 생활입니다.

모세가 40세에 세운 계획은 모두가 다 물거품이 되고 마는 순간입니다. 소명에 대한 그릇된 판단과 또 사람의 나이가 젊어야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 대해 성경은 엄격하게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릇된 소명의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2. 모세가 이해 못한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이 모세에게 광야에서 묻고 계신 것입니다. ‘너의 40년을 인도한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제 너에게 맡겨질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의 계획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인도하실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냐’는 것입니다. ‘지금 네가 시도한 민중의 봉기를 통한 해방은 단순히 정치적인 해방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내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놀라운 일과는 다른 일이다. 나는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놓이는 것뿐만 아니라 구속하기를 원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을 나타내는 계기가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그것도 모르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고역을 덜어주어야겠다는 일념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념으로 민족을 해방시키려고 한 사람은 세계의 역사를 보면 많이 있습니다. 로마에서 노예해방 운동을 했던 스파츠탁쿠스, 이탈라아의 가리발디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세계의 역사에 나오는 수많은 독립운동을 일으켜서 얻게 되는 정치적인 해방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구속을 원하신 것입니다. 단순한 정치적 해방이 아니라, 노예의 위치에서 자유인의 위치로 이동이 아니라, 죄에서 구속받는 영적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부르신 소명은 이것인데 모세는 그릇된 소명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하나님의 계획을 망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3. 모세 오경과 미디안 광야

이때 하나님은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너는 네 사명을 네 마음대로 규정하고 말았다. 사명이라는 것은 내가 네게 하라고 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지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 이드로의 집에서 양을 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것도 40년 동안 말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그 후 80세에 소명을 다시 확인하고 한 일들을 보면 단순히 양만을 치고 있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이끌고,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의 조직을 만들어서 질서를 잡은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의 시작이 되는 모세 오경을 기록한 저자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모세 오경을 읽어보십시오. 참으로 웅장한 문체로 글을 썼습니다. 내용이 얼마나 방대합니까? 하나님의 천지 창조에서부터 가나안의 입성 전까지의 내용을 모두 다루고 있습니다. 모세는 형용사를 잘 쓰지 않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압축적인 언어로 사실감있게 탁탁 던지듯이 써내려 갔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요점만 조목조목 집어주면서 웅장하고 굵게 써내려 갑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의 의미는 독자의 감동에 맡기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들을 써내려 갑니다. 어떻게 모세가 이 모든 것을 알아서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편지를 보십시오.
바울의 편지는 모세의 것과는 다릅니다. 바울은 사랑과 관심을 담아서 편지를 썼습니다. 그래서 형용사도 많이 사용하고, 가능하면 사람들이 부드럽게 읽을 수 있도록 썼습니다.
그러나 모세 오경은 이와는 다릅니다. 웅장하고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이 간결하고 응축된 언어로 적혀 있습니다. 물론 애굽에서의 40년 동안 모든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였으므로 글을 쓰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쓰는 것이 세상의 학문만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이 되기 전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전에는, 천지창조며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이야기를 쓸 수 없을 것입니다. 모세의 광야기간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가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동행하면서 깊은 교제를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묵상의 시간이 위대한 모세 오경을 만들어내게 된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모세가 미디안 광야의 40년 동안 양만 치고 다녔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모세는 양을 치면서 하나님을 묵상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모세에게 일어나는 일 하나하나에 주의를 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모세의 모든 인격과 습성과 모든 것을 사용하셔서 모세 오경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80세가 되었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는 일 때문에 무척 바빴을 것입니다. 대략 200만의 대군을 이끄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묵상하고 연구할 시간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묵상의 대부분은 바로 광야 40년의 시간동안에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모세의 사명과 나이

모세가 이렇게 불려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시작한 나이가 80세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가 120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면 80세는 인생의 3분의 2가 지나간 후입니다. 지금의 우리네 나이로 생각을 해 봅시다. 우리가 강건하여서 90을 산다고 해도 3분의 2가 지나면 60세입니다. 그런데 60세면 이미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는 지난 시기입니다. 그럼 언제부터 일을 하는 시기이냐 하면 대략 30세쯤부터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인생의 3분의 2를 지난 80세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남겨진 80세 이후의 생도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힘있고 정열적인 시기는 다 지나고 이제는 언제 주님 앞에 불려갈지 알지 못하는 나이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보낼만한 자를 보내십시오. 이 일을 제가 어떻게 감당합니까’?라고 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미 저는 인생의 3분의 2를 산 사람입니다. 아니 4분의 3일수도 있습니다. ‘좀 젊고 힘있는 사람을 보내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모세를 부르셨고,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바쁜 일정 속에서 모세 오경이라는 방대한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과 역사를 쓰게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이 모세가 혈기가 있던 40세 때에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경험을 하지 않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깊은 사색의 과정을 거치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 위대한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5. 칼빈과 어거스틴

우리가 잘 아는 칼빈은 26세에 기독교 강요를 썼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강요를 보면서 놀라는 것은 칼빈 당시에 썼던 비유들이 지금 우리가 동일한 비유로 설명을 해도 너무나도 이해가 잘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의 기독교 강요는 칼빈이 26세 때 쓴 책은 아닙니다. 칼빈은 처음에 기독교 강요를 쓸 때에는 급하게 프란시스 왕에게 기독교에 대해 변론을 하기 위해서 썼습니다. 일종의 팜플렛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자신의 작품이 얼마나 유치하고 짧은 생각이었나를 깨달으면서 수정에 수정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평생을 걸쳐서 수정을 한 결과 그가 죽기 전 55세 쯤에 마지막 완성본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마지막 완성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완성본이 그렇게도 위대한 것은 평생을 걸쳐서 그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가장 깊어졌을 때 수정을 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칼빈이 처음부터 완전하게 하나님에 대한 옳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가 점점 기독교 강요를 수정하면서 원숙한 경지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물론 칼빈이 갖고 있는 그 정신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거스틴에게서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칼빈은 없던 것을 만든 것이 아니라 있던 것을 잘 조직해 놓은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칼빈보다 오래 산 사람입니다. 70세까지 살았습니다. 항상 연구만 하던 어거스틴은 가르치는 깊이가 더욱 깊어지고, 성숙해 졌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도 칼빈과 마찬가지로 단점이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젊었을 때 작품을 보면 가끔 기독교와는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어거스틴의 단점은 젊은 날의 방탕함으로 인해 어학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자기가 유일하게 사용하는 언어인 라틴어 성경밖에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어거스틴에게 주신 능력은 라틴어 성경을 읽더라고 그 안에 적혀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잘 통찰 할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원어를 안다고 해서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명을 주실 때는 그 일에 맞게 준비를 시키신 후에 더불어서 사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냥 모세 오경을 쓰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고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상고하면서 깊이 묵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깊은 이해를 하려면 나이를 먹어야 합니다. 즉 세월이 지나야 깊은 것들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점점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물론 속도의 차이는 개개인마다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덮어놓고 젊을 때 무엇인가를 해야지 하는 조바심을 버리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일은 혈기와 젊음의 열정만으로는 만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묵상하는 것이 깊어질 때, 인생을 오랜 산후에 비로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소명을 올바로 이해하십시오. 환경에 맞추어서 내가 내게 소명을 부여하지 말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기다림이 바로 모세의 훈련의 기간입니다. 이때 비로소 소명을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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