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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따라 오너라 (마 4: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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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정근두 목사

구주 대망 2004년이 다가는 12월 첫 주일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 덕분으로 저는 심양을 잘 다녀왔습니다. 정말 여러분이 기도해 주신 덕분에 제가 여러분을 만나게 된 것 같습니다. 심양공항에 어제 오후에 나왔는데 부산의 기상상황이 좋지 않다고 비행기가 제 시간에 뜨질 않고 앉아 있을 때는 상당히 긴장이 되었습니다. 지난 화요일 도착한 오후부터 금요일 오후까지 오애교회 성도들, 특히 지도자들과 말씀의 교제를 시간마다 나누고 돌아왔습니다.

정말 그들은 모일 때마다 말씀을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모여든 성도들은 집으로 돌아갈 줄을 몰랐습니다. 성도들을 모으기 힘들어하는 동네는 영적으로 침체한 동네이고 모인 성도들을 돌려보내기 힘들어하는 곳은 영적으로 부흥하는 동네라 그랍니다. 저는 그런 부흥의 현장을 다녀오게 된 것을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제 오늘 읽은 말씀으로 한번 돌아가 봅시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첫 제자들을 어떻게 부르셨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이 기록을 그의 복음서 앞쪽에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라는 첫 설교를 한 다음에 처음 제자들을 어떻게 부르셨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하는지 증거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의 사역을 목격한 증인으로서의 임무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따라 나선 자들입니다. 그 길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놀라운 기적의 현장을 목도하고 때로는 어려움을 만나기도 합니다. 제자란 주님의 가르침대로 따르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약속이 보장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도 주님을 따라 나선 자들입니다. 제자훈련을 받았건 받지 않았건 모두가 주님의 제자의 길에 들어선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본받을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살피려고 합니다.

1.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안일함보다 순종함을 선택해야 합니다.

제자답게 살고 싶다면 안일함을 버리고 순종함을 택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그런 대로 편안한 삶을  살았습니다. 고기잡이가 편했다든지 세리노릇 하는 것이 쉬웠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래도 미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ꡒ나를 따라 오너라ꡓ는 주님의 부름은 더 이상 평안함을 보장하는 명령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주님이 시키는 대로 따라야만 하는 길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제자의 길에는 편안함이 우선이 아니라 순종함이 첫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한번  살펴보십시오. 우리는 편리함을 좋아합니다. 오늘 아침 교회에 오면서도 길이 막히길 아무도 원치 않습니다. 교회에 도착하자 주차하기 편한 곳을 찾습니다. 예배실에 들어와서도 내가 늘 앉았던 그 자리를 찾습니다. 누군가가 내 자리에 앉아있으면 우린 마음이 불편해 집니다. 이름도 써 붙여놓지를 않았는데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익숙하고 편리한 것을 추구합니다. 편리함은 이미 우리 삶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편리함을 선전하고 물품을 팔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편리함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편리함이 순종함의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첫 제자들을 향해서 주님은 ꡒ나를 따라 오너라ꡓ고 하셨지만 그럴듯한 산책로로 인도한 것은 아닙니다. ꡒ나를 따라 오너라 그러면 편안한 길을 걷게 될 것이고 감람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을 자게 될 것이고 하루해가 다하면 포도주 향기가 있는 곳에서 저녁을 먹게 될 것이다. 그렇게 약속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제자의 길에도 신나는 순간도 있었을 것이고 폼 잡는 기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들고 불편한 때도 주님을 따라가야 했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제자들의 삶의 어디든 평안함을 보장하는 곳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 하나님은 결코 편안함을 보장하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40일 훈련을 해 보셨지만 심심풀이는 아니었습니다. 올해 우리가 참여한 목적이 이끄는 삶 40일도 그렇고 내년에 계획하고 있는 공동체 40일 훈련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가진 초라한 삶은 박살나지만 이전에 꿈꾸지 못한 새로운 삶이 약속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전에 보던 식으로 세상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껏 살아왔던 대로 계속해서 살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 순종하는 길을 안일함을 박살내는 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는 이미 수 십 년 동안 주님을 따른 사람도 있습니다. 20년, 30년, 50년 이상 주님을 따른 분도 있습니다. 오랜 신앙의 길을 걸었다면 더 깊이 있는 가르침을 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깊이 있는 가르침은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섞어서 하는 설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순종하도록 하는 말씀일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2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낳고 기른 어머니보다 오히려 ꡒ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ꡓ(눅11:28)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순종을 말씀하십니다. ꡒ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는 아버지께로 가서 아버지와 함께 살 것이다ꡓ(요14:23)

동일한 가르침은 요한일서에도 계속됩니다. ꡒ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ꡓ(요일5:3) 사도 요한 뿐 아니라 바울도 동일한 진리를 로마서 2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ꡒ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ꡓ(롬2:13) 하나님 앞에서는 설교를 듣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된 삶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기초를 둔 삶입니다. 성도가 추구하는 삶은 웰빙이 아니라 웰리빙입니다. 웰리빙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에 있습니다. 하지만 순종의 길에는 또 다른 것이 요구됩니다.

2.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험하는 자리에 여러분 자신을 두어야 합니다.

복된 삶을 살고 싶습니까? 웰빙이 아닌 웰리빙을 추구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신을 모든 것이 보장된 삶에서부터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는 삶에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세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두려운 상황은 그들로 하여금 영적인 성장을 강요했습니다. 두려운 상황에 빠져들어야 우리는 주님을 더 바라봅니다. 말씀을 따라 모험하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잃은 자들에게 가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병든 자에게는 고침을, 만질 수 없는 자를 만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의 삶은 시대의 정신을 거슬리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대하셨기에 우리도 다른 이에게 관대해야 합니다. 어렵다고 해도 지난 한 해에 몇 천만 원을 번 사람도 있습니다. 몇 억을 벌기도 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수고해서가 아니라 그냥 사 둔 땅 때문에 그렇게 돈을 번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우리가 울산에 산다는 것만 해도 부러워합니다. 특별히 우리 가까이 있는 부산사람들, 대구 사람들은 우리를 엄청 부러워합니다. 마치 울산 사람들 평균 수입이 우리 개개인의 수입인 것처럼 그렇게 쳐다봅니다. 통계수치가 우리의 현실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잃어버린 자에게 생명을, 병든 자에게 건강을, 더러운 자에게 깨끗함을 가져다주는 일에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있습니다. 질병과 폭력, 무질서와 테러가 난무하는 곳에 하나님은 가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자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일을 저희 같은 전임 사역자들만을 향해서 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나눌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을 보고 나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그것을 말해주면 됩니다. 한숨 대신에 평안을, 불평 대신에 감사를, 저주 대신에 찬송을 부르게 된 이유를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할 말을 가진 사람입니다.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여러분 모두는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하셨는지를 말씀해 주면 됩니다. 사람들은 여러분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올 한 해 동안 성공해서가 아니라 여러분이 올 한 해 동안 부자가 되어서가 아니라 여러분의 삶 속에서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를 말해 줄 때 사람들은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비전 성취를 위한 전교인 40일 훈련을 통해 우리가 읽은 책 목적이 이끄는 삶에 대해서 들려주십시오. 그 책이 여러분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는지 말해 주십시오. 관심을 가지고 듣는 사람에게는 책 한권 선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 5,000원은 안 되지만 7,500원이면 계속해서 사무실에서 책을 여러분에게 공급할 것입니다.

병든 자에게 건강을 가져다주는 일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 대부분은 의사처럼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병든 자를 정서적으로 도와 줄 수는 있습니다. 그들의 곁에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들어줄 수 있습니다.

도우려고 마음을 먹고 시간을 내기만 하면 여러분이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은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몸을 마음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머리를 감기고 손톱발톱을 깎아주는 일도 누군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더러워진 집안을 청소하는 일도 소중한 봉사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정서적으로 발달이 더딘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정말 많은 분들이 백합 부 아동들을 섬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도 집안에 갇혀 있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찾아가서 섬기는 소그룹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배운 진리를  실천하는 것은 더 귀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한 해 동안 섬기는 기쁨이 가득한 한 해가 되기를 우리는 소원하고 나왔습니다. 그런 일을 할 때 만만치 않을 때도 있습니다. 만져서는 안돼는 자에게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만져서는 안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둥병자들입니다. 문둥병에 걸리면 사회로부터 가정으로부터 소외당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가까이 오기만 해도 부정하다고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소리쳐야만 했습니다. 접촉을 통해서 옮겨지기 때문에 아무도 만져서는 안 되고 만지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서 만져 주라고 명했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주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파송 하셨습니다. 악한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온갖 질병과 모든 허약함을 고쳐 주라고 말했습니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주라ꡑ는 구절을 메시지 성경은 ꡐ만져서는 안 되는 자들을 만져라ꡑ(Touch the untouchable) 번역합니다.

옛날 문둥병자는 오늘날 에이즈 환자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옛날 문둥병자를 대하듯이 에이즈 환자를 대합니다. 만져서는 안 될 뿐 아니라 문제를 가지고 그들의 문제를 끄집어내어도 안돼는 것처럼 금기시 합니다.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언급조차 기피합니다. 두려움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제자답게 처신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두려움으로 인해서 기피하지 마십시오. 제자의 길은 정면으로 두려움을 돌파하는 길입니다.

3. 제자의 삶은 변화를 주도하는 삶입니다.

여러분은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순교도 불사했습니다. 자신들이 세상을 바꾸어 놓는다는 것을 믿었기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인 이길 원하지만 진정한 신앙인답게 되기를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제자훈련까지는 받을 수 있지만 진정한 제자답게 살려고는 하지를 않습니다. 마음 속으로 우리는 그냥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여기 가득 차있는 우리 모두는 정말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이 비범하신 분이기 때문, 당신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하시기를 즐겨하십니다.

성경은 그런 기록들로 가득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도 그러합니다. ꡒ나를 따라 오너라ꡓ고 불렀던 그 네 사람, 특별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바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따라 오너라고 말했을 때에 따라 나서므로 그들의 삶은 비범해 진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주님에게 쓰여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대개는 우리 문화와 관습을 거슬리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세상은 욕구대로 살라고 외칩니다. 목마름에는 콜라를 마시고, 배고픔에는 햄버거를, 즉각즉각 욕구를 충족시키라고 외쳐댑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오늘 우리는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붙잡고 있으면서 주님의 제자가 되려고 시도하지는 않습니까? 오히려 주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우리가 귀중히 여기는 것을 더욱 강하게 붙들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ꡒ나를 따라 오너라ꡓ는 주님의 부름에 따라 나서기는커녕 주님 그라지 마시고 우리의 삶에 들어오십시오. 오셔서 도와주십시오. 주님으로 섬길 터이니 우리가 던지는 그물마다 엄청난 고기가 잡히게 하시고 그물을 끌어당길 때 찢어지지 않게 하셔서 다 잡아 놓은 것 낭패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우리의 배가 항구를 향해서 들어올 때는 언제나 만선의 기쁨이 있게 하십시오. 혹시 그렇게 생각하고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ꡒ나를 따라 오너라ꡓ고 우리에게 명하시고 있습니다. 주님을 따라 나서기 위해서 우리는 이전에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을 단절해야 합니다. 이전에 충성하던 것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사람마다 무엇을 끊어야 할 것인지는 다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에게는 즉시 그물을 내버려두고 주님을 따라야 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나서야 했습니다.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 여러분이 버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기 위해서 여러분이 포기해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사람마다 버려야 할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껏 소중히 해 왔던 것을 버려야 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할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와 안드레는 즉시 그물을 버려두고 야고보와 요한이 배와 부친을 버려두었던 것처럼 지금까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분토와 같이 버려야 됩니다. 근본적이고도 확실한 방향설정이 새롭게 필요합니다. 처음 제자들이 부름을 받고 반응했던 것처럼 여러분 모두는 반응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된 우리로 하여금 그 분의 가르침을 순종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동안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을 ꡒ버려두고ꡓ예수를 따라 나서길 촉구하십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두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ꡒ배와 부친을 버려두고ꡓ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어부의 삶에 그물을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부의 삶에 배를 포기한다는 것은 삶의 터전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닙니다. 즉각 그렇게 했다고 왜? 주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시의 문화에서 ꡒ부친을 버려두고ꡓ주님을 따라 나서는 것은 오늘 우리의 문화에서 ꡒ자녀를 버려두고ꡓ주님을 따르는 것과 동일합니다. 상상할 수 없는 결단을 내리는 것이 제자의 길에는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어떻게 하시렵니까? 돌아서시렵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가겠습니까? ‘예수 믿는 것이 그런 것인 줄 알았다면 시작도 안 하는 것인데’ 라고 후회되는 사람이 없습니까? ꡒ나를 따라 오너라ꡓ는 부름 앞에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렵니까? ꡐ다른 것은 다 몰라도 절대로 자녀는 안 됩니다.ꡑ ‘금쪽같은 내 새끼를 어떻게 포기합니까.’ 그르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무엇도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차지해야 될 자리에 두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사업이든, 건강이든, 배우자든, 아들이든 딸이든 그 무엇도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기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입니다. 생명 있을 동안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내일 일은 우리가 모르지만 오늘 내게 생명이 있다면 아직도 호흡이 있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자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가 아니십니까? 주님이 아니었으면 소망이 없을 사람들이 여기에 나와 앉아 있는 여러분과 저입니다. 그 분이 구원하셨기에 우리의 삶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날 이후 우리는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삶에는 고백만이 아니라 삶이 뒤따라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주인이면 우리는 종입니다. 종은 자기 판단에 따라서 행동하는 자가 아닙니다. 주인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옵니다. 자기 생각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움직여야 합니다.

2시에 심양을 떠나는 비행기를 타고 부산에 5시 10분에 내려야 일들이 될텐데 부산 기상 상황 때문에 비행기가 뜨지를 않습니다. 30분을 기다렸는데 아직도 기약이 없습니다. 대체로 그런 상황에서는 염려하지 않기로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기상을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산에 기상 상태를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그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면서 걱정하면 뭐합니까? 난 걱정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니까 주인이 알아서 나를 돌려보내면 울산에 가서 여러분을 만날 것이고 돌려보내지 않으면 하나님이의 무슨 계획이 따로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편안합니다. 그렇지요? 막 그때부터 안절부절하기 시작하면 일만 점점 어려워집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ꡒ나를 따라 오너라ꡓ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든지 버려두고 따라 나서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포기하고 따라 나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ꡒ나를 따라 오너라ꡓ는 부르심 앞에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렵니까? ꡐ그물까지는 포기하지만 배는 어렵겠습니다ꡑ‘배까지는 내가 포기하지만 부친을 버려두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닙니다.ꡑ그럴지 모르겠습니다. 아니ꡐ부모는 가능하지만 자녀는 어림도 없습니다ꡑ어느 것이 여러분의 입장입니까?

오늘 본분만 아니라 주님은 자기 제자들을 향해서 분명하게 약속을 하십니다. 주님이 명령하시면 명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명령하시면 반드시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포기하면 주님은 보상하기로 약속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때 놀라운 보상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속한 것들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때 거기에 상응하는 보상을 약속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ꡒ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식을 버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로 보상을 받을 것이고, 또한 오는 세상에서 영생을 받을 것이다.ꡓ(눅18:29-30)

제자의 삶을 위해서 여러분이 포기해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포기하는 것에 상응하는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집이나 전토 입니까? 아내나 형제입니까? 부모나 자식입니까? 하나님은 포기할 때 그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러 배나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오는 세상에서 영생을 주실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제자의 삶은 안일함보다 순종함을 택하는 삶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일오후에 학원에 아이를 보내면 마음에 안심이 됩니다. 그러나 남들 주일에 학원 보내는데 안 보내려면 불안해 집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자는 주님말씀대로 순종해야합니다.

엿세 동안 우리 모든 일을 하라고 명하실 때는 내 아들이나 딸이나 내 남종이나 여종이나 다 포함시켰습니다. 더 이상 “나하고 같이 주일날 예배에 잠깐 갔다 와서 학원에 가라.” 그렇게 말하는 집사는 저는 집사로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잡사입니다. 집사일 수 없습니다. 집사는 자기의 신앙을 자기 자녀에게 넣어 주기 위해서 무슨 대가라도 치룰 수 있는 사람이어야 됩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험하는 자리에 자신을 두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보장되어 보이는 삶에서부터 아무 것도 보장이 없는 자리로 내 디뎌야만 되는 것입니다. 

두려운 상황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부르짖게 만들 것입니다. 두려운 상황은 영적인 성장을 우리에게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일날 학원에 보내지 않고 교회에 쉬도록 예배하도록 하는 것이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를 두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 모험하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가치관에 도전하면서 시대정신을 거역하는 모험, 그것이 제자들에게 부름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순종하는 제자의 삶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삶입니다. 여러분은 변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내딛게 되면 흘러넘치는 요단강 물은 멎게 되어있습니다.

365일 기도합시다. 52주 모여서 자녀들과 함께 예배하고 자녀들을 위해서 축복하고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우리의 자녀들은 반드시 변화의 주역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세상이 벌벌 떠는 자녀까지도 희생하고 말씀대로 살기로 하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일어나셔서 우리를 돕기 위해서 나서는 분이십니다. 온 세계를 두루 다니시면서 누가 자기를 향해서 능력 베푸시길 기다리는지를 하나님은 찾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도 시도하지 못한 믿음의 도전을 할 때에 전능의 하나님은 일어나셔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제자훈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자다운 진정한 삶을 시작해야합니다.

그 때 주님의 영광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거두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는 이들입니다. 세상은 변화를 주도할 그리스도의 제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민족이 새로워지고 열방이 복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올곧게 자라는 우리 자녀들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내년은 교육공동체에 힘을 싣는 해입니다. 특히 청소년 교육을 위해서 결단하고 헌신합시다. 허물어진 청소년의 예배의 제단이 새롭게 수축되어야만 합니다. 새벽이슬 같은 청소년이 무수히 일어나는 복된 해가 우리 울산교회가 희년을 앞두고 되어야만 울산 교회는 울산 시민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울산교회는 울산시민의 축복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이 땅을 위해서 열방을 위한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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