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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로 오라 (요 6: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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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문기태 목사

(요 6:3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 6: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않는다.
(요 6: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또 내게로 오는 사람은, 내가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요 6:38) 그것은, 내가 내 뜻을 이루려고 해서가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하늘로부터 내려왔기 때문이다.
(요 6: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요 6:40) 또한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

어떤 교회에 새로운 목사님이 부임하였습니다. 성도들은 저마다 목사님을 대접하려고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습니다. 미달이 엄마도 생각다 못해 서툰 솜씨나마 잡채를 만들어서 드리기로 했습니다. 잡채를 받은 목사 부인은 너무나 이상하게 만든 잡채를 받아들고 매우 난감해 하다가 할 수 없이 비닐봉지에 싸서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주일 날 미달이 엄마를 만난 목사님은 어떻게 인사를 해야할지 난감했습니다. 목사님이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고 하면 상처를 받을 것 같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미달이 어머니, 친절하게 우리를 생각해주신 성의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보내주신 잡채는 얼마나 대단한지 받기가 무섭게 사라질 정도였습니다."

요한복음 6장 앞 부분에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는 기적에 관한 기사가 기록되었습니다. 이 사건의 소문이 급속도로 근동에 퍼졌습니다. 그러자 수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아 수소문하여 배를 타고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까지 찾아왔습니다. "랍비여 언제 여기로 오셨습니까?" 하자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보고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고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의 양식을 위해 힘쓰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군중들은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믿게 하는 표적을 보여 주십시오. 모세는 광야에서 조상들에게 만나를 내리게 하였는데 당신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기적을 행하시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비같이 내려주기를 기대하는 그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주신 만나보다 더 놀라운 생명의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서로 바라보며 수근거립니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우리가 그 부모를 아는데 어찌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이 사람이 어찌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하고 웅성웅성하더니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모두 뿔뿔이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군중들뿐만 아니라 66절에 '제자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는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하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까지도 여론의 영향으로 예수님께 등을지고 돌아선 것입니다.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참 생명을 주시려는 예수님의 마음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냉정하게 돌아섰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려고 교회를 찾아 왔다가 이들처럼 자신들이 기대했던 예수가 아니라해서 실망하고 다시 돌아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썩는 양식 즉 육의 양식만을 얻고자 나아왔다가는 실망하고 돌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분명히 굶주린 무리들을 육의 양식을 가지고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려는데 더 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몰려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순간적으로 배부르게 할 뿐인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잇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안에서도 기도 응답이나 능력전도를 강조합니다. 경제문제나 자녀문제, 취업이나 시험등의 문제를 가지고 새벽기도나 심야기도등 기도시간에 교회에 나와 간절히 부르짖음으로 응답받는 일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슨 문제든지 하나님께 들고 나아와 기도로 해결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전도소그룹이나 심야기도 또는 알파코스에서 병든 자를 위한 치유기도를 해 줍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치유받습니다. 지난 목요일에도 알파에서 치유기도시간에 성령님의 강한 만져주심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런 역사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사람들로 능력의 예수님을 경험하게 하여 그분께 구원이 있음을 깨닫게 하여 자신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내어 맡김으로 영생을 얻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영혼이 영원히 구원받지 못하면 아무리 많이 불치의 병에서 치유받고 곤경에서 기도응답으로 빠져나왔다고 해도 별로 유익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표면적인 모습만 보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겉보다는 속에 숨겨진 내용이 더 중요합니다. 본질적인 것들은 겉으로 드러나기 보다는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겉 모습은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를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외모가 어떻게 생겼으리라고 상상하십니까?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이 배용준이나 장동건처럼 잘 생기지 않았을까 기대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라고 증거합니다. 30대 초반에 50세 정도로 보았을 정도이니 얼마나 초췌한 모습이었을까 상상이 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판단합니다. 화려한 기적을 행할 때는 몰려왔다가 아무 기적도 행하시지 않고 그들의 영혼을 위해 예수님 스스로 제물이 되시겠다고 하니까 실망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어 모여온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스스로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자신을 내어 주시어 영생의 양식으로 내어주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당연히 자신을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시면서까지 생명의 양식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당장에 잠시 잠간 만족을 느낄 육의 양식에만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아셨습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었어도 그것을 먹은 이스라엘백성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날마다 먹고 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했으며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늘 나라는 물론 약속의 땅에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아무리 만나를 많이 먹어도 그 만나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생성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고 말슴을 통해서 예수님이 왜 이 땅에 내려오셨는지 설명하시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믿을 것을 강력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적인 사건에서 눈을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께로 돌려 예수님만을 직시할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의 심정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우리 교회안에서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적인 사건을 체험한 분들중에 예수님을 멀리하고 떠나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처음에 그렇게 확실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은 절대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절대적인 착각이었습니다. 위험한 질병에서 치유받고 위기의 상황에서 기도의 응답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경제문제, 가정문제 등 다양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고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내가 반드시 은혜를 갚을것이다. 감격하여 어쩔줄 몰라하지만 다 소용없습니다. 조금만 교회에 섭섭한 일이 있어도 등을 돌립니다. 하나님이 자기가 원하는대로 맞추어주지 않았다고 존재와 사랑과 능력을 다 부정하고 배반합니다. 떠나갑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죄인의 본 모습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찾아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배가 고파 빵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입니까? 몸이 아파 질병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입니까? 가정의 위기가 찾아와 해결받기 위해서입니까? 불안과 두려움, 스트레쓰 등 정신적인 위안을 받고 싶어서입니까? 물론 잘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경제문제, 건강문제, 가정문제, 자녀문제, 마음의 평안 등 다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즉시 해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런 문제만 해결받고 돌아가면 여러분은 갈릴리 평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배불리 빵을 얻어 먹었으나 수근거리며 예수님을 멀리 떠나간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바가 없습니다. 오병이어의 떡과 생선은 직접 그 현장을 보고 직접 먹어보면 좋겠으나 못먹었어도 크게 손해될 것이 없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것은 직접 체험해 보아도 좋고 체험을 못했어도 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표적을 통하여 우리로 참된 믿음을 갖게 도와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바르게 믿게 하여 영생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우리로 영생을 소유하게하여 마지막 날에 다시 살려서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깊은 뜻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의 주님을 보지못하고도 그 기적의 떡을 맛보지 못하고도 믿어지면 더 좋은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 대단한 기적을 체험하고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체험하지 못했으나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믿고 받아들여 참된 만족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 진정한 축복인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십니다. 그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굶주린 자에게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항상 먹어도 다시 배고프고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먹어도 여전히 배고픈 인생들에게 참 만족을 주시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서서히 죽어가며 멸망에 이르는 자에게 영생을 가져다 주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도 사람들을 향하여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하고 부르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하십니다.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만족과 기쁨을 채워 주시려고 간곡하게 예수님께로 나아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예수님께 나아오도록 부르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으시고 예수님께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더욱 더 가까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예수님께 나오는 자를 내어 쫓지 아니하신다고 말슴하셨습니다. 실력이 없다고 내쫓지 않으십니다. 못났다고 내쫓지 않으십니다. 가진 것이 없다고 내쫓지 않으십니다. 죄와 허물이 많다고, 과거가 깨끗하지 않다고 쫓아내시지 않습니다. 구원을 기대하고 나아오는 자들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나아오는 자들을 박대하지 않으십니다. 용서와 죄사함을 구하는 자들을 비난하고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위로받기를 원하고 사랑받기를 원하는 이들을 영접하시고 반겨 맞으십니다.

어느 마을에 자기가 못된 아이라고 인정하는 솔직한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그 애에게는 한 가지 소원이 있었는데 그것은 크리스마스 때 예수님께 선물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때만 되면 선물을 자랑하는 친구들 때문에 상심한 그 아이가 어느 날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예수님은 어떤 애들한테 선물을 줘?" "음, 거짓말 안하고 착한 어린이한테 준단다."

이에 고심하던 아이가 결심을 한 것인지 방으로 가서 예수님께 보낼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거짓말도 안 하고, 착한 일만 하는..." 여기까지 쓴 아이는 갑자기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착한 일을 한 기억이 없는 것이입니다. 아이는 곧바로 편지를 지우고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지금까지 착한 일을 한 것은 없지만 앞으로는 착한 일만 하고 살 거예요." 여기까지 쓴 아이는 또 다시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앞으로 착한 일을 할 것 같지 않았던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아이가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집을 나가 동네 성당에 있는 작은 성모 마리아상을 가지고 자기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흐뭇한 표정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네 어미를 인질로 잡고 있다. 어미를 찾고 싶거든 선물을 보내라."

예수님은 착한 일을 하나도 한 것이 없는 사람도 돌아오기만 하면 반겨 맞아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찾아 교회까지는 왔으나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교회에 가봐도 나아지는 것이 하나도 없더라. 내가 오랫동안 교회다녔는데 다 소용없더라."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훼방하는 방해꾼이 됩니다. 교회는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하나의 관문입니다. 교회에 나오셨으면 거기에 머물지 말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 품안으로 깊숙히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고 배우는 자리에까지는 나아갔으나 예수님께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진리를 이해하고 깨닫는 것은 결단하고 실천하여 진리를 내것으로 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 발견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하여 지금도 살아계셔서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으면 그분께 믿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35절 말씀에서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로 나아간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마음과 삶속에 주인으로 모셔들여 예수님이 나를 주관하고 새롭게 변화시키도록 자신을 그분께 내어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캐나다의 옛날 개척자들은 바빈 요새를 대피소로 쓰고 있었습니다. 그곳의 물자가 거의 바닥나자 빅터 클락과 한 젊은 안내자가 음식을 구하러 요새를 떠나 해즐튼 마을까지 걸어갔습니다.
그들이 요새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살을 에는 바람으로 뼈속까지 추위가 스며들었고 어둠 속에서 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가던 길을 멈추고 불을 피워 그곳에서 비참한 밤을 보냈습니다. 이윽고 새벽빛이 서서히 밝아오자 그들은 그들이 멈추었던 곳에서 불과 수백 야드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포근하고 안락한 요새가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가까우면서도 또 그렇게 멀리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약속의 땅의 경계선에 있었습니다 (민 13장).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보호, 그리고 승리를 주실 것을 의심했고, 결국에는 광야에서 40년간을 유랑하다가 경계선에서 죽게 되는 운명을 맞고 말았습니다. 그들 역시 그렇게 가까이 있었으면서도 또한 그렇게 멀리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당신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수도 없이 들었으면서도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신도 가까이 있으면서 또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경계선에 머물러 있지 말고 지금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의 "약속의 땅"으로 건너가기로 결단하십시오. 

2004-12-15 18:5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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