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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이든지 점검표 (빌 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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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금성 목사

어떤 장애인 시설에서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 예쁜 손 어디 있지요? 예쁜 손을 들어 보세요.”
지체 장애 어린이의 옷을 입히면서 예쁜 손이라고 하더군요.
“예쁜 발 어디 있나요? 아이고 발이 참 예쁘네.”
장애 어린이들의 신발을 신겨주면서 예쁜 발이라고 하더군요.

선생님이 그렇게 부르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이 어린이가 자라면 자신의 손이나 발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장애라는 현실에 좌절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릴 때 늘 들었던 '예쁜 손, 예쁜 발'이라는 말이 귀에 남아 있다면 달라집니다. 자기의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신체장애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장애인들은 남보다 신체의 약한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부끄럽다고 숨기면 열등감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을 ‘예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장애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좋은 면이 있고 나쁜 면이 있습니다. 좋은 면을 많이 보면 기쁨을 얻습니다. 그러나 나쁜 면을 크게 보면 걱정거리만 늘어납니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진 사람은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 살아가는 법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한쪽 팔이 없으면 다른 쪽 팔로 해결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면 청각과 촉각으로 해결합니다. 장애인이 불행해 지는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입니다. 다른 사람은 팔이 둘인데 나는 왜 하나인가? 비교하면 불만이 생기고, 불만은 원망으로 바뀝니다. 그 때부터 인생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비결은 머릿속에 얼마나 좋은 것들을 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좋은 생각을 가득 채우면 행복합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불행해집니다.

지난 주일에 평강을 얻기 위한 세 가지 덕목을 말씀드렸습니다. 기쁨, 관용, 감사. 이 세 가지는 빌립보교회가 평강을 위해 반드시 누려야 할 것들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평강의 두 번째 비결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평강을 위한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

본문이 딱 두절밖에 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9 절 말씀을 보면,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8 절과 9 절 앞부분이 평강을 얻는 두 번째 비결이 됩니다.

오늘 본문 8 절은 ‘무엇이든지’라는 단어가 많습니다. 개역성경은 ‘무엇에든지’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문법입니다. 무엇이든지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빌 4:8>

이런 충고는 바울에게는 한가한 충고처럼 보입니다. 정작 자신은 사형 판결이 날지도 모르는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또 내분과 핍박에 휩싸여 있는 빌립보교회 사정을 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오늘 말씀은 그 의미를 깊이 새겨야 합니다.

인간은 머릿속을 무엇으로 채우느냐가 그 됨됨이를 결정합니다. 하루 종일 돈만 생각하는 사람은 수전노가 됩니다. 하루 종일 성적 쾌락에 대한 생각으로 자기 머리를 채우는 사람은 성적 노예가 되고 맙니다. 하루 종일 적대자들에 대한 분노와 원한으로 씩씩대면 아주 불행하고 병든 사람이 됩니다. 저열한 인격체가 되고 맙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내적 평강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평강이 깨지고 맙니다. 가정도 지옥으로 만들고 맙니다. 자기 뿐만 아니라 식구들을 혼란과 불행 속에 빠트립니다.

반면에 고상한 가치를 생각하는 사람은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가 됩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핍박하는 자들을 원한으로 불타는 마음으로 바라보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교회 안에서 반대파에 대한 분노로 치를 떨며 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평강이란 우리 머릿속에 무엇을 채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면 우선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에 의하면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한 것, 사랑할 만한 것, 칭찬할 만한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적대자들이 거짓되고 악하고 추한 일들을 벌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분노와 복수심으로 치를 떨게 됩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으로 우리를 몰고 갑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깊은 신앙심을 본문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작동시켜야 합니다.

저 사람에게도 참된 것이 있다. 저 사람도 기도하는 사람이다. 저 사람에게도 옳은 것이 있다. 몰라서 그러는 것이지 깨끗한 면이 있다. 돌이켜 보면 사랑할 만하지 않은가? 칭찬거리를 찾아보자.

이런 말씀을 들으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은 그렇게 할 수 있나요?”

참으로 본문은 도전이 됩니다. 설교자도 감당하지 못할 본문이라면 이 설교는 참으로 어려운 설교입니다. 만약 저도 지키기 어려운 말씀이라고 대답한다면 오늘 설교는 실패입니다. 말씀의 권위가 세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신 있게 할 수 있다고도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대답을 미뤄두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성경 앞에서 저와 여러분이 함께 무릎 꿇는 자세로 받기로 하십시다.

그러면 이 말씀을 전하는 바울은 8 절 말씀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9 절에서 엄청난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이 말씀은 바울 자신이 8 절 말씀대로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감옥에 가두고 재판을 하고 있는 로마를 이미 용서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병사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를 다 품으셨습니다. 다 용서하셨습니다.

바울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리 하신 것처럼 저들을 용서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범한 무엇이든지 다 용서했습니다.
바울은 말로만 가르치는 사도가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득도를 한 사도입니다.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바울에게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들었습니다. 또 말씀이 사도를 통해 삶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말씀을 말로만 아니라 눈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이교도들에게 둘려 싸여 있었습니다. 빌립보라는 도시가 그렇습니다. 로마 군대 주둔지로 군사문화가 발달한 곳입니다. 헬라문명과 철학이 발달했습니다. 기독교문화보다는 세속문화가 번성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그 당시 빌립보의 문화적인 배경을 고려해서 읽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교도의 삶에도 도덕과 좋은 점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지 않아도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은 어디나 합니다. 불교도들은 정말 열심히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으려고 도를 닦습니다. 험한 일을 당하면 합장을 하고 ‘나무 관세음보살’ 하면서 위기를 넘깁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도를 닦는 것처럼 하지 않습니다. 원리가 다릅니다. 그것은 내 의지와 결심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지 못해도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나는 연약해 실패할 수 있습니다. 내 의지로 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주님께 이것도 맡겨야 합니다.

얼마 전에 어떤 전도사님 사모님이 임신을 했습니다. 그 사모님은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탭댄스를 많이 춰야 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임신을 하면 곤란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모님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부터 행동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우선 말과 행동이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성격도 아주 차분해졌습니다. 저는 사모님이 평소에 집에서 어떤지는 모릅니다. 전도사님이 이야기해줘서 알았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기를 품었다는 사실을 알고 사람이 달라지는구나. 모성의 본능이 태교를 곱게 하게끔 하는구나. 생명을 품어도 달라지는데, 우리가 성령님을 모시면 어찌 달라지지 않을까?

아기를 품은 산모는 모든 행동과 말에 아기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모셔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내 안에 계신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선하게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아무리 악한 상대를 만나도 좋은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악을 선을 갚는 것이 성령이 힘주시는 능력입니다. 선으로 그의 얼굴을 뜨듯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무엇이든지 점검표’입니다. 항상 우리 머릿속에 좋은 생각을 채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말씀대로 하나하나 점검해 봅시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참된 생각. 무엇이든지 경건한 모습. 지금 내가 하는 생각이 옳은 생각인가? 무엇이든지 정결한 생각. 지저분한 상상을 멀리합시다. 무엇이든지 내가 사랑할 만한 한가? 무엇이든지 칭찬거리는 없는가?
그러면 우리는 염려에 압도당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평강이 찾아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결코 손해보지 않도록 돌보아 주십니다. 당하지 않게 지켜주십니다. 참 승리의 맛을 누리게 하십니다.

따라서 한 번 해봅시다. “아! 그거 좋은 생각이야.”
오늘 배운 말씀으로 평생 평강을 누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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