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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서주일] 복이 있는 사람 (계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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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기 목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강림절 중간에 성서주일을 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적으로 성서주일을 지키게 된 기원은 1904년, 즉 영국성서공회 100주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1915년 미국성서공회 창립 100주년을 맞아, “이토록 오랜 그리고 놀랄만한 기간 내내 성서의 번역과 출판, 배본에 있어서의 성과들에 대한 경건한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행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성서를 생각하고 그 성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동시에 이 성서를 더욱 사랑하며 읽고 연구하기로 서약하는데” 목적을 두고 1954년 이래 줄곧 12월 둘째 주일을 성서주일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모든 이단들의 문제는 이 말씀에 대한 자기 이해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교회부흥도 그렇습니다. 말씀은 뒷전으로 하고, 신비한 체험을 앞세운 그런 교회부흥을 해온 것이 그동안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경 읽기보다는 기도회나 부흥회를 통해 은혜를 체험하고 신비한 것을 경험하게 하였습니다.
물론 성령운동을 통해 교회가 부흥됩니다. 그러나 성령운동도 성경을 동반하지 않으면 결코 그 부흥이 계속될 수 없는 겁니다.

사실 1910년 전후의 우리나라 부흥운동은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 받는 사경회가 널리 퍼지면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은사운동으로 바뀌어서 말씀은 뒷전이 된 것입니다.
어떻든 교회는 부흥이 되었으나 오래지 못해 주춤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뒤늦게 교회마다 성경공부에 열중하게 되었지만, 성경공부가 사람을 모으기 위한 방편이 되거나, 교인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이 되고 말았다는 것도 아니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읽고, 듣고 그리고 지켜 행해야 하는데, 읽고, 듣고는 잇지만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 되고 만 것입니다.
모든 교회의 프로그램이 그야말로 교회부흥을 위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교회에서 무엇을 해서 성공했다고 하면 너도나도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베델이 나와서 성공하는 듯하자, 각종 비슷한 것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물론 그것들이 나쁘다고 비판하는 것 아닙니다.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켜 행하기 위한 성경공부라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교회부흥을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다락방 운동과 빈야드 운동을 검증해 볼 겨를도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선 뒤늦게 이단이니 아니니 하면서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들에 대한 이단 논쟁은 성경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교파의 교리나 주장이 아니라 성경이 판단의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왜 그런 문제가 생겨났을까요?
우선, 성경은 오래 전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 기록은 사실이 일어나는 그 순간순간 기록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에 있다가 말로 전해지게 되었고, 그러다가 기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계속 입에서 입으로, 교회에서 교회로ㅓ 전해지다가 30년, 40년, 50년이 지나서 비로소 기록된 것입니다.

더욱이 어떤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상징이요 비유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떤 사진이나 그림으로 “이거다.” 하고 보여준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겨자씨와 같다.”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 그 상징과 비유를 나름대로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세상의 시작과 인류의 역사 그리고 세상의 끝까지도…….
그래서 시인 하이네는 성경을 읽고 그의 소감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 실로 놀라운 책이 아닌가? 세계의 넓이 또 그 크기에 비할 수 없으며, 조화의 근저에 뿌리를 박고, 창고의 밀실에 높이 솟았네! 태양의 출몰, 약속의 성취, 생명과 사망, 인류의 모든 이상이 이 책 가운데 있도다.”
실로 위대한 책. 그것이 성경입니다. 참으로 오랜 동안,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애독해온 책이 성경입니다.
요한복음 21장 25절에, “예수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한 줄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엄청난 크기, 엄청 위대한 책이 성경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성경의 비밀을 찾아내기란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 보는 것 보다 더 불확실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가 아니라 그냥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주장합니다. 그 근거가 베드로전서 2장 24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봄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인데, 그렇다면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셨다”는 말씀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예가 될지 모르지만,
80이 넘으신 아버지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글도 엉망이고 맞춤법도 틀려서, 어떤 때는 무슨 단어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이 일이 났는데, 그 날이 어제인지 엊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신이 계산에서 미끄러져 몸이 불편하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편지를 들고 글이 왜 엉망이냐 맞춤법은 왜 틀리느냐를 따진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더더욱 그 사건 일어난 날이 어제냐 엊그제냐를 따진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아버지 편지의 내용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당신이 다쳐서 불평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잃을 때는, 그 성경 가운데서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하는 겁니다.

우선, 우리는 성경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 혹은 세계 역사를 통해서도 자신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더욱 본명하게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창세기를 통해서 창조의 하나님을, 출애굽기를 통해서 해방의 하나님을, 레위기 통해서 순결의 하나님을 나타내셨습니다. 성경의 각 책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말해줍니다. 아모스서는 정의의 하나님을, 호세아서는 사랑의 하나님을, 이사야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각각 나태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정의의 하나님 앞에서 내 죄를 회개 하고, 때로는 사랑의 하나님 아에서 죄에 대해 용서를 받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뜻, 활동, 모습 등 그 분의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인간의 참 모습을 깨닫게 해줍니다.
성경 안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울 앞에 서면 거울에 비추어진 모습을 통해 내 얼굴의 생김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경이라는 거울을 통해 내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라인홀드 니이버는, “성서에서 인간은 두 가지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 하나는 인간은 다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누구나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성경은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줍니다.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를,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오셨으며, 대속 물로 자신을 주신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되셨으며, 죄인 된 사람들이 구원 얻도록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새로운 사람”으로 창조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기록하였고, 그래서 누구든지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해준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구원의 길을 가르쳐 줍니다.
어떤 젊은 관원이 예수께 나아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 인류 전체의 질문인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디모데후서 3장 15절은, “성경은 능히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다른 책과 다릅니다. 그러나 책이라고 하는 것에서는 다른 책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른 책이 감히 언급도 할 수 없는 인류의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안에서만 사람은 구원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언제나 우리에게 생명력을 줍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곧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주의 역사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문학과 예술과 도덕에 영향을 끼쳤고,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관, 우주관, 인생관, 종교관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끼치며, 고상한 인격을 형성하는데 감화를 일으켰습니다.

성경은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고, 절망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소망이 되었으며, 연약한 자들에게 힘이 되었습니다.
“허다벌스 잉그설”이라는 무신론자가 역시 무신론자인 친구 “뉴올리스”라는 대장에게 기독교를 반대하는 책을 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뉴올리스는 그런 책을 쓰려면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기에 먼저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어가는 동안 점차 그의 생각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결국 성경을 통하여 회개하고 예수님이 삶을 묘사한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 책이 바로 저 유명한 ‘벤허’라는 작품입니다.

백화점 왕 “워너 메이커”에게 어느 신문기자가 인터뷰하며 물었습니다.
“당신으로 하여금 오늘날 성공에 이르게 한 어떤 비결이 있습니까?”
그때 워너 메이커는 대답했습니다.
“내가 11살 때, 시골에서 올라와 작은 주일학교에 나가게 되었다. 그때 주일학교 선생님이 성경을 사라고해서 2불 75센트를 주고 붉은 가죽으로 장정된 성경을 샀다. 그것이 오늘날 나를 구원에 이르게 했고 오늘의 복을 받도록 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구원할 힘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구원할 힘은 또한 어디에 있습니까? 정치에 있습니까? 경제에 있습니까? 혹은 과학에 있나요? 아니면 교육에 있나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밖에 없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경을 힘써 읽고 배우고 삶에 옮겨 그대로 살며 전파하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2절)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입니다. 그것을 보고 듣고 지키는 자 복이 있습니다.
현대의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씀은 구분하였는데,

1) 말씀의 본체이신 하나님, 2) 계시된 말씀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3) 기록된 말씀으로서의 성서, 4) 선포되는 말씀으로서의 설교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셋으로 구분하면 계시된 말씀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기록된 말씀으로서 성서, 선포되는 말씀으로서 설교가 있습니다. 물론 성서나 설교나 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되어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오늘 본문과 제목에 비교하면,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읽고, 선포되는 말씀인 설교를 들으며, 계시된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 교회 주의자들은 “성경을 읽으면 된다. 교회에 나가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설교만 들으면 된다. 성경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지켜 행하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7장 24절에, 지혜로운 사람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를 말합니다. 그것은 “내 말을 듣고 순종하면” “내 말을 듣고도 순종치 아니하면”입니다. 똑 같이 들었습니다. 다만 순종하느냐 안 하느냐에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성경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는 큰 믿음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을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가까우면, 그리스도인들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켜 행하려 하지 않게 됩니다. 디모데후서 4장 3-4절에,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쫓을 스승을 많이 두고,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쫓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육신의 건강이나 정욕을 위해서는 정성을 기울여도, 영혼을 위해서, 믿음을 위해서는 너무도 인색한 것이 현대인들입니다. 신문, TV, 잡지에는 손이나 눈이 멀어지지 않고 있는데 성경에서는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 믿음이 있고, 믿음이 있는 곳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경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세상에는 빛도 있고 어둠도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가 하면 사탄의 역사도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빛에 속하여 살든지, 어둠에 속해 살던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 속하든지 마귀에게 속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구별해 낼 수 있습니까?
성경을 읽고, 듣고,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 속한자요,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 속한 자 즉 마귀에게 속한 자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7-28절에서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리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는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 1-3절에,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고 하신 겁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사람의 행복이 땅에 있는 줄 압니다. 동양적 복인 “부, 귀, 강, 건, 명”을 땅에서 얻는 줄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부자 되고, 존귀케 되고, 평안하고, 건강하여 오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시간나면 읽는 책이 아닙니다. 식사시간이 없으면 굶어 죽듯이 성경 읽는 시간 듣는 시간도 없으면 우리 얼혼이 죽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모스 8장 11절에 말세가 되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40장 7-8절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영영히 서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는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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