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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귀하신 예수 (미 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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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해원 목사

  미국에 널리 알려진 복음성가 가수 가운데 조지 베버리 쉐어(George Berverly Shea)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난해서 학교를 휴학하고 보험회사에서 근무했습니다. 어느 날 NBC라디오 공개방송에서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는 저음의 바리톤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의 매혹적인 목소리는 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퍼졌고, 갑자기 스타가 되었습니다. 여러 방송사들이 계약을 제의했고, 이제 인기와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왠지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늘 암송하는 시가 그의 마음을 가득히 메웠습니다. 그 순간 그가 어떤 길로 가야 할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영감을 받아 그 시에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는 부귀와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가수의 자리를 버리고, 다시 평범한 보험회사의 직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빌리 그레함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그와 함께 간증과 찬양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가 찬송을 부를 때마다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때마다 그가 남긴 한마디는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숙연케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주신 박수 갈채를 그리스도와 바꾸지 않겠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예수님이 가장 귀한 분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생애를 바꾸어 놓던 노래 가사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이 찬송가를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금이나 은보다 차라리 주 예수를 가지리, 큰 재물 갖느니보다 차라리 주 예수의 것 되겠네, 큰집과 넓은 땅 갖기보다 차라리 주 예수 가지리, 못 박힌 손에 이끌림이 차라리 나으리라”

  1973년에 여의도에서 빌리 그래함 한국전도대회가 열렸을 때 그도 함께 한국에 와서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1984년에 한국기독교 100주년선교대회가 역시 여의도에서 열렸을 때, 그는 75세의 고령이었으나 굵은 테 안경을 쓰고 변함없이 온화한 미소와 함께 이 찬양을 불러 성도들에게 깊은 은혜를 주었습니다. 그의 노래는 삶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도 예수님이 귀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귀하신 예수, 바로 그것이 그의 신앙이었고, 삶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신앙에서 울려 퍼지는 그의 노래가 전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크리스마스를 코앞에 둔 우리에게, ‘예수님’하면 무엇이 떠올라야 할까요? 저는 ‘귀하신 예수님’이 생각났습니다. 귀하신 예수, 바로 이것이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 마음에 깊이 자리잡아야 합니다. 세상에, 내 삶에, 예수님보다 귀한 분은 없습니다. 왜 그 분이 귀하신 분일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은 그것을 본문을 통해 찾아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자유와 해방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는 미가서를 함께 읽었습니다. 미가선지자는 이스라엘 나라가 어려울 때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는 북쪽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을 보면서, 남쪽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경고와 준엄한 심판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심판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미가는 심판이후에 나타날 회복과 은총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겠지만, 다시 포로에서 돌아와 하나님을 신실히 경배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라의 회복이후에 이제 영원히 회복될 메시야의 시대를 예언한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스라엘의 회복과 나아가서는 메시야의 탄생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정확한 장소가 성취되었습니다. 미가가 예언한 뒤 700년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때 사람들은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오신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여기 미가 선지자가 2절에서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이 말씀은 메시야 탄생의 장소를 정확히 짚었기 때문에 유명한 말씀이 되었지만, 메시야가 오셔서 어떤 일을 하시는 가에 더욱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5절과 6절을 보면, 포로로 잡혀가는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올 것을 말합니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앗수르를 하나님이 멸할 것을 선언합니다. 억압과 포로에서 자유와 해방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메시야가 오시면 세상의 모든 열방과 민족이 억압과 고통에서 해방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6절 끝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내리라”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하신 가장 위대한 일은 바로 자유와 해방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물론이고, 우리의 영혼을 죄와 허물과 사망에서 해방을 주시기 위해 주님은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자유와 해방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여러분, 주님은 이 땅에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이제 우리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서 자유하고, 우리를 짓누르는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나의 목을 죄고, 나를 억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인생에 앗수르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이 ‘죄’라면 죄에서 자유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께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기만 하면 모든 죄가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단번에 우리의 모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옛날에 살던 사람이나 현재사람이나, 앞으로 태어날 모든 사람의 죄까지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나를 짓누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근심과 걱정입니까? 아니면 염려와 한숨입니까? 우리가 염려한들 우리의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습니까? 결정적인 것은 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가 욕심을 부리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염려에서 자유 하십시오. 걱정에서 해방되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자유케 하셨는데, 이제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모든 것에서 자유하며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의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평강과 안연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시면, 메시야의 역할을 4절 끝과 5절 초반에서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들로 안연하게 거하게 할 것이라...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평강과 안연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메시야가 오셔서 하신 일입니다. 또한 이것이 주님이 우리 마음에 오셔서 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평안입니다. 안연한 삶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혼란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복잡하게 하려고 위해 찾아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려움에 있는 우리를 평화롭고, 편안함을 주기 위해 오십니다. 이것이 주님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앞으로도 주님은 평강을 주십니다. 이 평화를 누리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십자가의 길로 가셔야 했습니다. 이 땅에 오신 뜻을 이루고 본래의 곳으로 가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헤어져야 할 것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제자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더 불안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그들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해 갔다고 누명을 씌우며 죽이려고 덤벼 들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은 신분과 노출을 꺼리며 꽁꽁 숨어 있었습니다. 이런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중에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찬송가는 1920년에 코넬이란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신앙인 이었습니다. 어느 날 집회에 참석했는데, 그날 목사님이 주신 말씀은 사도행전 16장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송과 기도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에 큰 은혜를 받은 그는 예배를 끝내고 나오면서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불렀던 노래는 과연 어떤 노래였을까? 무거운 쇳덩어리가 달린 쇠고랑을 발에 차고, 습기 많은 지하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밤새 구슬땀을 흘리며 불렀던 찬미는 어떤 노래이었을까?” 이것을 깊이 묵상하던 중 그는 그것을 ‘내 영혼의 그윽이 깊은데서 울려나는 맑은 가락’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마음에 담으며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작곡자 쿠퍼가 오르간 앞으로 달려가 빠른 속도로 오선지에 선율을 적어가기 시작하여 찬송을 만들었습니다.

  감옥에 있던 바울과 실라에게 왜 불안이 없었겠습니까? 왜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그들도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품고 그들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때 그들이 부른 노래는 그들의 영혼에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맑은 가락이었습니다. 밤새도록 힘있게 찬송을 부르자 마음의 평안과 위로가 임했습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과 안연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 안에 거할 때만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의지하고 살 때만 두려움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의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성탄의 계절이 모든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영혼의 깊은 곳에서 맑은 가락으로 하나님을 노래하면서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능력과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을 보시면, 메시야를 가리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메시야가 가지신 권세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는 말도 메시야가 가지신 권위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이 말씀은 메시야가 지닌 힘, 능력, 위엄, 권세를 표현하는 말들입니다. 그분이 능력이 있고, 그분이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귀하신 분이십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한번쯤 연주되는 오라트리오가 있습니다. 바로 헨델의 메시야입니다. 헨델의 메시야는 당시는 물론 오늘까지, 아마 주님 오실때까지 교회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 작품으로 연주될 것입니다. 이 메시야는 1번부터 53번까지 번호로 되어 있습니다. 그 유명한 할렐루야가 44번, 우리를 위해 나셨다가 8번입니다. 사람들은 메시야에서 44번인 할렐루야를 많이 알고 있지만, 가장 음악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노래는 마지막 53번입니다. 절정을 이루는 이 노래는 힘이 있습니다. 이 53번의 가사는 요한계시록 4장을 근거로 만들어 졌습니다. 계시록 4장은 요한이 본 하늘나라의 예배광경이었습니다. 보좌를 둘러선 네 생물과 장로들과 천사들과 그리고 모든 백성과 만물이 이렇게 주님을 향해 노래합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주님은 능력이시고, 주님은 권세 그 자체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힘과 권세가 있고, 주님의 손이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이 팔을 벌리시면 온 세상을 품고, 주님이 움직이시면 그곳이 거룩하게 됩니다. 주님의 눈빛이 언제나 강렬한 것입니다.

  ‘벤허’라는 영화를 보면서 정말 감동적인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주인공 벤허가 누명을 쓰고 로마에 포로로 잡혀가는데 나사렛을 지나갑니다. 너무 힘들고 지쳐 쓰러집니다. 목이 말라 우물가에서 물을 먹으려 할 때 군사가 발로 차 버립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을 주려고 하자 가차없이 군병들이 채찍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습니다. 벤허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있을 때 예수님이 그에게 오셔서 물을 주십니다. 그런 예수님을 군사가 막으려고 하면서 채찍을 내리 치려고 합니다. 그런데 군사와 예수님의 눈빛이 마주칩니다. 군사는 그 강렬한 눈빛에 어쩔 줄을 모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지신 권세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그냥 거기에 서 있기만 해도, 눈빛 하나만 마주쳐도 세상의 모든 권세 있는 자가 엎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오셨습니다. 그 능력과 권세로 세상을 다스리고, 교회를 다스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그분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이 나를 다스려야 합니다. 내가 나를 통제할 때 나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다스리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주님을 의지하며 이렇게 고백하고, 기도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주님, 나를 다스려 주옵소서, 나의 생각을 다스리고, 나의 말을 다스리고, 나의 행동을 다스려 주옵소서...”

  여러분, 예수님 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귀하신 예수님이 탄생하셨습니다. 이제 그분을 내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분만이 자유와 해방을 주십니다. 그분만이 평안과 안연을 주십니다. 그분은 능력과 권세가 있으신 분입니다. 이 믿음과 깨달음을 가지고, 정말 내 삶에 귀하신 예수님을 참으로 귀하게 맞이하는 성탄의 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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