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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신 3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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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홍문수 목사

한 해의 마지막인 송년주일입니다. 연말이 되면 늘 느끼는 바입니다만 세월이 정말 빠릅니다. 「2004」란 숫자를 낯설어하면서 한 해를 시작하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52주가 다 흘러 오늘 송년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친숙해진 2004년이란 연도를 사용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세월이 빨리 흘러가다 보면 한 해가 끝나듯이 우리 인생도 언젠가 끝나겠지 하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면 저절로 마음의 옷깃이 여며집니다.

왜 우리에게 연도수가 중요하고, 연말연시가 중요한가? 어찌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연도가 바뀐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금년에 떠오르던 해는 내년에도 무심하게 떠오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도수가 바뀌는 것을 중요시 여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분주한 일상의 삶 속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던 우리에게 인생을 생각하고 정리함으로 신앙과 인생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연말이 있고 송년주일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교훈적입니다. 당연하지만 때때로 잊고 사는 인생의 진리, 언젠가 인생에도 끝이 있고 떠날 날이 있음을 다시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 말씀 중심으로 인생을 ‘떠나는 연습’을 한번 해볼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떠남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떠나기 전에 보다 아름다운 인생을 살기 위한 노력의 일환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언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떠날 날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날을 기억하기에 어떻게 하면 인생을 더 아름답고 멋지게 살아갈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간 여러분에게 모세의 마지막 떠나는 모습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기에 저는 떠나가는 모세를 가리켜 이렇게 불러봅니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정말 부러운 모습입니다. 외람되지만 “아, 나도 저렇게 살다가 저렇게 가면 좋겠다!” 이런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도 모세처럼 남은 생애 열심히 살다가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이며 천국으로 떠나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봉독한 신명기는 모세가 쓴 책입니다.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다섯 권의 책이 모세의 저작입니다. 그래서 이를 통틀어 ‘모세오경’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좀 이상하죠? 본문 34장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모세의 임종 사건입니다. 모세가 어떻게 자기 죽는 장면을 썼느냐? 이겁니다. 이런 의문은 이렇게 정리하면 풀립니다. 앞에 33장까지는 모세가 직접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34장은 아마 여호수아나 다른 사람이 기록해서 덧붙여놓은 것으로 짐작됩니다. 어쨌든 마지막 모세의 임종 장면은 우리가 어떻게 인생을 살다가 어떻게 떠나가야 하는지 그 모델을 제시해 줍니다. 이제 본문을 중심으로 모세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을 얼른 읽어봐도 떠나가는 모세의 뒷모습은 한 마디로 장관입니다. 마치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지는 해처럼, 혹은 장엄한 교향악의 피날레처럼 아름다운 대미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120년 생애를 마치고, 출애굽 이후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 고별 설교를 마친 후 느보산(山) 최정상인 비스가봉(峰)에 올라가 있습니다. 거기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바라본 후 임종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한편으로 아쉬움과 섭섭함이 있습니다. 물론 모세가 실수한 것도 있지만 그래도 충성을 다한 그인데 하나님이 어쩌면 그토록 매정하게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게 훌쩍 불러 가시나? 그런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이고 얕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사랑하시고 그를 충분히 축복하시고 상을 주십니다. 그러면서 모세 개인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이뤄 가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생각은 접고 본문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 모세는 아름다운 영혼의 모습으로 떠났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이 세상을 떠나는 임종의 순간은 하나님을 뵙는 날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 살 동안에도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육안으로 만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고전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 ”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뵙는 그 순간을 위해 준비해야 됩니다. 마치 시집 갈 날을 잡아 놓은 신부처럼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면 즉시 천국 갈 수 있지만, 시간을 두고 성화의 길을 걷게 되는 겁니다. 마치 안경알을 닦듯이 우리의 영혼을 맑고 투명하게 갈고 닦으며 수련을 해야 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부르실 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야 합니다.

여러분, 모세의 모습을 보십시오. 떠나가는 그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7절.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 하였더라” 그가 육신적으로 강건했다는 겁니다. 혹자는 이 말씀을 보면서 “아, 저 정도면 더 살 수도 있었을 텐데 ... ” 하면서 아쉬워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충분히 자기 수명을 살고도 건강한 모습으로 따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겁니까?

그런데 모세에게 있어 이보다 더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인격과 영혼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10절(하). “ ...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 ” 그의 영혼이 얼마나 투명하고 맑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깊은 기도 생활을 통해 그의 영혼은 하나님을 깊이 만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민12:3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민수기를 모세가 썼지만 이것은 모세 자신의 자화자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겁니다. 그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온유한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본래는 온유한 사람이 아니었죠. 그가 40세 때 이스라엘 사람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때려죽이기도 했습니다. 성급하고 과격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계속 낮아지고 낮아져서 겸손하고 온유한 인격자가 된 것입니다.

흔히 그런 말을 하죠.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맞습니다. 육신적으로 보면 지당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보면 좀 다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원죄의 모습을 갖고 옵니다. 그러다가 세상에서 실컷 죄를 짓고 죄만 잔뜩 늘여 갖고 떠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으로 왔다가 의인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받고, 예수 십자가 보혈로 씻음 받은 모습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특별히 주님의 거룩한 형상으로 변화 받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4:16에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모쪼록 저와 여러분도 그렇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매일 매일 한 해 한 해 지나면서 우리 영혼의 모습이 더욱 더 주님의 형상으로 성화되고 아름답게 가꿔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모세처럼 가장 아름다운 영혼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만나 뵙기 바랍니다.

[2] 모세는 아름다운 나그네의 모습으로 떠났습니다.

얼른 보면 모세에게 상당한 아쉬움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40년 동안 고생고생 했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니까 그런 생각을 할 만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전혀 섭섭해 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인생이 나그네임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5절.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 ” 이 말은 모세가 하나님이 미리 예언하신 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다는 뜻도 되지만,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죽었다는 뜻도 됩니다. 군소리 하지 않고 발버둥치지 않고 순종함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만큼 충성하다 부르시면 순종하고 떠나야 할 존재들입니다. 나그네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잠시 맡은 일을 하다 떠나는 청지기입니다. 모세도 인간이었기에 나름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싶은 소원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자신의 성취를 확인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곧 후손들이 걱정됐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에 순순히 순종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주신 몫을 다했고, 또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에 그저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광야 40년도 모세가 많은 일들을 감당하고 기적도 행했지만 모두 하나님의 권능이요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모세는 다만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위대해 보여도 나그네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면 떠나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주권 하에 하나님의 역사가 이뤄져야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죽을 때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이 직접 그의 장례를 치러주신 것입니다. 아마 천사를 시켰겠죠. 아스라엘 백성들이 무덤의 위치를 알았다면 아마 그들의 습성 상 무덤을 숭배하고 난리가 났겠죠.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겁니다. 인간은 아무리 위대해도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혹시 이런 식으로 말씀을 드리니까 우리 인생을 너무 왜소하게 느끼실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치 점과 같이 짧은 인생, 스쳐지나가는 청지기요 나그네에 불과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 점들이 이어져 선명한 선을 만들어갑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는 점과 같이 작은 일을 하고 떠나가지만 하나님은 우리 각각을 기억하시고 합당한 하늘의 영광과 상을 예비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이런 사실을 알았기에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습니다. 흔히 세상 떠날 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후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떠난 후 가족이나 공동체의 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모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이 예비되어 있고, 내가 떠난 후에도 모든 일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인간은 그저 도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떠나가면 다른 도구를 들어 사용하실 겁니다. 모세는 그런 이치를 알았기에 여호수아에게 안수함으로 인계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나갑니다. 9절.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정말 모세가 떠났어도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한편 하나님은 모세에게 큰 영광과 상을 주셨습니다. 10절(상).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 ” 이것은 그의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그를 가리켜 예수님을 예표하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변화산 위에서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되실 때 누가 나타났습니까? 모세와 엘리야!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세를 구약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에게 주어질 하늘의 영광과 상이 얼마나 놀라운 것일지 짐작이 갑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나그네 인생입니다. 믿는 성도가 세상을 떠나는 것은 이 세상 나들이를 끝마치고 천국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련 없이 기쁨으로 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시가 있습니다. 한번 소개해 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마더 테레사의 에피소드입니다. 1997년 테레사의 소천 직전 의사들이 그대로 두면 동맥이 막혀 큰일이라고 치료받을 것 권유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제 나이 먹을 만큼 먹었습니다. 갈 때가 됐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강제로 마취 주사를 놓고 수술을 합니다. 그런데 폐렴에 걸려 산소 호흡기까지 달게 됩니다. 그때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답니다. “제발 호흡기를 떼 주세요. 사람은 때가 되면 죽는 법입니다. 호흡기 비용으로 한 사람이라도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세요.” 생명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므로 우리가 목숨을 일부러 단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신앙은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이야기도 우리에게 감동적입니다. 그는 젊디젊은 나이에 순교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예루살렘 교회 일곱 집사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므로 아직 더 남아서 주를 위해 귀한 일을 많이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그는 그것을 알고 순종한 것입니다. 그는 돌에 맞아 죽어갔지만 그 영혼을 받아줄 것을 기도하고 천사처럼 하늘나라로 올라갑니다. 그가 간 후 오히려 그로 인해 하나님은 위대한 바울 사도를 탄생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인간 도구들을 각각 사용하시며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각각에게 하늘의 영광과 상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에 충성과 최선을 다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언제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아멘’ 하면서 훨훨 날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부족했지만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늘의 상을 바라보며 당당히 천국에 들어가기를 소원합니다.

[3] 모세는 아름다운 이별의 모습으로 떠났습니다.

모세가 떠나갈 때, 그리고 떠난 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백성들이 슬피 울며 애도하였습니다. 8절.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애곡하는 기한이 맞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여러분, 모세와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을 성경을 통해 쭉 정리해 보십시오.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습니까? 백성들의 반역과 핍박, 심지어 모세를 죽이려고 달려든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끊임없이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을 섬겼습니다. 그러면서 고운 정도 미운 정도 깊이 들었습니다. 그도 떠날 때 백성들과 헤어지는 게 못내 아쉬웠을 겁니다. 백성들도 떠나가는 모세의 모습을 보면서 울며불며 30일 동안이나 애곡합니다. 아름다운 이별의 장면입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처럼 우리 인생은 이 세상에 각각 와서 살다가 언젠가는 각각 떠나갑니다. 모세처럼 ... 그러나 함께 살 동안 사랑했던 추억들이 그리움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떠나는 사람, 보내는 사람에게 눈물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 눈물은 재회의 약속이 있기에 또한 ‘미소가 섞인 눈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아름다운 생애를 마치고 천국에 입성하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했고 인간을 사랑했던 그 위대한 신앙 선배를 향해 눈물 섞인, 그리고 미소가 섞인 기립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한번 그려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성경 보면 그런 장면이 여럿 나옵니다. 그 중에 하나만 더 소개해봅니다. ‘밀레도 항구의 이별’입니다. 사도행전 20장입니다. 선교 여행 중인 사도 바울은 급히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이제 가면 핍박자들에게 붙잡혀 죽을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 항구로 불러 고별 설교를 하고 작별합니다. 행20: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하나님을 뜻을 따라 가기에 붙잡을 수 없는 사람, 그러나 이별의 아픔이 있기에 눈물로 얼싸안고 떠나고 보내는 사람들!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 이렇게 감동적인 모습으로 장식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천국에서 재회하는 기쁨은 그럴수록 더욱 감동적일 겁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습니까? 모세의 마지막 따나가는 뒷모습이 ... 저는 정말 부럽습니다. “아! 나도 저렇게 살다가 저렇게만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에 솟구치는 간절한 소원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한 해를 뒤로 하고 떠나가는 나의 뒷모습이 어떤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그것이 장차 하나님이 부르실 때 떠나갈 ‘나의 뒷모습’에 대한 예고편인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만족하십니까? 모세 같은, 아니 비슷하게나마 아름다운 뒷모습입니까? 그렇다면 더 아름답게 가꾸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혹시 나 자신조차 안타깝게 여길 만큼 부족한 모습입니까? 그래도 아직은 괜찮습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아직 우리에게 시간을 더 주셨기 때문입니다. 새해가 있고, 남은 생애가 있습니다. 부디 한 해를 뒤로 하고 또 다른 한 해를 향해 나아가는 송년의 계절에 뒷모습이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 하리라 새롭게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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