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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사랑 (요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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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익로 목사

사람들을 보면 나름대로의 삶의 좌우명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특별히 좋아하는 찬송가가 있고, 또한 사랑하는 성경 구절이 있기도 합니다. 감리교의 창설자인 요한 웨슬레는 스가랴 3:2의 말씀은“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라는 성경구절을 가장 사랑하며 이 말씀을 토대로 자기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는 자기의 모 습이 마치 불 속에서 꺼낸 타다 남은 부지깽이와 같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알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충성하며 살아갔습니다. 위대한 선교사 데이빗 리빙스턴은 마태복음 28:20의 말씀인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이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선교를 위해 일생을 헌신하며 끝내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로마서 1:17의 말씀인“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신 말씀을 의지하여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세상의 수많은 성도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또한 암송 되고 있는 성경구절은 본문인 요한복음 3:16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가리켜 마틴 루터는“작은 복음서”라고 불렀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공관복음이라 하고 요한복음을 제 4복음서라 합니다. “작은 복음서”라는 것은 공관복음을 포함한 모든 복음서를 축소시킨 또 하나의 복음서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배시간마다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사도신경”이 있습니다. 이 사도신경은 신구약성경 66권을 하나로 함축해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천지창조로부터 마지막 심판까지 신구약성경 전체를 12마디로 요약해 놓았습니다. 이처럼 요한복음 3:16을“작은 복음”이라함은 작다는 말이 아니라 복음을 축소시킨 것을 뜻합니다.
복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복된 소식”즉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소식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어떠한 사랑입니까?


1. 하나님의 사랑의 성격은?

1) 선행(先行)적인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19의“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하셨습니다. 사랑의 시작을 우리가 먼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기 전 언제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사랑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실 때 우리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로마서 5:8)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또한 말씀하시기를“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한복음 15:16)라고 하셨습니다.“택했다”는 말은 많은 사람가운데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곧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2) 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구약성경 호세아서의 저자인 호세아 선지자를 사랑의 선지자라 부릅니다. 호세아라는 이름은“구원”이란 뜻으로 예수와 의미가 같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음란한 여인인“고멜”을 아내로 맞아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창녀인 아내는 가정을 버리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때마다 호세아는 찾아가서 몸값을 지불하고 아내를 다시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집을 나가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치기도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호세아 개인의 사랑이 아니라 범죄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예표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끊임없는 사랑,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모습은 꼭 호세아의 아내인 고멜과 같습니다. 배신을 합니다. 도망을 갑니다. 잘 변합니다. 환경 따라 변하고, 기분 따라 변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참으로 조석지변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돌아오게 하시려고 때로는 질병을 주시기도 하시고, 물질적인 어려움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가정의 어려움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3) 한없이 넓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한복음 3:16)하셨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의 관념대로 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만 사랑하시는 것이지 모든 세상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는 그들의 선민사상에서 나온 잘못된 생각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세상이란 것은? 

첫째, 세상이란 우주를 가리킵니다.“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요한복음 1:10)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세상이란 악의 세력을 가리킵니다.“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한복음 15:18)하셨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악의 세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와 같이 하나님을 대적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입니다. 민족이 중요하지만 지나친 민족주의를 주장하면 다른 민족에 대한 배타심으로 세계선교의 길을 막게 됩니다. 독일의 나치스가 유태인들을 말살하려한 것도 지나친 민족주의의 말로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의 범위를 넓혀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내 마음에 맞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본 받아야 합니다. 우리교회 전체를 품는 사랑, 더 나아가 한국교회를 품는 사랑, 그리고 아시아를 품는 사랑, 이에 더 넓혀 세계를 품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1895년 겨울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북극의 한 지점에서 노르웨이의 탐험가인 난센이 인류 최초로 북극의 환경을 살폈다. 그는 돌로 오두막을 짓고 바다코끼리 가죽으로 지붕을 덮은 곳에서 혹독한 추위와 싸우며 지냈다. 그때 그는 바다의 깊이를 알아보려고 긴 줄을 바다로 던졌다. 그러나 아무리 줄을 밀어 넣어도 바닥을 느낄 수 없었다. 그 날 그는 탐험일기에다 이렇게 기록했다.“이곳 북극의 바다 깊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같다.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다.”그렇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4) 뜨거운 사랑입니다.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한복음 3:16)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랑하신 결과가 무엇입니까?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무한한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 의해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 딸 앨리스 공주가 있었습니다. 그 공주에게는 네 살 된 어린 아들이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어린 아들이 당시에는 불치의 병이요 위험한 전염병으로 알려진 블랙 디프테리아라는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공주의 주치의는 공주에게 절대로 아들 곁에 가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거기다 앨리스 공주의 체질은 유난히도 약했다고 합니다. 앨리스 공주는 할 수 없이 아들이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넓은 방 한구석에 서서 멀찌감치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아들을 간호하던 간호사가 침대 곁에 갔을 때 멀리 서 있는 엄마를 보며 간호사에게 어린 아들은 말했습니다.“왜 우리 엄마는 더 이상 나에게 가까이 와서 입 맞춰 주지 않나요?”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구석에 서서 듣던 엄마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단숨에 달려가 “미안해, 엄마는 너를 진정으로 사랑한단다.”라고 말하면서 어린 아들을 꼭 껴안았습니다. 의사의 경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깊은 모성애를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엄마 앨리스는 그 위험한 전염병에 걸려 수주가 지난 어느 날 아들과 함께 나란히 땅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앨리스의 죽음은 예수님께서 죽으시면서 값을 치른 그 엄청나게 고귀한 사랑의 희미한 표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방법

본문에“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하셨습니다.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구원 얻는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율법주의자들처럼 행함이 아닙니다. 불교도들처럼 명상하는 것도 아닙니다. 과학도들처럼 탐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도덕주의자들처럼 수양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혹자들처럼 금욕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 1:17)하신 말씀처럼 오직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보내신 그 크신 사랑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미국의 시인 롱펠로가 시상을 적어놓은 휴지조각이 자그마치 6,000달러에 팔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휴지에 위대한 시인의 문학성이 더해져 값이 오른 것입니다. 피카소가 데생을 해놓은 종이 조각은 무려 수백만 달러의 값어치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종이에 작가의 예술 혼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손바닥 크기의 종이 조각에 미국 정부가 독수리 그림의 도장을 찍으면 그것은 100달러짜리 지폐로 변합니다. 이 돈의 가치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인정해줍니다. 그것은 종이 조각에 찍힌 미국 정부의 보증을 믿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에 하나님의 보증이 찍힌 사람은 고귀한 존재로 변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은 인간은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내 속에‘나’를 비우고‘그 분’을 모셔 들이는 사람은 더없이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내 속에‘나’를 채우고 있으면 여전히 하찮은 존재일 뿐입니다.

믿음이라 어떠한 믿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맹목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지식에 의한 믿음이라야 합니다. 믿음에 지식이 빠지면 그 믿음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17:3의 말씀에“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종종 “무조건 믿으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데 무조건이 아닙니다. 그러다간 미신이나 맹신으로 인해 잘못된 길에 빠질 수 있습니다.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5:24에“내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하셨습니다. 또한“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아는 것이 믿음의 전제조건입니다.

말씀이 빠진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이 무엇입니까? 성경말씀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부패하고 잘못된 부분이 많다는 것은 말씀에서 이탈되었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발전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만 기독교의 발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중심하지 아니한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105)하셨기 때문입니다. 빛이 있으면 분별하게 됩니다. 빛이 있으면 길을 찾기에 힘이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은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요한계시록 1:3)하셨습니다. 읽고 들음은 믿음 얻는 길이며, 믿음 지키는 길이며, 믿음을 성장시키는 길입니다. 이 믿음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하심 같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값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얻어지는 영생의 가치를 아십니까? 마태복음 13:44에“밭에 감추인 보화”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보화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이에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가치를 깊이 깨달은 앞서간 성도들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유리하여 궁핍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에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브리서 1:35-38)하셨습니다.

믿음은 내세의 영생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됩니다. 세상을 이기는 방패가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임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믿음의 역사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닣하였도다...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릴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히브리서 11:29-35)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믿음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음을 얻기 위하여 기도하며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겠습니다.

1837년 2월 5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노드필드에서 가난한 가정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에드윈은 가난한 벽돌공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공사장에서 사고를 당해 열명의 가족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가족들은 한 끼를 해결하면 다음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이 사람은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열일곱 살 때 보스턴의 구둣방에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제시한 조건은 단 한 가지“교회학교와 주일 예배에 절대 빠지지 말아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소년은 어느 날 양화점 뒷방에서 무릎을 꿇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소년의 가슴은 점점 뜨거워졌습니다. 소년은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거리에 나가 전도를 했습니다. 그는 어머니에게 배운 인생철학을 그대로 실천했습니다.“하나님의 일을 가장 먼저, 나의 일은 나중에”이 소년이 훗날 유명한 부흥사가 됐습니다. 불을 뿜는 그의 설교를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했습니다. 이 사람이 19세기 미국과 유럽을 뒤흔든 드와이트 무디입니다.“하나님우선”이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이 소년을 세계적인 부흥사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4:16) 이 크신 하나님의 사랑의 실현된 날이 성탄절이었습니다. 이 귀하신 예수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삶의 승리가 있습니다. 삶의 보람이 있습니다. 행복이 있습니다. 이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과 정성 다해 사랑하며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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