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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시작 (행 1: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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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우리는 흔히‘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듣습니다. 교회들의 현재 모습에 큰 문제가 있다고 여겨질 때나 혹 은 이상적인 교회를 추구하고자 할 때, 바로 그 옛날 초대교회의 순수한 모습을 본받아서 교회를 쇄신하자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초대교회라고 해서 모든 면에 있어서 완벽한 교회들은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할 때에는 그냥 그런 막연한 구호만 외칠 것이 아니라, 과연 초대교회의 어떤 모습을 본받자고 하는 것인지를 분명히 정의해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됩니다.

초대교회들 중에서도 첫째 교회는 물론 예루살렘교회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예루살렘교회를 통하여 오늘날의 교회 속에서 초대교회의 모습을 부흥시키고자 할 때 가장 흔히 강조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마도 오순절 의 성령강림 사건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단에서는‘초대교회 부흥운동’이라는 것이 바로‘성령 은사 강조’와 직결되는 등식으로 성립되는 것처럼 주장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예루살렘교회 형성 과 발전에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또한, 그것이 전부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태동 과정에서 성령강림 사건보다 오히려 먼저 있었던, 그리고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기초단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바로 그 단계, 예루살렘 교회가 막 태동했을 때 나타났던 가장 초창기의 모습을 상고하면서, 이 경향교회가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본 받기 위해서 꼭 지켜야 할 기본자세가 무엇인지를 함께 기억하고자 합니다.

1. 성도들이 기도를 통하여 마음이 하나 되는 것이 초대교회를 그대로 본받는 방법입니다.

사도행전 1장 12절로 14절 말씀에「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 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 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 여자들과 예수의 모 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가룟 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열한 제자들의 이름이 언급되면서 그들이「저희 유하는 다락」에 모였다고 했 습니다. 이 다락방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다락방이나, 저 유명한‘마가의 다락방’과 같은 장소였을 가능성이 많지만 확실히 알 길은 없습니다. 하여튼 예수님의 열한 제자들은 그 다락방에 모여 전적으로 합심 기도생활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명하셨던 대로「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즉 성령 받기를 기다리면서 오직 기도에만 힘썼던 것이었습니다.

또 비단 예수님의 제자들뿐 아니라 거기에는「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이 함께 있었다고 했 습니다. 「여자들」이란 예수님 공생애 기간 중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수종 들던 성도들이었으며「예수님의 아우」들은 예수님 부활 이후에 예수님을 믿게 된 자들이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신약성경에서 바로 이 장면에 서 마지막으로 나타날 뿐 다시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천주교에서‘성모’니‘제4위 하나님’이니 하면서 받들 고 있는 마리아는 실상은 예루살렘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과 꼭 같이 기도드리고 있는 평신도의 모습으로 성경에 서 끝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예루살렘교회란 것이 생길 때 가장 먼저 일어났던 일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 마디로 ‘기도’가 됩니다. 사도들조차도 일단 기도부터 했으며, 예수님의 어머니이고 육신 형제이고 할 것 없이 그 다락방 에 함께 있던‘120 문도’전체가 다 일심으로 기도하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큰 성령의 역사가 그들 가운데 일어나 기 이전에 그들은 기도를 통하여 마음을 같이함으로써 첫 교회를 태동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더욱이 무슨 모여 노는 일도 아니고 주님 섬기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뒤따라가는 일에 똘똘 뭉치는 일심동체가 된다는 것은 결코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회에서는 그처럼 다르게 살던 사람들이 어떻게 한 교회 안에서 서로 연결된 지체 로서 철저하게 결속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에 대한 대답이 바로 기도입니다.

사람은 일단 서로 말이 통해야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대화의 소재나 수준이 서로 같아야 만나는 재미가 있고 더 가까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바로 성도들만의 특수한 언어입니다. 이 언어를 모르는 영적 문맹들, 이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아니하는 영적 벙어리들은 절대로 교회의 참된 지체가 될 수 없습니다. 말부터 안 통하는데 그 사이 에 무슨 교제가 있을 수 있으며, 무슨 결속이 생겨날 수 있겠습니까?
부교역자가 제 아무리 똑똑하고 일을 잘 한다 해도 그 담임목사와 함께 새벽기도의 제단에서 교제할 줄 모르면 절 대로 같이 사역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헌금 많이 하고 유력한 장로라 해도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마음을 같이 할 줄 모르는 장로는 그 교회 안에서 감독자가 되기는커녕 실제로는 영적 외톨이가 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서로 만나고 같은 기도 제목을 서로 나눌 줄 아는 성도들 사이의 영적 교감이란 것이 그 얼마나 뜨겁고 강렬한 줄 아십니까? 분명히 어제 밤늦게까지 교회에서 일하는 것을 보았는데도 그 다음날 발걸음도 씩씩 하게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부교역자들을 교회 주차장에서 만나면, 그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저는 속으로‘그래, 너 와 나는 같이 죽고 같이 사는 동지다.’라고 하면서 어금니를 깨물게 됩니다. 어린애를 등에 업고 혹은 손을 잡고 함 께 서서 새벽기도회 특송을 하는 젊은 엄마들을 볼 때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그 추운 날 새벽에 기도하러 나오시 는 성도를 만날 때마다, 저는 가슴 속에서부터 뭉클뭉클 솟아오르는 눈물을 막느라고 혼자 목이 메어버립니다.

바로 기도를 통한 이런 영적 일체감을 통하여서, 이전에는 그렇게 서로 달랐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그의 몸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한 성전이 되어 가며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게’되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말소리 높이지 말고 기도로 서로 대화할 줄 아는, 아니 기도로 항상 통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말이 필요가 없는 교인들이 되어서, 이 교회에 속한 모든 마음들을 항상 하나로 뭉쳐놓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목사가 성경을 통하여 역사를 판단하고 신자의 앞날을 인도하는 것이 바로 초대교회 를 따라가는 방법입니다.

사도행전 1장 15절로부터 20절까지의 말씀에「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 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라 고 기록했습니다.
성령을 기다리면서 기도하는 중에도, 우선 가룟 유다로 인한 공백을 메우는 일이 가장 급선무라고 생각했던 사람 은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가 성경 말씀의 예언을 깨 닫게 됨으로써 일어났습니다.

그는 가룟 유다의 배반 사건이「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한」일이었다고 선포했습니다. 그 유다에게 일어났던 자세한 전모는 본문 18절과 19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내용을 복음서의 기록과 연결시켜 볼 때, 가룟 유다는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고 그 후에 그 시체가 땅에 떨어 지면서 배가 파열되고 창자가 흘러나오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여튼 베드로는 그런 유다의 비참한 말로가 다 성경에 예언된 대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그 유다가 죽었던 밭이 그 당시까지「피밭」이라고 불리게 된 것을 두고「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라는 시편 69편 25절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란 시편 109편 8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 유다의 궐석으로 인한 공백을 이제 메워야 할 때라고 선 언했습니다.

이 또한 곰곰이 따져 보면 놀라운 첫 걸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 백이십 문 도들에게는 이제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 자리에서, 그들이 그 교회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바로 그런 와중에서도, 유다에게 일어났던 사 건의 의미와 지금 예루살렘교회가 당장 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를 바로 성경 말씀을 통하여 찾았을 수 있었던 것 입니다.
아마 요즘의 웬만한 목사 같았으면 그런 상황에서 틀림없이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한다고 나섰을 것입니다. 교인 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도 하고‘교회 회칙 제정 위원회’따위도 만들고 공동의회도 몇 번씩이나 모이면서 공정한 무기명 투표를 통하여 무언가를 찾아보겠다고 바빴을 것입니다. 하지만‘첫째 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직 성 경 말씀이 바로 베드로와 예루살렘교회로 하여금 그들이 처한 역사적 위치를 파악하고 그들이 미래를 향하여 나아 가야 할 길을 인도하여 준, 그 무엇보다도 분명하고 확실한 지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유명 뉴스 앵커맨이, “나는 내가 말하는 동안에는 배운 것이 하나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왜 많은 교 회들이 갈팡질팡합니까? 말 잘 하는 사람은 너무 많고 말 듣는 사람이 적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말하기에 바쁜 교 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서 배울 수 있는 길이 아예 막혀 있는 것입니다.

왜 이 지상교회에 그처럼 말 잘 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까? 사실 따지자면 그 책임도 목사에게 있습니다. 목사 자신이 하나님 말씀 가지고 교인들을 바로 가르치지 못하고, 그저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민주적인 교회 운영을 한답시고 교인들을 부추겨 주고 있으니, 절로 입만 큰 교인들이 양산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목사 자신이 먼저 하나님 말씀을 자기 귀로 듣고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목사야말로 성경을 통하여‘역 사의 벽보’를 읽음으로써 시대적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하며, 교인이 그 어떤 문제에 봉착하고 있더라 도‘발의 등이요 길의 빛’된 말씀을 가지고 그 앞길을 가르쳐 줄 수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 목사가 이끄는 교회는 그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상황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미로에 들어있는 쥐 처럼 갈팡질팡하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고 처음부터 그 목표를 향하여 최단코스로 직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이 혼란스러운 역사 속에서 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 확실한 원리를 성경을 통하여 지도할 줄 아는 목사가 되고, 이 복잡한 인생 중에도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완벽한 대답을 그 설교 말씀을 통하여 배움으로써, 조금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앞으로만 달려가는 교회를 함께 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교회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지는 것이야말로 진 짜로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사도행전 1장 21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에「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 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 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 신바 되어 /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 제비 뽑 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이제 그 한 명의 사도를 보선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그 후보자가 될 자격은 두 가지로 명시되 었습니다. 하나는「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즉 다른 열한 제자들과 마찬 가지로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 기간에 걸쳐 항상 동행함으로써, 그 전하신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직접 듣고 목격했 던 자라야만 했습니다. 또 한 가지 자격은「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었는데, 그 이유는 부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참된 구원의 능력이 됨을 확실히 증거해 주는 마지막 도장과 같은 사건으로서, 복 음 전파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노른자위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수 있는 자는 바 로 이처럼 반드시‘예수님 공생애의 복음’과‘예수님의 부활 증거’를 함께 전할 수 있는‘제1차 목격자’라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 후보자로 두 명이 천거되었는데 하나는 요셉이었고 하나는 맛디아였습니다. 둘 다 사도로서의 자격을 꼭 같 이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결정은 제비를 뽑아 내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것을 본받아서 교회의 직분자 들을 선출할 때 그대로 적용하는 교회들이 간혹 있는데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선 이 예루살렘교회의 사도 선출 에서는 전교인이 후보자가 되지 않았고 오직‘자격 있는 후보자’를 먼저 공천했었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예수 님께서 친히 고르신 것처럼 마지막 열두 번째 사도 역시 주님의 뜻에 온전히 맡기기 위해서 제비를 뽑았던 것입니 다. 실제로 신약교회에서 제비뽑기 선거를 행한 일은 이‘사도 보선’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며, 곧이어 나타 나는 첫 일곱 집사 선출 때만 해도 이미 적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여튼 그 특별한 선거 결과 맛디아가 결정되어「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되는」열두 번째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사도들이‘첫째 교회’설립의 근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열두 사도들이 보고 들었던 대로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역, 그리고 그들이 목격하고 죽기까지 증거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 바로 이것들이 신약교회 설립의 확고부동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문자 그대로‘사도의 터’가 바로‘예수 그리스도의 터’가 된 것이 며, 바로 그 터 위에 초대교회 중에서도 첫째 교회인 예루살렘교회가 세워졌던 것입니다.

오늘날은 아무도 이런‘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만나 본 그 사도들의 증거 외에 교회에 필요한 또 다른 계시, 덧붙여져야 할 새로운 복음이란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오늘날의 목사들은‘선지와 사도의 터’라는 말의 중요성과 강도를 점점 잊어가고 있으며, 자연히 교인들에게도 그 말은 점점 더 생소하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그냥‘오직 예수’면 되는 것이지 그 사이에 또 무슨 인간적 권위주의 냄새가 풍기는‘사도’따위를 끼워 넣을 필요가 있느냐고들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만 제대로 믿으면 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예수님을 제대로 믿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 바로 사도들의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되 사람들의 헛된 전설이 아니라 바로 그 주 님의 생애를 자기 눈으로 목격했었던 사도들의 증거가 있어야만이 그 예수님의 복음을 제대로 믿을 수 있기 때문입 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되 거짓말하는 이단의 감언이설이 아니라 바로 그 주님의 부활을 직접 보았던 사도들의 증거를 통해서만이 그 주님께서 남겨 주셨던 영생의 약속을 제대로 듣고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고 해서 다 같은 믿음이 결코 아니며, 오직 사도들이 증거했던 대로 믿고, 사도 본인들이 믿었던 그대로 믿는 그것만이 예수님을 바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우 리는 사도들의 증거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육성과 꼭 같은 권위를 가진 말로 들어야 하며, 그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 을 마치 예수님께서 친히 쓰신 친서처럼 완전무결한 말씀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실로「선지와 사도의 터 위에서 주의 교회 이루는 것」이야말로 초대교회로 제대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초대교회를 제대로 계승하는 운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오늘의 교회 사이에는 2000년이라는 시공의 간격이 있지만, 오직 선지와 사도의 터 위에 있는 교회는 그 첫째 교회였던 예루살렘교회와 조금의 변동이나 차이도 없이 꼭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지게 되는 것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 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 승천 직후에 곧 그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성령을 기다렸고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할 사명을 받았으며 천당 소망을 간직하고 있는 참된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개 인 신자들이 생겨나자마자 곧 따라온 것이 바로 교회라는 신앙공동체의 형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첫째 교회’의 구성원들은, 적어도 교회 생활이란 것은 처음으로 겪게 된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는 교회를 어떻게 운영해 나가야 한다는 헌법도 없었고 참고로 할만한 어떤 전례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교회는 그 첫 출발점에서부터 정확한 교회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예 루살렘교회는 오직 함께 기도함으로써 모든 마음들이 하나로 뭉쳐지는 거룩한 공동체로 형성되어 갔습니다. 예루 살렘교회는 오직 기록된 말씀의 가르침을 통하여 교회가 나아가야 갈 방향과 해야 할 일을 찾았습니다. 예루살렘교 회는 예수님의 육신적 모친 마리아의 무슨 대리적 사역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의 생애와 부활의 목격자 된 사도들 의 증거를 기초로 세워져 갔습니다. 아무 경험도 지침도 없는 중에 태동되었던 예루살렘교회였지만, 바로 이 때문 에 그 첫째 교회는 오고 올 수많은 교회들에게 실로 모범적인 기본자세를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이기초없이교회가 제대로 세워질 수 있는 방도는 전혀 없습니다. 이 방법을 따르지 않고 교회가 초대교회의 신앙 을 계승할 길은 결코 없습니다. 기도를 통한 화합과 말씀을 통한 지도라는 이 최상의 방법들, 선지와 사도의 증거라는 이 확고부동한 터 위에서 이 교회를 더욱 온전하고 튼튼하게 세워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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