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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연결되어 지어져가는 하나님의 집(1) (엡 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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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정연수 목사

(엡 2:20-22)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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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교 본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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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2005년, 새해를 맞은 오천가족들의 삶 속에 섬세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늘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올해 우리 교회가 마음에 품고 기도하려고 하는 2005년의 표어입니다. 앞으로 이 본문 말씀을 통해 3주간 연속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에 기대를 가지시고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오천교회가 복음의 비밀을 맡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리의 정체성 -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한 때 유행어 중에, “착각은 자유”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자유이긴 합니다만 그 자유로운 착각의 결과는 결코 사람을 자유롭게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또 유행어 중에 “주제 파악 좀 잘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좋은 말입니다. 상황과 본질을 빨리 파악하고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 일이야말로 문제 해결과 성숙의 전제조건입니다.

그리스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혼란기를 살던 청년들을 향해 “너 자신을 알라!”는 화두로 아테네의 많은 젊은이들의 정신을 깨웠습니다. 그는 “철학은 무지로부터의 탈출이다.”라는 말로 자신을 냉철히 들여다보는 것이야말로 무지로부터 벗어나는 길임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많은 정의를 스스로 내리셨습니다.
나는 선한목자다, 양의 문이다, 포도나무다, 나는 길이다, 나는 생명이다,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등등.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자신에 대한 정의(定義)를 통해 자신의 사역과 사명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눅 13: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나를 알 때에 내가 가야 할 길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먼저 내가 누군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우리를 정의해 줍니다.

(엡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와 같은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동질감 없는 외국 사람, 내가 머무는 그 자리에 아무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 나그네의 위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 작정하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누군들,
“나는 예수님을 시큰둥하게 믿고 싶어.”
“나는 그냥 미지근한 신앙인으로 살기로 결심했어.” 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겠습니까?
더 열심히 하고 싶고, 더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확신에 찬 믿음으로 교회를 섬기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혁명이 필요합니다. 내 자신을 뜨겁게 달궈낼 그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실 것입니다.

가장 확실하게 자기 개혁을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를 개혁하고,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 원은 먼저 자신이 누구인가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입니다. 그 일이 되고나서야 그 다음에 나의 현재의 모습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고 자기애(自己愛)를 갖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힘으로부터 자기 혁명의 에너지를 얻어낼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한 사람을 망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그의 자긍심을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넌 안돼!” “니 까짓게 뭘 안다고 그래?” “모르면 가만히나 있어” 라는 등등의 말은 한 사람의 인격적 자긍심을 무너뜨리게 하여 자신의 생에 애착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결국 그런 구박이나 경멸함에 찌든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그 사람만의 가치를 누리지도 못한 채 가치없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말 한마디로 거목이 될 아이를 잡목으로 바꿔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오늘날 세계 역사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갖고 있는 민족적 자긍심을 빼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자긍심은 창세기에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모든 환경의 중심에 사람을 세워 주시면서 그 동산의 중심에 사람을 세워주신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이 들어간 나라들마다 인간의 존엄에 대해 깨닫게 되고, 자신의 삶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가를 깨닫게 되면서 삶의 자각운동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최고의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서 스스로를 깨닫게 되는 계몽운동(啓蒙運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바보 온달에게 평강공주는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바보가 아닙니다. 위대한 장군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바보 속에 감춰어져 있었던 진짜 알맹이를 드러나게 하는 힘있는 말이 되었습니다.

일본인들이 우리 민족을 말살하기 위한 정책을 쓰기 시작할 때에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뭡니까? 민족적 자긍심을 깍아내리는 일을 했습니다. 상투를 잘라 자존심을 꺽었습니다. 왕궁 정문에 총독부 건물을 세워 자긍심을 깍아 내렸습니다. 이름을 바꾸고, 자국어를 쓰지 못하도록 강요했습니다. 특히 3.1 운동이후 더욱 강력하게 시행된 문화말살 정책은 바로 우리의 정체성을 잃게 만들어 힘없는 민족으로 만들려는 고도의 정책이었습니다.

사단은 오늘날 크리스천들에게 똑같은 전략을 구사합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자신있게 드러내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누리지 못하도록 아주 지엽적인 단점들을 끄집어 내어 우리의 긍지를 깍아 내립니다.

맹수를 조련하는 데 두 가지 방법이 있답니다. 영국식과 독일식이 있는데, 영국식 방법은 동물을 사랑으로 감화시키는 방법으로 시간은 비록 오래 걸리지만 이렇게 길들여진 맹수는 아이들과도 잘 지내게 된답니다. 그런데 독일식 방법은 채찍으로 때리고 횃불로 위협을 하여 길을 들이는 것으로서 상당히 빠른 시간에 길이 들긴 하지만 조련사가 한 눈이라도 파는 순간엔 비호처럼 뛰어들어 몸을 문다는 것입니다. 동물이 이럴진대 인간은 말할 나위도 없겠죠?

성경엔 단 한군데도 인간의 존엄성이나, 가치를 깍아 내리는 말씀이 없습니다.
우리는 누굽니까?
우리는 자랑스럽게도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같은 사도들의 후예입니다. 엘리야, 모세, 사무엘과 같은 선지자들의 영적인 혈통을 잇고 있는 자입니다.

나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함부로 살지 않습니다. 자신의 몸을 함부로 굴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에 애착을 가집니다.

사랑하는 오천가족 여러분,
싸구려 성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싸구려 티셔츠는 한번 입고 획~ 버려지지만 명품 옷은 두고두고 입을수록 더 몸에 잘 달라붙는 입기 편한 옷이 됩니다. 하나님께 일회용 일꾼으로 쓰이지 마시고, 두고 두고 사랑받는 일꾼 되시길 바랍니다.

왕되신 하나님의 권속으로서의 품위있는 신앙생활 하기를 바랍니다. 호랑이는 굶어 죽어도 풀을 먹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상황과 형편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얄팍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얇은 양은냄비처럼 들끓게 살지 않았습니다. 무쇠 가마솥은 한번 덥혀지면 끄느름하게 오래 오래 갑니다. 상황과 환경의 변화에 휘둘리며 살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첫 사랑의 뜨거움을 주님 만날 날까지 간직하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혈통을 잇는 분들이십니다.
교회 안에서 그런 품위를 지킵시다. 믿지 않는 분들에게 그런 품위를 보여줍시다.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 20D 동호회의 닉네임 대갈장군 님의 고백, 예화.


우리의 기준 - 모퉁이 돌 되신 예수님.
우리의 정체성을 깨달은 다음에는 우리의 삶의 방법, 삶의 기준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군인은 군인으로의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딤후 2:4) 『군에 복무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군인으로 부른 상관을 기쁘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살림살이에 얽매여서는 안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크리스천다운 삶의 방식이 있는 것입니다.
호랑이면 뭐합니까? 광야를 뛰어 다니면서 날카로운 이빨로 사냥을 해야 할 호랑이가 평생 강아지들 틈바구니에서 개처럼 주는 밥만 얻어 먹고 살다보면 호랑이도 개 취급 당하기 마련입니다.

군인다운 삶의 자세가 있을 때에 비로소 그가 군인 대접 받는 것처럼, 크리스천이 크리스천다운 삶의 기준을 세우고 살 때에 비로소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긍지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짠맛을 내겠느냐? 그러면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리니,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맛을 내는 성도가 되십시다.
간신히 교회 주소록에 이름만 올려 놓은 성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간신히 주일예배만 참석하는 집사님들이 올해에는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봉사와 헌신이 없는 권사님들, 교회의 공동 집회에도 참석치 않는 권사님들이 없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장로님들이 희생과 섬김을 통해 더욱 성도들에게 존경받는 장로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님을 모퉁이 돌로, 그분을 기준 삼고 그분의 삶을 표준으로 삼고 따라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얘기... 부담스러운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만일 여러분의 영혼에 이 말씀이 부담이 되었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부르심이라 믿으시고 더욱 더 기도하시면서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셔서 우리 삶의 표준을 제시해 주십니다.

(요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우리 교회 안에 좀 더 하나님 스타일, 예수님 스타일이 드러나게 되도록 행동하십시다.
교회에서 예수님 스타일이 나타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퉁이 돌 되신 예수님의 기준선에 맞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 냄새 좀 줄어들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더 진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씀 듣고도 아무 가책도 없이 무덤덤하게 매 주일 흘러가는 종교전문가가 되어가고 있진 않습니까?
그분의 기준에 맞춰 살려고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생명력이 사라지진 않습니까?

우리 이렇게 외치면서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결단하시고 나아갑시다.

주님, 내 삶에 하나님의 기준이 적용되게 하옵소서.
주님, 내 안에 예수님의 삶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주님, 내 말 속에 예수님의 생각이 표현되게 하옵소서.
주님, 내 걸음이 예수님이 가신 길을 기뻐 걷게 하옵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지어져가는 아름다운 우리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할 것을 기대합니다.
멋있는 교회, 멋있는 성도가 될 때에 멋있는 사역을 우리는 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멋을 한껏 드러내는 복된 한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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