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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기도(3) (눅 17: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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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노강국 목사

오늘은 계속해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말씀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주기도문의 세 번째 시간으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표현된 기도의 말씀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이 대목에서 “나라에 임하옵시며”라고 잘못 외우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나라이”라고 표현된 말에서 이 “이”는 주격조사로서 “가”라는 표현과 함께 쓰이는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란 단어에는 “대통령이”라고 하지만, 국무총리에게는 “국무총리가”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마 옛날에는 무조건적으로 “이”라 붙였나 봅니다. 그래서 “나라가”라 하지 않고, “나라이”라고 번역한 듯싶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기도문을 외울 때, “나라에 임하옵시며”라고 하지 말고,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나라에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면,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 임하옵시며”라는 뜻으로 잘못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생각해보는 또 하나의 맞물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새해를 시작하면서 “올해는 더욱 나은 삶을 이룰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의 말씀을 드리면서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이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씀과 어떤 연관이 되는 것인지를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하는 이유에서입니다.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이루기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추구해야 할 것인데,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눅 17:20-37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말씀입니다. 대부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만, 가만히 보면 이 말씀을 듣는 대상이 둘로 나누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21절의 말씀은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22-37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은 그 길이가 무척 짧은 데 비해, 제자들에게는 비교적 길게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바리새인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

먼저 바리새인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보도록 하십시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겠느냐?”고 묻는 데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흔히 말하는 “메시야 사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세력들을 하나님께서 물리치심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평화를 누리며 살도록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메시야를 보내신다고 믿는 사상이 바로 “메시야 사상”인 것입니다. 이렇게 메시야가 올 때에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때라고 여긴 것입니다. 또한 이런 일이 있기 전에는 반드시 어떤 징조들이 있을 것이라고 이들은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런 생각을 갖고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겠느냐?”고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질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다소 엉뚱한 대답을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대답하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장소에 제한되지 않고, 이미 현재 사람들 가운데 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들의 생각대로 예루살렘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한 나라임을 말씀하시는 동시에 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 이미 이 세상 사람들 사이에 와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곧, 앞으로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다음 하늘에 오르시고, 후에 다시 오셔서 이루실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며, 이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어 나중에 예수께서 다시 오시면 완성이 될 것이기 때문에, 이미 와 있는 하나님 나라는 알지 못하고 앞으로 올 하나님의 나라만 기다리는 것은 잘못이라는 그러한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란 그저 객관적으로 두리번거리면서 파악하고자 하는 그러한 자세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삶 속에 실존적으로 맞아들여야 하는 신앙의 결단을 요구한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전인격적으로 참여시키지 아니하고, 제 3자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염두에 두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자세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내용의 말씀인 것입니다.

2. 제자들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

이러한 예수님의 입장은 제자들에게는 더 자세하게 설명하심으로 분명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새인들에게 주신 말씀의 뜻을 보충시켜주시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자세를 지닌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좀 더 쉽게 보충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두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2-1.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

그 첫 번째는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입니다. 그것은 심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라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뜻의 “하나님의 통치(The Reign of God)”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는 현실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말합니다.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다스린다는 모습이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나타나는 때가 언제입니까? 그것은 심판할 때입니다. 운동 경기에서도 심판의 판정이 가장 중요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말씀에는 바로 이러한 내용이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이렇게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사실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현실은 바로 심판의 모습이 이루어질 때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흔히 어떤 일의 마지막과 결론을 진정 알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자신의 현실을 바로 잡고자 하는 법입니다. 이것이 심판이 제시하는 강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에는 다른 모습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나라의 이러한 심판적인 성격이 두드러지게 강조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러한 심판적인 요소만큼 사람들에게 강하게 영향을 주는 것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심판적인 성격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이 자기들에게가 아니라, 자기들을 괴롭히는 이방사람들에게만 임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을 다른 사람들에게 임할 것으로만 여기지 말고, 너희들에게도 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노아 시대의 홍수와 롯의 시대의 소돔 성의 멸망을 기억하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이 나에게도 임할 것으로 여기고 이에 따른 자세와 모습을 지닐 때에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고자 하는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심판과 구원이라는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내게도 임할 것으로 염두에 두고, 이에 따른 바른 자세를 지니고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를 들은 제자들이 묻습니다. 37절, “가로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에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주검(시체)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이는 무슨 말씀입니까? 이는 이 세상에 이미 이러한 심판적인 흔적이 있음에서 그러한 경고를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지난 연말, 동남아시아 지역에 큰 지진으로 인한 해일로 말미암아 수만 명의 사람들이 죽고, 수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곳을 여행한 많은 관광객들도 피해를 입었습니다. 요즘도 매일 뉴스에 그 사건이 나오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인해 죽을지 모른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일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과연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물론 이 일로 인해 큰 해를 입은 나라와 백성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도와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또한 우리 스스로는 이 일로 인해 깨달음과 경고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검(시체)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 땅을 지배하던 로마 총독 빌라도가 로마 황제를 위한 제사를 지내면서 몇몇의 갈릴리 사람들을 죽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이 일을 예수님께 고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이 (죽음을 당한) 갈릴리 사람들이 이렇게 죽은 것이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었기 때문인 줄 아느냐?”(눅 13:1-2). 그리고 실로암이란 곳에서 높은 망대가 무너져서 열여덟 명이 치어 죽은 사실을 들으시고는, “이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어서 죽은 줄 아느냐?”(눅 13:4)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5). “주검(시체)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노아의 때를 기억하고, 롯의 아내를 생각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2-2.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

둘째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25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찌니라.”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있어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따로 떼어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연관 지어 생각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를 다른 모습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가 23, 24절에서 나타납니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 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라고 하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추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고자 한다면 이는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나에게서 이루어지지 않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곧 이 예수를 믿는 나에게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곧 하나님의 통치가 나에게서 이루어지는 현실, 나는 곧 하나님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음을 현실적으로 느끼면서 살아가는 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지배하고 있는 실질적인 실세가 과연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돈의 힘에 굴복한다면 내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권세나 명예를 추구하고 있다면 내게는 하나님의 나라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어떤 초자연적인 것에 믿음의 본질을 두고 거기에 영향을 받고자 한다면 내게는 하나님의 나라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은 과연 하나님께서 나를 지배하고 계신가 하는 질문을 실존적으로 해 보아야 합니다. 그 질문은 이렇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과연 하나님 아버지만으로 만족하고 있는가?”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하여 오늘 우리에게는 세 가지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하나는 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삶이 더욱 충만하고 나아지기 위하여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첫 번째 내용이라는 점입니다. 둘째는 우리의 주님 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기도하는 우리 자신에게) 임하기를” 기도하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이 하나님의 나라의 심판적인 성격을 우리는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에 진정한 영향을 받는 삶을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이루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롯의 아내를 생각하라.”,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아멘.

<기도>

하나님 아버지시여!
오늘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기도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은 우리의 현실의 삶이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없는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여기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인 모습을 보게 하여 주시옵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늘 우리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나와 내 이웃의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시아에서 지진으로 희생당한 그들이 결코 우리보다 못하거나 우리보다 잘못이 많아서가 아님을 깨닫게 하여 주셔서, 그들의 죽음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우리의 지침이 또한 되게 하여 주심으로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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